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발초참현

잊힌 여인의 한(恨), 참회의 탑 세워 달래다

이학종 기자 | urubella@naver.com | 2017-02-17 (금) 16:00

[이학종 기자 인도성지순례기] 5- ‘불교미술의 종합센터’ 산치대탑
3세기 경 아쇼타 대왕이 세워…“전 세계에 세워진 모든 탑의 어머니”

 


가히 불교미술의 종합센터라고 불릴만한 산치대탑의 위용. 

아쇼카 대왕이 인도를 통일하기 이전, 젊은 시절이었을 때 비디샤(Vidisha, 산치에서 북동쪽 8킬로미터 지점) 마을에 살던 여인 데비(Devi)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는 아쇼카 대왕이 웃자인(Ujjain)이라는 지방의 태수로 있을 때였다. 웃자인은 인도의 중앙 마드야 프라데쉬 주의 수도 보팔(Bhopal) 인근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아쇼카 대왕은 태수로 있으면서 전쟁을 위해 비디샤에 머물렀는데, 이 지역에 살던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불태운 것이다. 아쇼카 대왕과 데비와의 사이에는 아들과 딸, 두 아이가 잉태되어 있었다.

아쇼카 대왕은 데비에게 훗날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비디샤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왕에 오른 뒤에도 인도를 통일하기 위해 전쟁에 몰두하면서 데비 여인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이가 잊힌 여인이라고 했던가. 데비는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며,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님을 그리워하며 외롭고 슬픈 나날을 보냈다. 두 아이는 아들 마헨드라(Mahendra)와 딸 상가미타(Sanghamitta)였다. 무심한 지아비를 기다리던 데비는 인도의 통일 전쟁이 끝나가고 야쇼카 대왕이 불법에 귀의할 무렵 그가 주고 간 사랑의 신표(信標)를 아들에게 주면서 네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당부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이 찾아오자, 아쇼카 대왕은 무심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한 걸음에 사랑했던 여인 데비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데비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는 슬픔과 미안함을 가누지 못한 채 깊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아버님, 어머님이 묻힌 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스투파를 세워 주십시오. 그러면 어머님께서도 아버님에 대한 원망을 모두 잊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 마헨드라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들의 바람대로 아쇼카 대왕은 사랑하는 여인 데비의 무덤 위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불사리탑을 세웠다. 

 

 

산치대탑 주위에 산재해 있는 스투파와 승원 유적들.

4개의 탑문을 지나 층계를 오르면 탑돌이를 할 수 있도록 탑신에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산치 대탑에 깃들어 있는 전설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니만큼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실제로 데비와 아쇼카 대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마헨드라는 출가해 비구가 되었고 이곳 산치 대탑에 세워진 승원에 한동안 머무르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불법(佛法)을 전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떠났다. 또한 여동생 상가미타도 오빠를 따라 출가해 비구니가 되어 스리랑카로 건너갔다

 

스리랑카에서도 마헨드라가 스리랑카에 불법을 전하기 위해 오는 이야기가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으니, 이렇다.

 

“보름날 마헨드라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산치의 공중으로 솟아올라, 황금거위가 하늘을 날듯이 유유히 날아 스리랑카에 있는 마힌타레(Mahintale) 산의 정상에 내려앉았다.”

 

스리랑카에 불법이 전해지는 역사적 사건이었으니,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마헨드라가 아쇼카 대왕의 아들이라는 점, 비구가 된 마헨드라가 산치의 승원에 머물렀다는 점, 아버지 아쇼카 대왕의 명령에 따라 스리랑카로 갔다는 점이다.


실제로 아쇼카 대왕은 인도 전역에 84,000개의 스투파를 건립하고 난 후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 파트나, 화씨성)에서 정법 수호를 위한 제3차 경전결집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북서인도의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는 요나, 히말라야 지방과 마히샤릿타, 바나바사, 아파란타카, 마하랏타, 스반나부미, 스리랑카 등 9개 지방에 포교사를 파견했다. 이 때 스리랑카로 파견된 사람으로는 ‘마헨트라 및 4명’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스리랑카에도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B.C. 200~210년 경 데바낭피야 팃사 왕의 통치 기간 중 마헨드라 장로에 의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현재 스리랑카의 마힌타레 산에는 마헨드라 장로가 머물렀다는 동굴과 마헨드라의 여동생 비구니 상가미타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옮겨와 심은 보리수가 아누라다푸라에 현존해 있다.”

