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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업에는 善報가 따르고 악업에는 惡報가 따른다

미디어붓다 | mediabuddha@hanmail.net | 2017-08-31 (목) 16:17

'업보,란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필연적 반응


 


 

 

 3.  중도설(中道說)
 
불교는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인도 정통파 사상의 아트만을 부정하는 무아설이라든가, 형이상학적인
희론을 부정하는 무기설들은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1)무아설을 살펴보면 “일체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권10) 무아라고 하지만 현재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혹을 일으켰던 찬타 비구에게 다음과 같이
해답이 베풀어지고 있다.
 
 “세간의 집(集)(발생)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고,세간의 멸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여래는 그 두 끝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잡아함 권10>고 한 다음 곧
십이연기설이 설해지고 있다.
 
세간(loka)이라는 말은 세계나 일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무아설의 아(我)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러한 세간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연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실재성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에서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세간의 멸을 여실히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
는 말은 이 뜻을 가리키고 있다.
 
불교 무아설의 최승(最勝)한 뜻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2) 형이상학적 희론의 조직적인 제시는 십사무기설이다.
다음과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이다.
 
세상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상이며 무상인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세계는 유한(有限)한가 무한(無限)한가,
유한이며 무한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닌가? 여래는 사후에 유인가,
무인가, 유이며 무인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답변을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
무기(無記)는 해답이 없다는 말이다. 석가모니께서 답변을 삼가신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는 본래 현실 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본적인 입장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이유의 하나로 들 수가 있다. 만동자에게는 “열반과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수행상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에 대해 무지하므로”<잡아함 권34> 그런
희론과 집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한 이유는 십이연기설에서 발견된다. 연기한 것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입장이다.
 
 그와 같이 단(斷)과 상(常)<잡아함 권12>,
일(一) 과 이(異)<잡아함 권12>, 자작(自作)과 타작(他作)<잡아함 권13>등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인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음은 이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문제에 올바른 답변을 한다면.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십이연기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십이연기설의 음미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며, 여러 교리를 하나로 종합 체계화한 것이며,
 독특한 불교적 입장에 대한 최승의 이론이다.
 
부파불교시대(B.C. 3세기 - 1세기)에는 십이연기설이
 삼세양중인과설로 해석되었다.
 
즉, 인간이 과거(무명 행) 현재(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
 미래(생 노사)의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인과를 밝힌 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불교학자들은 그 잘못을 지적하고, 그런 해석은 본래의
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불교학의 큰 성과라고 하겠지만,
십이연기설을 단순히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 연기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제 4 장
 
               수행과 열 반
 
        1. 해와 행
 
우주의 근본 원리 또는 인간의 생사와 같은 문제를
해명해 주는 것을 종교 사상 이라 하고 그에 입각한
실천 행동을 종교 행동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각각 해(解)(이론)와
행(行)(실천)이라고 한다.
 
   1) 종교 사상 : 연기론(생사의 괴로움이 있게 된 근본 원인을 밝혀줌)
   2) 실천 행동 목표 : 무명을 타파한 세계 즉 열반이 있고, 그 방법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명 번뇌를 멸하는 자력(自力)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1) 자력적 수행 : 염불 ․ 발원 ․ 선정 등이 중심이 되고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러 그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해(解)에 못지않게 행(行)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행이 없는 해는 한낱 희론에 불과하다고 경계됨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상응한 실천(行)을 반드시 함께 설해 주고 계신다.
 
그리하여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사념처 ․ 사정단 ․ 사신족 ․
오근 ․ 오력 ․ 칠각지 ․ 팔정도(이상 37조도품)등을 포함한
실천적 교설이 무수하게 설해져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십업설과 사제설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십업설은 세속적인 사회윤리에 관한 대표적인 교설이며,
사제설은 생사 괴로움의 근본적 멸진에 향하는
대표적 수행의 길이기 때문이다.
 
     2. 십업설
 
      1) 업설의 내용
 
 불교의 연기 사상을 소개하는 곳에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작용 ․
 반응이라는 인과관계가 성립함을 보았다.
 불교의 십업설은 바로 이러한 인과율에 입각한
 실천윤리라고 말할 수가 있다.
 
