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9월 23일과 24일, 222년 만에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대왕 능행차가 안양시, 군포시, 수원시를 지나 화성시에 소재한 융릉에 이르는 전체 구간에 완전히 재현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TV를 통하여 능행차 일부분을 보셨을 터이고, 그 중간에 숭례문보다 멋진 장안문과 팔달문도 잠깐 동안 보셨을 겁니다.

 

장안문, 팔달문은 5.7Km에 이르는“수원화성”의 성벽에 세워진 50여개의 건축물 중 일부분입니다. “수원화성”을 이미 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지금부터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에 담겨있는 마음을 소개합니다. ‘마음을 소개한다’는 말이 생뚱맞지만 풍경과 건축물은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실제로 보는 깜냥을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도 못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카메라로 찍고 또 실물보다 잘 나온 사진이라도 실제로 보는 것을 당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원화성이 담고 있는 마음을 보여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나 생각한 겁니다.

 

그렇지만 어떤 글이든 글자만 빽빽하게 나열돼있고 사진이 없으면 끝까지 읽을 재미가 없었던 경험에 비추어 몇 장의 사진을 양념으로 무쳐놓겠습니다.

 

 

 

수원화성은 읍성입니다. 우리나라 읍성은 조선왕조 마지막인 1910년까지 남아있다가 일제강점기 「읍성철거령」이 내리면서 헐려버리고 지금은 해미읍성, 낙안읍성 등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읍성과 수원화성이 다른 점은 수원화성은 정조가 왕좌에서 은퇴를 한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수원화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 22대 정조임금은 아버지(사도세자, 후에 장헌세자, 더 뒤에 장조로 추존)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것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한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없었더라면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죄책감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왕위에 오른 정조의 큰 과제는 아버지가 뒤집어쓴 억울한 죄를 풀어 주는 것과 복위였습니다. 그렇지만 왕위에 올랐어도 ‘사도세자의 일을 일체 논하지 말라’며 자기와 대신들에게 내린 “금등지사”와 ‘아버지를 추승하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차마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유언을 어기지 않고 아버지를 복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아들(훗날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아 자신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그 과제를 아들에게 떠넘기는 계책을 꾀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왕좌를 양위한 다음에는 한양에 머물지 않고, 아버지가 묻힌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려 한 것이고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곁에서 살고자 한 마음은 자극한 효심이고, 정조의 효심과 얽힌 이야기는 다음에 펼치겠습니다.

 

 

 

 

수원화성 축성은 요샛말로 하면 국력을 총동원한 신도시건설 프로젝트입니다. 정조는 거대한 사업인 만큼 우의정 채제공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하여 축성 총책임자로 삼았고, 수원유수를 현장 총감독에 임명했습니다. 축성 공사 2년 9개월 동안 석수, 목수, 미장, 기와공 그리고 지금은 알 수 없는 톱장이, 수레장이 등 22개 직종 1,821명의 기술자와 기능공이 동원되었고, 전국 8도에서 70여만 명의 품팔이 노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징발에 의한 부역 제도에서 돈커녕 밥을 싸갖고 다니면서 일하던 백성들은 일한 만큼의 일당을 받을 수 있었으니, 품팔이 노동자들이 물밀 듯이 참여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가뜩이나 당시 상황이 농토를 잃은 떠돌이가 증가하고 연이은 가뭄에 생계가 곤란하였으니 수원화성 축성은 백성들에게는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정조임금이 훌륭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좌의정을 비롯한 예조판서 등 많은 관리들이 백성들의 부역은 당연하다고 주장했지만 정조는 한 명의 백성도 노역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내가 뜻한 바이며, 화성성역이 품을 팔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생계대책이 될 수 있다며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거야 말로 일자리 창출이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축성기간에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축성기간에 기근이 들자 정조는 누차에 걸쳐 공사를 정지시키려 하였고, 신하들은 축성 공사가 재정을 축냄이 없이 진행되고 백성들에게도 무리가 없다며 지속되어야 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나라 전체의 백성이 모두 내 적자(赤子)들인데 농사짓는 것과 기민 먹이는 일 다 놔두고, 나의 성 쌓는 일에 종사하라는 것은 인화(人和)에 맞지 않는다며 어려운 고비가 끝날 때까지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

 

 

 

 

수원화성을 관통하는 하천이 있는데, 이름은 수원천으로 광교산에서 시작되어 화성과 평택을 지나 아산만으로 나가 서해에 이르게 됩니다. 이 하천이 여름 장마 때마다 넘쳐 수원 백성을 근심과 재난에 빠트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합니다. 성(城)을 통과하는 수원천을 깊게 파고, 폭을 넓히며 물줄기를 직선으로 뽑아내는 것이지요. 초가지붕을 바꿀 때에도 고사를 지내던 시절인 만큼, 당연히 공사를 하기에 앞서 토지 신령께 단술과 찰밥으로 폐백을 올리며 다음과 같은 고하는 글을 바칩니다.

