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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인생도 숙성돼가는 보이차 여정처럼

하도겸 | dogyeom.ha@gmail.com | 2017-04-11 (화) 15:20

[하도겸의 여의봉] 13 간 봤다고 화내는 사람

 

 

보이차의 나이

보이차라는 게 있습니다. 운남성에서 자라난 차로 이젠 웬만한 사람들은 아는 이름입니다. 이 보이차가 20년 정도 홍콩이나 대만 등지에서 잘 익으면 참으로 맛이 신기할 정도로 변합니다. 고춧가루를 뿌린 것도 아닌데 매워지기도 하고 설탕을 탄 것도 아닌데 달달해지기도 합니다.

 

사시사철 계절이 바뀌면 이 보이차가 맛도 달라집니다. 마치 동물이 털갈이를 하듯이, 차 맛이 많이 달라집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숙성되어 가는 보이차의 여름나기와 겨우살이는 이렇듯 아름답습니다. 60년을 정점으로 100년까지 맛있는 보이차의 여정은 우리네 인생과 같아 보다 신기할 따름입니다. 차가 사람인가 봅니다.

 


보이차의 가격

25년, 아니 30년을 넘긴 보이차가 졸부 아들도 아니면서 비싸도 너무 비쌉니다. 그래도 맛도 좋고 효능도 좋으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사서 손자에게 전하는 차인가 봅니다. 30년 전에 할아버지가 싸게 구해놨다가 손자가 자랄 즈음 비싸져도 아무 걱정 없이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격이 비싸지만 어렵게 나누어 받은 몇 그램 안 되는 노차는 몇 번 나눠먹는 것보다는 역시 통 크게 먹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뜯어서 자사차호에 통째로 넣어 한 번에 다 우려 마시는 게 역시 최고입니다. 할아버지가 생각한 “오래된 미래”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차 한 잔의 여유

차 한 잔 마시자고 했더니, 다음에 보자고 합니다. 또 한두 번 연락했더니, 답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생에서는 굳이 안 보기로 했습니다. 다음 생에서라도 언젠가 볼 테면 보겠지 말입니다. 차 한 잔의 여유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사진=하도겸






강사가 듣더니

“강사가 너무 말만 많이 해서 힘들었다”고 한 도반이 전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힘든 게 아니라 잘 몰라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강사가 갑자기 강의를 많이 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밤새 공부하고 준비도 많이 했나 봅니다. 학생들이 알아듣기 좋게 하기 위해 말입니다.

 

 

간 봤다고 화내는 사람

물에 빠진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배신의 계절을 사는 우리는 참으로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배은망덕할 지 말입니다. 무주상보시라고 해서 아무런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구하면 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냥 구해만 주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으려면 기대해봤자 소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물에서 빼내고 다 추스른 다음에 그 사람에게 당신이 가지고 있던 가방은 빼다가 놓쳐서 사라졌다고 해 봅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더러 찾아내라거나 화낼 수 있다는 걸 알면 미리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나중에 그냥 해 본 말인 줄 알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느니, 간 봤다고 또 화낼 사람입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측은지심으로 모든 생명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건져야 할 대상이 양이 아니라 독사라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늘 이런 문제가 있기에 우리네 인생은 고통스럽지만 흥미롭습니다.

 

 

아름다운 승려?

마음은 안 닦고 이름만 닦는 승려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있고 달라이라마나 큰스님의 시봉도 있습니다. 하는 일이 권승들과 많이 다르니 무척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허망한 일입니다.


이들은 불교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모른 척을 합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우리 불교계의 진정한 적폐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책이나 언론플레이 통해 ‘아름다운 승려’가 된 이들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혹 권승을 꿈꾸는 사람들은 아닐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질문의 뜻

아는 분이 전화가 와서 묻습니다. “오늘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시간되니?”라고요. 수첩을 찾아보려다가 문뜩 스쳐지나가는 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바로 “언제든지 부르면 가겠습니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답을 들은 그 분이 씩 웃으면 언제든지 시간 내서 잠깐 사무실로 들르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언제 시간나니?”라는 질문은 언제든지 좋다는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근데 그걸 왜 지금까지 몰랐던 것인지 의아스럽습니다. 아니, 지금은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금합니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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