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님의 춘추 마흔둘이 되서야 아버님 탄생을 보신 할아버님은 “이제는 죽어 역대 조상들을 만날 면목이 서게 되었다”고 하셨다지요. 줄곧 삼종의 혈맥이 자기 대에서 끊길까봐 노심초사하시던 할아버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보지 못했어도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장남인 큰아버지(효장세자)가 열 살에 돌아가신 뒤 무려 7년 동안 후손을 볼 수 없었으니, 아버님의 탄생은 왕실과 온 백성들에게 삼천리강산이 흔들릴 정도의 기쁨이었을 것이라는 게 소자의 생각입니다.
소자는 아버님의 탄생을‘태어나시기 며칠 전부터 상서로운 빛과 구름이 보였고, 태어난 자태에서 해 같은 빛이 나와 사람들을 비췄다’고 실록에 기록된 것을 보고 ‘진짜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하는 엉뚱하고 외람된 생각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첫돌도 되지 않은 아버님을 보고서‘뛰어난 자질이 숙성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벌써 두세 살짜리 아이와 같았는데, 할아버님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들어와 보도록 명하시고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더러 성(誠)·경(敬) 두 글자를 써서 들어 보여주게 하였더니, 마치 조심스레 받듯이 자세히 바라보았다’라 기록된 것도 보았습니다.

 

세자 책봉이란 게 신하들이 원자의 나이와 학문의 성취를 보아 임금님께 건의하여 이루어짐을 볼 때, 한 살의 나이에 성(誠)·경(敬) 두 글자의 깊은 뜻을 깨우친 아버님이 두 살이 되자마자 왕세자로 책봉된 것은 전혀 무리가 없는 처사라는 것이 소자의 생각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세 살에 효경을 외웠고, 마음과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학문인‘소학’을 실천하셨다지요? 거기에 서예를 좋아하셨고 시(詩)를 지어 나눠주셨으며, 이를 받으려고 대신들이 줄을 섰다는 것을 보면 아버님께서는 문재(文才)가 뛰어나셨고 좋은 성품도 타고 나셨는가 봅니다.

 

 

북벌을 꿈꾸며 살았던 효종할아버님만이 휘들을 수 있었던 무거운 청룡언월도를 열다섯의 나이에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님이 두 살일 때 어떤 신하가 할아버님께‘효종 임금의 모습을 꼭 닮았으니 이야말로 종묘사직의 끝없는 복입니다’고 하였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아버님께서 삼종의 혈맥을 이으셨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표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문재가 뛰어나셨음에도 겉으로 보이는 효종할아버님의 모양새에 치우쳐 문(文)보다는 무(武)를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가도 싶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열다섯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무려 14년간 할아버님을 대신해 대리청정 하셨습니다. 태조 할아버님께서 이 나라를 세우신 후 아버님만큼 대리청정 기간이 길었던 왕세자가 없는데, 아버님은 그렇게 오랫동안 대리청정을 하였음에도 정작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아!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문무(文武)의 자질을 겸비하신 아버님께서 모반을 꾀했다는 터무니없는 누명에 창창한 목숨을 잃으시다니 . .  아버님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이나 지나서야 영조는 사당을 세울 것을 명하고 이름을 「수은묘 垂恩廟」(역모를 꾀하였지만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당을 지어주는 은혜를 내린다는 ?)라 내리고, 이로부터 두 달이 지난 때 선원전에 참배한 후, 완공된 수은묘에 둘러 몸소 제사(전작례)를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사치스럽게 짓는 것을 보고, 사치를 미워하여 고치라 하였지만 이처럼 너무나 비좁게 짓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하자, 영의정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은 ‘사치스럽게 짓고 싶지 않다는 임금님의 뜻을 존중하였습니다’라고 아룁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홍봉한은 임금의 지시라면 털끝만큼도 자신의 의사를 내세움이 없이 맹종하는 매우 답답하던가 아니면 철저한 보신주의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사위 사당을 건축하는데도 말입니다.

 

〈함춘원 터〉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안 뒤뜰에 수은묘(垂恩廟)가 있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시켰다.

이로부터 1년 후(사도세자가 죽은 후 3년째가 되는 해)에 ‘수은묘에 가서 배알하라’는 명이 내려져서야 세손(훗날 정조)은 사당에 가서 비로소 잔을 올리게 됩니다. 그 이후도 영조의 명이 있어야 수은묘를 다녀올 따름이었고, 어느 해인가는 대사간이 ‘세손이 수은묘에 가서 절할 것’을 아뢰었는데 윤허하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세손이 머무는 창덕궁의 동궁에서 수은묘가 있는 창경궁 함춘원 뒤뜰까지는 이리저리 돌아서 가더라도 500m가 안 되는 거리입니다.

 

집을 지을 때 사당을 먼저 짓는 것이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이고, 4대조 조상을 모시는 것 또한 원칙이라 어느 정도의 넓이를 가져야 함에도 사당을 비좁게 지었으니 사도세자의 무덤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실 겁니다. 역모를 도모해서 죽은 사도세자의 묘를 좋은 터에 자리 잡을 까닭은 전혀 없잖습니까?