 

‘토지 신령께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물이 광교산에서 나오니 띠와 같고 비단과 같은데, 하늘이 장마 비를 내려 넘치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땅의 혈이 되는 곳에 기둥을 세우면 그 혜택이 몇 천 집이 입을 것입니다. 신령께서 잘 인도하여 물이 넘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제문이 얼마나 멋집니까! 짧은 글임에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들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천을 정비하고 난 후에 일곱 개의 수문을 가진 화홍문을 짓습니다. 그리고 화홍문은 세월이 흘러 대한제국이 처음 발행하는 화폐에 디자인되는 영광을 안게 됩니다.

 

 

 

 

1794년 정월에 첫 삽을 뜬 축성공사는 1796년 9월에 완공되니까 2년 9개월이 소요됩니다. 그간 겨울, 봄, 여름, 가을이 세 차례나 지나친 셈인 것이지요. 예전의 겨울은 얼마나 추웠을까요? 무엇을 먹으려 해도 먹을 게 없던 시절입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던 백성들은 하나같이 바짝 여위였을 터이고, 얼굴이나 몸 어디에도 기름기라곤 없었을 겁니다. ‘배고프면 더 춥다’는 말도 들어보셨을 거고요. 입은 옷은 어떠했을까요? 솜을 넣은 저고리나 바지는 양반님들이나 입는 옷이고, 일반백성들은 무명옷을 몇 겹 껴입을 뿐이었습니다. 매서운 바람은 사정없이 얇은 옷을 뚫고 들어왔고, 일군들의 손과 발을 얼게 하였을 겁니다. 그런 참에 임금은 일꾼들에게 털모자를 배급해 주었습니다. ‘초겨울만 되면 시장바닥에 널린 게 털모자인데 그게 뭐 대수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털모자는 관복에 학이나 호랑이 두 마리가 그려진 옷을 입는, 조정회의에 당(堂)위에 올라설 수 있는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나 쓸 수 있었습니다. 큰일을 저지른 겁니다.     일꾼들은 신이 났고, 수원유수는 임금에게 ‘일꾼들이 추위 속에서 일을 하고도 아프지 않은 것은 임금님의 지성 덕분이고 모자 하나가 추위 걱정이 없게 한다’고 장계를 올렸습니다.

 

여름에는 또 어땠을까요? 「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불볕더위가 이 같은데 공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끙끙대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어떻게 밥맛이 달고 잠자리가 편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속이 타는 자의 가슴을 축여 주고 더위 먹은 자의 열을 식혀 주는 데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처방을 연구해 「척서단」을 새로 조제하여 내려 보내니, 기술자와 일꾼 등에게 나누어 주어서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정 또는 반정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도록 하라.’이것 또한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산업화가 이루어진 시대이고, 약을 조제하는 것도 기계화된 시대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한방의학은 한의사가 아픈 사람의 맥을 짚어서 증세를 살핀 다음에 처방을 하고, 환자는 그 약을 집에 와서 약탕기에 다려먹고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 시절에 임금이 손수 더위 먹은 증세를 치료하는 첨단 신약을 연구하여 무려 4천정이나 조제하여 품팔이 노동자에게까지 지급한 것입니다.
    
수원에 살면서 시시때때로 수원화성을 지나치는데, 그때마다 대중적인 포교를 위해 불교의 교리를 쉬운 말로 풀어썼다는 회심곡의 가사를 생각합니다. 중음기간에 심판관이 망자의 혼령에게 ‘헐벗은 이에게 옷을 주어 구난선심 하였느냐? 살아생전에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어 급수공덕 하였느냐?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어 활인공덕 하였느냐?’고 묻는 다지요?

 

성리학을 최우선으로 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행동으로 실천한 정조임금의 마음을 “보살의 자비스런 마음”으로 본다면 잘못일까요? 수원화성에 오시면 그 마음씨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와 성곽을 보실 수 있는 것은 덤입니다. 이번 가을에는 꼭 수원으로 나들이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수원땅으로 향한 정조임금의 마음씨’를 올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