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urubella@naver.com 2009-12-11 (금) 11:08한국의 불자들은 대만의 고승이라고 하면 으레 불광산사의 성운대사를 떠올린다. 성운대사는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졌고, 큰 존경을 받는 스님이시다. 그러나 대만의 고승이 성운스님만 계신 것은 아니다. 그에 버금가는 고승들이 계시고, 또 계셨다.
성엄(聖嚴)선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만에서는 성운, 유각 선사와 더불어 대만의 3대 고승으로 칭송받는 분이다. 그는 올(2009년) 2월 3일 대만 법고산에서 입적했다.
우리에겐 아직 생소한 성엄선사는 어떤 분일까.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크게보기성엄선사는 중국 강소성의 시골에서 태어나 13세에 출가했다.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가 10여 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1960년 승가로 복귀한 후 약 6년간 폐관(閉關) 수행을 했고, 1969년부터 1975년까지 일본에 유학하여 불교학을 연구하면서 선 수행에도 참여했다. 1977년 동초선사로부터 중국 조동종 법맥을, 1978년에는 영원선사로부터 임제종 법맥을 이었다. 이후 수십 년간 미국과 대만을 오가며 다방면으로 불법의 홍포에 힘쓰다가 올해 초 입적에 들었다. 미국과 대만 등지에서 많은 선칠(禪七), 즉 ‘7일간의 참선 공부를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관찰, 아집을 제거하고 식(識) 지혜로 변환시킴으로써 사람마다 가진 청정한 불심을 현전(現前)하게 하는 수행법’을 주재했고, 대만 북부에 법고산을 창건했으며(2005년 개산), 대소 100여 권에 이르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미권과 동남아시아에서는 30여 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저명한 선사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야 비로소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엄선사에게 공부를 했거나 그분의 행적을 아는 이들은 성엄선사야말로 대만의 최고 고승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 성엄 선사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발간됐다. 책의 이름은 『지혜의 검劍』이다, 성엄선사의 ‘증도가’와 ‘반야심경’ 강해(講解)집이다.
성엄 스님 문하에서 공부를 한 내공 깊은 이가 운영하는 출판사 ‘탐구사’에서 책을 펴냈다. 옮긴이는 라마나 마하르쉬와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관련 서적을 줄곧 번역했고, 중국 허운선사의 ‘참선요지’와 ‘방편개시’, 감산대사의 ‘감산자전’을 우리말로 옮긴 대성(大晟)이라는 이다.
여기서 옮긴이의 글을 잠깐 살펴보자.
“남방불교를 전파하는 일부 논자는 선불교의 핵심개념을 힌두 사상의 아류로 묘사하여 대중을 오도하면서, 선을 종지(宗旨)로 하는 대승종단 내에서 선불교를 공격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불법의 광대함과 심오함을 헤아리지 못한 채, 남방불교의 좁은 인식틀로 ‘무아’와 ‘연기’만을 불법의 최고로 신봉하는 탓이다. 성엄 선사의 이 강해는 무아와 연기의 법이 남방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선의 가르침은 이것을 당연히 포괄하면서 이보다 더 깊고 멀리 나아간 법문임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증도가’는 육조혜능의 제자인 영가현각 선사의 저술이다. 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과 더불어 깨달음의 깊은 경지를 노래하는 선종의 가장 대표적인 시게(詩偈)로 꼽힌다. ‘반야심경’은 각 사찰의 조석예불이나 각종 행사에서 늘 독송되는 경전이며 공사상을 중심으로 한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 집약되어 있는 경전이다. 이 두 경론에 대한 성엄 선사의 해석은 다른 것과 어떻게 다를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단을 잠시 맛보기로 감상해보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배울 것 없고 할 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없애지도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네.
무명의 참된 성품이 곧 불성이고
환의 몸이 곧 법신이라네. <증도가의 첫 부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속을 나아갈 때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을 넘어섰다. <반야심경의 첫 부분>
크게보기기존의 강해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엄선사는 이 두 경론을 강해하면서 텍스트의 자구해석에 매달리지 않고, 텍스트에 내포된 선적인 의미를 끄집어내어 선 수행자들의 실제 수행을 위한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성엄선사의 이 책은 보는 이에 따라서는 하나의 신선한 자극제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불교도 이제는 좀 더 시야를 넓혀 세계 속에서 새롭게 발전해가는 선종의 잠재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옮긴이는 주장한다. 간화선의 위기라는 말이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만연해 있다. 간화선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텍스트의 자구해석이 아닌 거기에 내포된 선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 경론을 강해한 성엄선사의 저술이 주는 의미와 가치는 결코 작지 않은 이유다.
긴 침묵을 깨고 차츰 우리에게 다가오는 대만출신 선지식이 내뿜는 법향, 선향을 이 책을 통해 흠뻑 느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