 

사도세자의 묘는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 있는데 수은묘(垂恩墓)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릉(陵)’, 그 밖의 국왕의 친족 무덤을 ‘원(園)’이라 부르니까 ‘묘(墓)’자를 붙인 것만 보아도 사도세자의 묘 자리가 어떨지 짐작이 됩니다.

 

세손은 스물세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를 따라가 수은묘(垂恩墓)에 술잔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는 감개무량함만 가득 찼고, 할아버지가 옆에 계시는 바람에 묘 자리로의 적합함이라든가 슬퍼할 겨를은 없었을 겁니다.
세손이 사당(垂恩廟)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았음을 볼 때, 묘(垂恩墓)에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도 어려운 일인데, 두 번째 성묘하게 된 경위는 가히 획기적입니다.

 

83세에 이른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는데, 세손은 수은묘(垂恩廟)에 쫓아온 대신들 앞에서 설움에 북받쳐 울고불고 난 다음 승정원일기에 들어있는 임오화변 관련 기록을 세초해 달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내용인즉슨 임오년의 처분은 종사를 위하여 할아버님께서 마지못하신 일인지 알고 있는데, 자식으로서 슬픔이 북받쳐 그 세세한 내용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으니, 아버지에 관한 일부 사료(승정원일기)의 초고를 없애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임오화변 기록을 그대로 두거나 안 두고는 전하께서 처분하실 일이고, 신이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세자 자리를 겸손하게 사양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손의 무리수를 두는 강수에 영조는 이를 윤허하여 승정원 기록담당 한 명과 세검정에 가서 세초할 것을 명하면서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이인좌의 난”때 처벌받지 않은 놈으로 보아 엄히 다스릴 것’이라 함과 더불어 ‘내일 아침 세손이 수은묘(垂恩墓)에 가서 제사지내고 술잔을 올리라’합니다. 이리해서 세손은 제대로 격식을 갖춰 수은묘에 잔을 올리게 됩니다.  

 

영조로서는 임오화변의 기록을 지운다는 것이 ‘자신의 행적을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일’일 수 있어 윤허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죽은 아들에 대한 잘못된 행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으리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었겠지만 자신을 이어 보위에 앉게 될 세손을 보호하며, 손자의 앞에 펼쳐질 험난한 국정 운영을 편케 하려는 배려가 담겨있기에 기쁘게 동의해 줬을 것입니다.
이일이 있은 뒤 한 달 후, 83세의 장수를 누리던 영조임금이 승하함에 따라 세손이 조선의 22대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세손은 이렇게 해서 수은묘(垂恩墓)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데, 수은묘는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을 겁니다. 얼마나 처참했는가는 보위에 오르고 13년이나 지난 뒤에 사도세자의 잘못을 감싸주던 영조의 사위 박명원(사도세자의 누나 화평옹주 남편, 정조의 고모부)이 ‘신은 풍수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마찬가지이므로 사람마다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는 것만을 논하겠습니다. 하나만 있어도 지극히 애통한데 뱀 등이 묘소 가까이에 똬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지극히 존엄한 곳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잔디가 말라죽고, 봉분으로 뒤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줄 청룡이 뚫렸고, 흘러들고 나가는 물이 무덤을 찌르고 위협한다는 등. . . 3년 전 왕세자가 홍역으로, 이어서 의빈 성씨가 산후중독으로 사망하였고, 뒤를 이을 자손이 더디어 지는 것도 이 탓이러니 좋은 자리를 찾아 옮기면 국운이 오래가는 덕을 입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고 지관을 널리 불러 모아 길흉을 물으시어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시고, 성상의 효성을 펴시어 천추만대의 원대한 계책이 되게 하소서’라며 상소한 것을 보더라도 엄청나게 나쁜 자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위에 올라 13년이나 지났음에도 수은묘 자리가 나쁘다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천장을 건의하는 신하는 없었습니다. 묘 자리를 결정한 사람이 다름 아닌 영조임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감히 천장할 것을 건의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조는 신하들과 종친들을 모아놓고 박명원의 상소를 승지에게 읽게 하고 ‘이는 오래 전부터 절실하게 바라던 바다’라면서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립니다. 승지가 읽는 도중에는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어 갑자기 말하기 어려우니 계속 진달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하기도 합니다.
묘 자리가 나쁘다는데, 그래서 후사가 끊어지게 생겼다는데, 그래서 천장을 하겠다는데 어떤 신하가 감히‘아니 되옵니다’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정조는 즉석에서‘내가 전부터 수원 읍내에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자리를 찍어놓았는데, 천장 시기와 산(華山)의 운세 그리고 돌아가신 장헌세자의 명운이 꼭 맞아떨어지니 하늘의 뜻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너희들은 무조건 따르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해서 고모부와 정조가 세운 계획(짜고 치는 천장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배봉산에서 수원부로 천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은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 아들을 죽게 한 영조의 후회에 찬 되돌림, 정조와 생각을 달리하는 많은 노론의 신하들도 아들의 효성스런 마음은 반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아함경에 있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왕족, 사제, 서민들이 서로 시비하는 것은 애욕에 탐착하고 고집하기 때문이다”라는. 그래서 번뇌하고 괴로워하면서 살고 간다는... 

 

  다음은 수원으로 가는 준비과정에 담긴 여러 사람들의 마음씨를 올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