 

이 이야기는 아쇼카 대왕과 데비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가 출가 승려가 되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주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쇼카 대왕이 데비와의 사이에 두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아들이 찾아올 때까지 몰랐던 것으로 볼 때, 두 남매는 아마도 쌍둥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인도 중부지역에 위치한 산치는 인도 남방 불교포교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누라다푸라 스리마하보디 사원에 심어져 있는 보리수는 스리랑카에서는 국가적 보물로 여기는 성수(聖樹)로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참배 인파가 그치지 않는 곳이다. 이 보리수는 부처님이 성도하신 부다가야의 보리수의 가지를 상가미타가 이식한 것으로, 부처님 성도를 지켜본 보리수의 2세가 된다. 훗날 부다가야에 화재가 발생해 보리수가 소실되었는데, 이 때 비구니 상가미타에 의해 스리랑카에 옮겨진 보리수의 2세의 가지가 다시 부다가야로 옮겨졌다. 인도의 부처님 성도지 부다가야의 보리수의 가지가 스리랑카로 옮겨졌다가, 스리랑카의 보리수 가지가 다시 부다가야로 옮겨져 자라는 인연이 참으로 아름답다. 

 

불두가 파괴된 석불좌장.

이 탑을 세운 아쇼카 대왕의 석주. 파괴되어 경내 한쪽에 보관되어 있다.  

아쇼카 대왕이 참회의 뜻으로 세운 산치탑에서 108참회 기도를 하는 불자들.

아쇼카와 데비의 사랑이 깃든, 그리고 데비를 잊었던 것에 대한 아쇼카의 참회가 깃든 산치 대탑은 보팔에서 약 7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해 있다. 버스로 한 시간 반쯤 달려가니 이윽고 산치대탑에 다다른다. 말로만 듣던 산치대탑. 불교미술의 종합센터로 알려진 곳. 불교의 우주관과 세계관 표현했다는 ‘산치대탑’을 곧 친견하게 된다니, 가슴이 콩콩거린다.

 

아! 산치. 사진에서만 보던 이 대탑이 산치의 언덕길을 걸어 오르는 거리에 비례해 조금씩 웅자(雄姿)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한참을 걸어 오르니 눈을 부시게 할 만큼 아름다운 대탑이 나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불교미술사에서 스투파(탑)의 규준(規準, 규범이 되는 표준)으로 정의된 탑, 그러니까 지금까지 전해져 온 전 세계 모든 탑의 양식이 이 탑을 기본으로 조성된 것이니, 이 얼마나 대단한 불적인가.

 

다 알다시피 아쇼카 대왕은 인도를 통일한 후 불교에 귀의해 법(法, 담마)에 의한 통치를 시작했다. 이 일환으로 아쇼카 대왕은 인도 전역에 84,000개의 불탑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알다시피 이 엄청난 불사와 인도 주변으로의 전법을 계기로 불교는 인도는 세계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아쇼카 대왕의 불탑조성에서 보듯이 고대 인도의 불교문화는 불탑 신앙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현재는 대부분의 탑들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다행히 산치대탑이 예전 흥왕했던 인도불교 불탑 문화의 모습을 원형에 가깝게 보여주고 있다. 산치대탑은 기원전 3세기 경 아쇼카 대왕이 세운 그 많은 스투파 가운데 남아 있지 않은 몇 기 중의 하나이자, 가장 대표적인 탑이니 그 가치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산치 제2탑. 사리푸트라와  목갈라야나의 사리가 발굴되었다.

산치대탑 인근에 있는 한 승원터에 모셔진 불상의 모습. 화려한 광배가 인상적이다.

현재 산치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탑(제1탑)을 포함해 3기의 스투파가 남아 있다. 스님들이 수행하던 40여개의 승원터, 사당 등이 주위에 산재해 있어 이곳이 대가람이었음을 알게 한다. 산치의 유적은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되어 12세기까지 약 1,500년 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불교인들의 수행 생활의 공간으로 활용됐다.​

 

산치에는 본래 8기의 스투파가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3기가 남아 있는데, 발굴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붙였다. 제1탑은 규모가 가장 커 통상 ‘산치대탑’이라고도 부른다.

 

잘 복원된 산치의 제1탑은 높이가 16.4m이며, 직경이 36.5m에 달하는 거대한 불탑이다. 주변에서 생산되는 적사암의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사용한 전탑양식이다. 아쇼카 대왕이 처음 조성할 당시에는 지금보다는 규모가 작았는데, 훗날 슝가 왕조 시대에 탑 외부를 돌로 덮어 확장하면서 지금의 웅장한 모습이 되었다.

 

산치대탑 역시 인도에서 불교가 쇠망하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1818년 영국의 기병대 테일러(Taylor)장군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그러나 비전문가들에 의해 마구잡이식으로 발굴되어 수많은 산치의 유물들이 큰 손상을 입었다.

 

1881년이 되어서야 코레(Najor Cole)에 의하여 불탑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는 초목을 제거하고 붕괴된 대탑을 보수했다. 그러나 아직도 조형물들의 상당수가 여전히 방치상태에 있다. 영국인들에 의해 발굴조사라는 명목으로 심하게 훼손 된 것을 1912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의 고고학자 존 마샬(John Marshall) 경에 의해 현재의 형태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며,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박물관도 그 때 함께 지어졌다.