      (1) 업(業)(kasrma) : 작위(作爲), 일을 나타낸다.
      (2) 보(報) : 이숙(異熟) 이라고 번역되고 있듯이
         성숙함을 나타낸다.
 
이 두 술어는 특히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그에 대한
객체의 필연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업과 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 또한 동일성을 띠게 될 것이다.
즉 업인이 선이면 과보도 선, 악이면 과보도 악의 성질을 띠게 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선업에는 즐거운 보(善報)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惡報)가 따른다”고 설한다.
 
어떤 경우에는 “흑업에는 흑보가, 백업에는 백보가,
흑백업에는 흑백보가 따르고, 불흑불백업에는 보가 없다.
”<중아함 권27 達梵行經>
 
불흑불백의 업이란 작용된 것이
아니므로 보가 없다고 할 것은 물론이다.
 
왜 그러냐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만을
업으로 보고 있으므로 “의지가 작용되지 않는 업
(不故作業)은 보를 받지 않는 것이다.”<중아함 권 3 思經>
 
이와 같이 선업에는 즐거운 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가  따른다면 우리의 행동 방향은
마땅히 악을 여의고 선을 행하는 길로 나아가야 하며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은 자신의 선업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먼저 악업을 타파해야 한다.
 
      (1)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업 : 살생 ․ 투도 ․ 사음
      (2)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 : 망어 ․ 양설 ․ 악구 ․ 기어
      (3) 의지로 짓는 세 가지 악업 : 탐욕 ․ 진에 ․ 치암.
 
십악업의 부정은 곧 십선업이 될 것이다.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과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과
의지로 짓는 세 가지 업 가운데서, 근본이 되는 것은
의지로 짓는 삼업이다. 업은 본래 의지에서 발생하여
언어 또는 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의업을 사업(思業)이라 하고 구업, 신업을
사이업(思已業)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의업이
근본이 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윤리를 엿볼 수가 있으며
윤리학에서는 선악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된다.
 
불교의 업설에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업에는 반드시 보가 따른다는 것이므로
사회적 책임이 또한 깊이 의식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업설의 합리적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의 현상
   (1) 유신론자 ; 신의 뜻에 의함
   (2) 운명론자 : 운명에 의함
   (3) 우연론자 : 우연히
 
이런 견해에 의하면 이 세계에 일어나는 현상에는 인간의 업인에 의한 것과 그렇지 않은

원인(신 ․ 운명 ․ 우연)에 의한 것과의 두 가지 현상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인간이 한 일이며 해야
할 일인가가 모호하게 되어버린다.
 
이런 문제성에서 모든 현상이 신이나 운명, 우연 등이
원인에서 온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나 욕심, 노력 등이 있는,
또는 있어야 할 이유가 수긍할 만하게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중아함 권3 도경>
 
냉철한 현실관찰과 합리적인 사유를 중요시하는
 불교에서는 그러한 현상도 업보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일체 존재(현상)는 십이처에 들어가고,
그 이외의 경계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경우 불교의 업설은 삼세업보설로 전개된다.
 
문제의 현상을 분석해 보면,
 
      (1) 현재 업인이 있는데 과보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
          과보가 현세의 이후에 즉 내세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2) 과보가 있는데 업인이 현재 발견되지 않을 경우 :
          현세의 이전에 즉 숙세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말씀하시길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에 받을 때도 있다.”<중아함 권3 사경>
 
불교의 업설은 삼세업보설로 전개되므로,
사후 내세에 가서 받을 업보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교의 육도 윤회설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육도의 도(道)(gsti)는 '취(聚)'번역되는데,
‘가는 곳’을 가리킨다.
 
천 ․ 인 ․ 수라 ․ 아귀 ․ 축생 ․ 지옥의 여섯 가지를  
육도라고  아수라를 빼고 오취를 헤아릴 경우도 있다.
 
* 선취 : 천 ․ 인간 ․ 수라   * 악취 : 아귀 ․ 축생 ․ 지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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