정조는 10살 때 요절한 효장세자(영조의 장남, 사도세자의 배다른 형)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세손이 되었습니다.
세손이 영조를 잇는 후계자로 이어져야 하는데, 사실이야 어찌되었든‘역적의 아들’이라는 호칭으로는 도무지 대책이 없어서 영조는 신분 세탁(?)을 해 준겁니다. 무려 34년 전에 죽어서 볼 수도 없었던 효장세자의 아들로 말입니다. 이리해야 세손이 종통을 잇게 되고, 또 즉위하여 국정을 수행함에 노론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방패막이도 될 거라는 . .

 

영조는 인명을 너무도 쉽게 살상하는 사도가 등극하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국왕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세손이 사도의 아들로 대를 이으면 국정이 안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아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자할 때 나타납니다. 조카사위인 사도를 죽임에 큰 역할을 한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정의 일을 알 필요 없습니다.”라 말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이 말인즉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공공연한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하였습니다. 이 같은 일을 기록에는 ‘저들끼리 서로 뭉치고 무리를 지어 국권을 농락하고 법을 무시하며 조정을 무너뜨리려 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와신상담

 

정조는 즉위 9일째 되는 날(1776년 3월 19일)에 양아버지‘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추승하고, 다음 날에는 ‘사도’로 부르던 존호를 ‘장헌’으로 바꾸고,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으로,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는 ‘경모궁’으로 격상시켰습니다.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어렵게 왕으로 즉위한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 이것 외에는 불쌍하게 죽은 아버지를 높이려 한 행위는 없습니다. 왕을 나라와 같은 격으로 일컫는 왕조국가에서 오래 동안 가슴깊이 품어왔던 일을 왜 추진하지 못했을까요?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때 조정은 노론세력으로 가득한 세상이어서 사도세자의 누이들 모두 그쪽으로 시집을 갔으며, 외가인 홍씨 집안도, 정순왕후 김씨 집안도 그쪽이었기 때문에 비비고 기댈 곳이 전혀 없는 정조는 도저히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조정과 궁궐 안팎 모두가 노론인 환경에서 정조는 가슴에 품어왔던 일을 추진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수들과 같이 지내면서 쓸개를 맛본다는 “와신상담”기간을 무려 13년을 갖습니다. 왜 그리 했을까요? 연산군이 걸어갔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법은 성공할 수 없고, 또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트린다는 교훈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몰랐어도 ‘원한이 생겼을 때 자비의 마음을 가지면 원한이 없어진다’는 진리는 알았는가 봅니다. 그래서 뒷날을 다짐하며 규장각을 설치해 초계문신을 양성하고, 장용영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등 알게 모르게 친위세력을 길러낸 것이지요.

 

 

 

묘 자리 이전을 확정하고 이틀이 되는 날, 삼정승과 예조판서, 천문지리를 담당하는 관상감, 지금으로 치자면 국토자원 이용과 개발을 담당하는 선공감, 그리고 세 명의 지관들이 묘 자리(화산 花山) 답사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묘 자리가 네 겹으로 둘러싸였으며, 그 자리로 용의 기세가 7백리를 뻗어 내려왔고 용을 보호하는 물의 뒷받침도 완벽해 천지와 함께 영원할 터’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큰 어려움이 있었으니, 묘 자리에 수원부 관아가 있어서, 조선시대 마을이 그렇듯 관아 주변에 수원백성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겁니다. 나아가서 왕릉자리에는 개 짓는 소리나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하니까, 백성들과 가축을 멀리 보내야 한다는 것이 시급한 필수요소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정조는 ‘가장 급선무는 그 고장 백성들을 안정시킨 다음에 읍치를 옮겨야 하는데, 이전해야하는 백성들의 처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석으로 애달프니, 민심이 즐거워야 내 마음도 조금 풀릴 것 같다. 읍민의 이전 비용으로 균역청에서 10만 냥을 수원부로 보내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기는 비용에 보태 쓰게 하고, 읍치 인근 백성과 신읍치로 이주하는 백성들에게 10년 동안 면세의 혜택을 주고, 환곡을 감해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왕실의 일이지만 집안일이기 때문에 백성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정조는 천장을 결정한 다음 달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새로운 능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의론하여,‘힘들여 키워주신 현부(顯父)의 은혜에 융숭(隆崇)하게 보답한다’는 뜻을 가진 현륭원으로 할 것으로 결정합니다.

 

 

 

 

정조는 백성들이 천장으로 인하여 겪어야하는 생계대책의 어려움을 해소해 주기도 했지만, 혜경궁의 마음은 어떻게 헤아리고 있었는가를 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자궁께서 천장 행렬을 나가 보시겠다고 한 결 같이 말씀하시어 마음을 너그러이 먹고 슬픔을 억제하시도록 청하고 있는데, 상여가 성내로 지나는 것을 보시게 될 경우 장차 무슨 말로 위로드릴 수 있겠는가? ’라 하고, 발인하는 날에 상여는 영우원(현재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성 밖으로 난 길을 택하여, 둑도(현재 광진구 뚝섬)에 설치한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과천에서 유숙한 다음날 수원을 향하도록 길을 틀어버립니다.