 

산치탑의 외형적 구조는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을 상징하고 있다. 즉 지대(地大)·수대(水大)·화대(火大)·풍대(風大)·공대(空大)의 5대(五大)를 구체화시켰다. 지대는 굳고 단단한 것으로 만물을 실을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수대는 만물을 포용하는 바탕이 되고, 화대는 따뜻한 것으로 만물을 성숙케 하며, 풍대는 활동력을 가져 만물을 성장케 하는 바탕이 된다. 이러한 오대 중 지대는 사각형으로, 수대는 원형으로, 화대는 삼각형으로, 풍대는 반월형으로, 공대는 보주형(寶珠形)으로 표현했는데, 산치탑의 경우 원형기단의 메디(medhi), 반구형 돔인 안다(anda), 안다 위의 발코니인 하르미카(harmika), 안다 가운데 기둥인 야슈티(yasti)와 야수티에 여러 겹으로 된 차트라(chattravali, 스투파 상부에 올려진 원형의 구조물로 하나하나가 천계의 세계를 상징)가 있다. 차트라 위에는 칼라사(kalasa, 원래 의미는 비를 담는 물병, 즉 생명의 용기라는 뜻으로 스투파에서 야슈티의 제일 정상에 놓이는 호리병 모양의 구조물인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탑에서는 보주와 용차의 이중 구조로 나타난다)가 있다.

 

이처럼 처음 조성할 때는 원형 기단의 모습 이였으나, 후에 ‘난순(欄楯:vedika_)’이라는 이름의, 탑신을 둘러싸고 신성한 곳을 상징하고 보호하는 의미의 울타리가 조성되었다. 이 난순에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4개의 토로나(torana)라는 탑문이 세워졌다. 각각의 문에는 부처님 생애, 아쇼카 대왕의 행적에 관한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 있다.

 

동문.

북문

서문.


남문.

동쪽 문에는 횡량(橫梁)에 부처님이 성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부처님은 마부 없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횡량에는 부다가야를 방문하는 아쇼카 대왕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기둥에는 마야왕비가 부처님을 잉태했을 때 꾸었다는 태몽의 장면과 부처님이 열반에 드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부처님께서 강물 위를 걸어서 건너는 기적 등이 묘사되어 있다. 횡량 하단에는 아름다운 야크시(yakshi)상이 장식되어 있다. 나무의 신, 산의 신, 토지의 신, 또는 가정의 수호신으로까지 불리는 약시 여성상은 산치대탑에서는 지모신(地母神)으로서 토지의 수호신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이 약시상이 점차 변해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에서는 야차(夜叉)라고 불리는 악귀로 변했으며, 스리랑카에서는 사람을 홀리는 해로운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서문은 배가 튀어나온 난쟁이들에 의해 지탱을 받고 있으며, 한쪽 기둥의 뒷면에는 부처님이 세 눈을 지닌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 마라(Mara)의 유혹을 물리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악마들은 도망을 치고 있는 반면에 천사들은 부처님의 저항을 보고 성원하고 있다. 이 서문의 횡량 상단 정면에는 과거 7불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불상(無佛像) 시대이므로 부처님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으므로 세 번은 불탑의 모습으로 네 번은 보리수나무의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우측 기둥 야크시상 아래 원숭이 왕으로서의 부처님 전생담,  초전법륜도, 일곱 개의 상아를 가진 코끼리가 상아를 사냥꾼에게 나눠주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남문에는 안드라 왕조 초기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 산치대탑이 마우리야 왕조부터 슝가 왕조, 그리고 안드라 왕조시대에 걸쳐 점차 확장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남문은 산치의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으며, 붓다의 탄생 이야기와 불자로서의 아쇼카왕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문기둥에 수자타 여인이 부처님께 우유죽을 공양하는 모습, 라마그리마 스투파를 해체하려는 아쇼카 대왕을 용왕이 나타나 막아서는 모습, 부처님의 탄생장면 등이 표현되어 있다.

 

북문은 네 개의 문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지만,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는 법륜(法輪)이 깨져 있다. 북문에는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는데, 원숭이가 꿀 사발을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부처님은 보리수로 표현되어 있다. 문기둥에 부처님이 마차를 타고 세상을 살피는 사문유관의 모습, 설법을 들으러 기원정사 등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모습, 부처님(보리수로 표현)이 쉬라바스티의 공중을 걷는 이적행 등이 나타나 있다. 

 

제1탑의 경우 4개의 탑문을 지나 층계를 오르면 탑돌이를 할 수 있도록 탑신에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순례단은 탑돌이에 앞서 산치대탑을 향해 108배를 하며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 아쇼카 대왕의 사랑과 참회가 깃든 탑에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탐진치 삼독을 씻어내는 108 배 참회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신심이 솟아났다. 맨 바닥에 방석이나 옷가지를 깔고 목탁 신호에 맞춰 한 배 한 배 절을 올릴 때마다 이마와 등에 송골송골 땀이 솟는다. 마치 3독의 찌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 절을 거듭할수록 마음이 개운해지고 있다. 이 순간, 대탑이 과거의 불적이 아닌 지금 살아 있는 법신으로 다가온다. 아, 이런 조화라니! 이런 환희심이라니! 그래서 10여 년 전 이곳을 찾았던 이호신 화백은 ‘아쇼카 대왕과 데비 여인을 부르는 초혼(招魂)의 붓질로’ 그렇게 산치를 그려냈던 것이구나!

 

108배를 마치고 대탑 탑신부에 조성해놓은 통로로 올라 탑돌이를 시작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저 동방에서 온 불제자들이 산치에서 외치는 석가모니 부처님 명호가 우주를 타고 번지는 듯했다.

 

사실 탑돌이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이다. 여러 경전에도 탑돌이를 하는 이유와 공덕 등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탑을 돌라고 하셨을까? 〈불설시가라월육방예경〉에는 ‘부처님은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므로 탑에 머리 숙여 합장하고, 돌면서 시방에 예배하라’.(〈대정신수대장경〉 1권 251쪽 하단)라고 나와 있다.

 

탑돌이는 부처님께서 재세(在世) 당시에는 부처님이 앉아계시면 제자들이 부처님의 주변을 돌고 합장 예배하는 관례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은 바로 부처님으로 인식되어 탑을 도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나아가 부처님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인 사리불(사리푸트라)의 탑에도 탑돌이를 하였다고 전한다.

 

​〈대방편불보은경〉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십대제자인 지혜제일 사리불이 열반에 들자 대중들은 그의 사리를 거두어 탑을 조성하고 공양하였다. 이때 수많은 대중들이 탑을 돌며 사리불(사리푸트라)을 생각하면서 그리움과 아쉬움을 잊었다.

 

이처럼 고대 인도불교에서는 부처님의 탑을 도는 것이 일반화된 신앙의 주요한 형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요불탑공덕경〉에는 “탑돌이를 하면, 세세생생 팔난이 없어지고, 복과 수명이 길어지며, 거동과 용모가 단정해지며, 재물과 보배가 항상 가득하고, 다음 생에는 천상에 나게 되고, 항상 4념처와 4정근과 4여의와 4신족과 4진제가 있게 되며, 5근, 10력, 7각지분과 8정도와 6신통을 얻게 된다(〈대정신수대장경〉 16권 801쪽 중단)”고 나와 있다.

 

최고의 불탑, 산치대탑을 친견하고 108배 참회기도로 업장도 소멸하고, 탑돌이의 공덕까지 얻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으랴. 마침 햇볕도 양명해 업장까지 소멸한 순례단의 일행들의 표정들이 더 더욱 해맑게 피어나고 있다.

 

제3탑 옆에 세워진 스리랑카 양식의 사원. 이 곳에 사리푸트라와 목갈라야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대탑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제2탑은 시간이 촉박해 먼발치에서 내다보며 합장삼배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제3탑으로 향했다. 대탑에서 북동쪽으로 45미터 거리에 위치한 제3탑은 직경 10미터, 높이 6미터 정도의 비교적 작은 규모로 기원전 2세기 경에 건립되었다. 산치대탑의 축소형처럼 느껴지는 제3탑은 1851년 커닝햄이 발굴조사를 했는데, 이 탑에서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푸트라(사리불)와 목갈라야나(목건련)의 이름이 새겨진 돌로 만든 2개의 사리용기가 출토되어, 부처님의 두 상수제자 사리탑임이 확인됐다. 두 존자의 사리는 영국 빅토리아 박물관 및 알베르트 박물관에 보존되었다가 2차 대전이 끝난 후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 동남아 불교국가에 나뉘어 보존되었으나, 1952년 스리랑카 정부가 제3탑 옆에 스리랑카 양식의 사원을 건립하면서 다시 이곳 산치로 돌아왔다. 

 

산치대탑은 비교적 잘 보존이 되었지만, 주변의 승원이나 작은 스투파 등은 훼손된 채 남아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대탑의 남문 앞에 서 있는 부러진 아쇼카 석주와 그 앞 공간에 무너진 석주를 대충 쌓아 놓은 모습은 불교가 쇠망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부러진 아쇼카 석주에는 브라흐미 문자로 쓰인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이 ‘승단 내 분열을 야기하는 승려에 대한 경고문’이어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계속>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전   다음
Comments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