 

천장을 위한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정조는 하루에 한두 차례 영우원을 찾아가고, 임시로 엉성하게 지어놓은 공사판 장막에서 감독을 합니다. 낮이건 밤이건 거리낌 없이 거둥하는 바람에‘지휘관이 부지런하면 병사들은 쉴 날이 없다’는 말 그대로 신하들은 상당히 버거웠을 겁니다.

 

구덩이가 깊어지면서 정조는 신경을 더욱 곤두세우고, 27년 전 허투루 쓴 묘지 실태를 알고는 격한 감정에 가슴을 치면서 부르짖고, 격기가 치밀어 혼미해지자 신하들이 부축하고 탕약으로 가라앉히고는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사실 그대로 혜경궁에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혜경궁의 궁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혜경궁 처소 근처 건물에 규장각 각신이 머물면서 수시로 문안드리게 하고, 승지는 혜경궁의 안부를 정조에게 알리는 체제를 유지시켰기 때문입니다.

 

정조의 심신이 지극히 피로한 상태에 이르렀는데, 설상가상으로 관을 보게 되면 더 심한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 염려된 혜경궁은 박명원에게‘아무쪼록 옥체가 훼손치 않도록 조심시켜 달라. 그리고 관을 볼 수 없도록 이 글을 받는 즉시 환궁시켜 달라’는 내용의 언문 교서를 내리는데, 박명원은 이 편지를 정조에게 보여줍니다.

 

 

 

이를 읽고 난 정조는 ‘이 말씀은 어제 저녁에 떠나올 적에 백 번도 더 넘게 들었는데, 내가 직접 구덩이 속을 살펴보느라 신경 쓰고 애태울 것을 염려하시어 이 글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편케 하자니 천고에 슬픈 애절함을 다할 수 없고, 관을 보고 슬픔을 쏟아내자면 어머니께서 어의의 진찰과 처방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봉한 것을 열 즈음에 한 차례의 곡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면서 난감해 합니다.

 

박명원은 ‘전하께서 환궁을 하지 않으시면, 장차 무슨 말로 복명하겠습니까?’하고, 궁에서 신하가 달려와서는‘혜경궁께서 정신과 기운이 자꾸만 어지러워지고 있는데 환궁하신 후에야 수라를 들겠다고 한다’보고하고, 공사 감독자는 ‘지금 환궁을 하셨다가 오후에 다시 오시면 충분히 개봉하기 전에 올 수가 있습니다.’고 아룁니다.
그러자 정조는 ‘지금으로서는 혜경궁의 마음을 누그러지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 반드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여 나로 하여금 천고에 슬픔을 머금게 하지 말라’며 궁궐로 돌아갑니다.

 

정조가 궁궐로 환궁하였을 때, 혜경궁은 영우원 공사감독에게 ‘성상의 체후가 근래 오랫동안 화평치 못했는데, 만약 관을 꺼낼 때에 몸소 임하신다면 필시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될 것이니 걱정스런 마음이 한량없다. 지금 바야흐로 친히 옷깃을 당겨 만류하면서 출궁을 하시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가마가 영우원에 이르기 이전에 관을 꺼내도록 하라’는 봉서를 보냅니다.

 

서로를 보살피고 챙겨주는 어머니와 아들의 마음.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세상 어떤 것이 이렇게 오가는 사랑보다 진하고 강한 것이 있겠습니까?

 

박명원이 상소를 올린 1789년 7월 11일부터 시작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공사는 그해 10월 16일 끝났습니다. 그 동안에 구읍치(수원부 읍치가 있던 자리)에 살던 백성들은 신읍치(화성행궁이 위치한 곳)으로 이전하였고, 신읍치에는 향교와 동헌을 비롯한 각종 관아가 건축되었습니다. 세 달의 짧은 기간에 엄청난 공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쌍한 아버지를 ‘천하에 둘도 없다’는 명당 터에 모신 정조는 ‘아, 불효한 이 아들이, 천지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 지금껏 멍하고 구차스럽고 모질게 목석마냥 죽지 않고 살았던 것은 소자에게 중사를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하늘이 들어주는 것인데, 이 소자는 감히 기필코 이렇게 해야만 소자가 죽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천하 후세에 떳떳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합니다.

 

현륭원 천장이 있은 다음 해에 조선왕조를 이어 갈 순조가 태어났으니, 이것은 풍수지리설이 주장하는 동기감응의 덕을 본 것일까요?
정조는 매년 현륭원을 행차하였지만 성에 차지 않아서 자신의 어진을 현륭원 재실에 걸어놓고 ‘매일 아버지께 문안드린다’는 마음가짐을 유지했습니다.

 

어느 해인가 정조는 자신이 단명할 것을 알았는지, 그를 따르던 채제공에게 ‘살아생전에 아버지에게 효도를 못하였으니, 죽어서라도 효도를 하고 싶다. 내가 죽으면 아버지의 발치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이를 따라 정조는 사후에 융릉 옆 건릉에 효의왕후와 같이 합장하게 됩니다.

 

융릉과 건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의 하나로,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입니다. 가족과 함께 방문하셔서 아름다운 풍경과 가족 간의 사랑을 느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다음에는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건립된 “용주사”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