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경 박사 특별기고] 우리 차계(茶界) 실상 일우 선생께 듣다

‘1960년대 초부터 근 50여년’ 동안 차문화 운동과 함께 한 산 역사

일우 선생의 거처 ‘일우재’에서 
김명배 선생보다 8년 먼저 번역해 출판한
최순자 선생의 <조선의 차와 선> 초판을 발굴

일우 선생(一羽 鄭學來, 1930~ 庚午生). 그가 섭렵한 다서(茶書)들을 보면 굉장하다. 현재까지 발간된 모든 다서를 소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 다서마다의 특징과 차별성을 개인적으로 정리하고자 시도했다는 노력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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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다경’에서부터 일본의 다서들까지 고전을 비롯해서 출판 되는대로 신간까지 전부 사서 분석하고 정리했다. 일본에서 다도를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는 대표적으로 4곳을 들 수 있는데, 하나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면 비교분석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때 좌익으로 몰려서 공부할 수 없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차 책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다며 그는 과거의 시간 속을 천천히 걷는다.

그런데 70년 만에 경기 일대 집중 홍수로 고양에 큰 물난리가 났다. 그때 많은 책들과 고서들을 잃는 아픔이 있었다. 당시에 잃었던 책이 너무 아쉬워 스스로 목록을 적어보기도 하였다. 책 중간 중간에 당신의 견해로 분석한 차이들을 세세히 기록한 흔적들도 역력하다. 그런 기록들이 수마에 휩쓸려가 매우 안타깝다고 술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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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우선생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

일우선생은 동향인 우록 김봉호 선생(友鹿 金鳳皓, 1923~2003)과 차문화 운동을 하면서 만났다. 계기는 <초의선집>이었다. 고향에서 우록 선생이 의장과 예총회장, 해남신문 대표이사를 하고 있을 때도 여러 차례 왕래가 있었다. 문화 행사 등 논의할 일이 많아 만남이 잦아졌다. 당시 우록 선생은 고문헌 번역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고문을 완벽하게 번역할 의욕으로 해남의 한문학자 창강 김두만(蒼岡 金斗萬, 1909~2001) 선생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당시 <초의선집> 원본을 일우의 형(鄭在薰, 1924~2002)이 가지고 있었다. 일우선생의 아버지(鄭世勳, 1885~1945)는 해방되던 해 돌아가셨다. 아버지 대부터 소장하고 있었던 <초의선집>을 형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형은 골동을 무척 좋아했다. 서화랄지 소치의 아들 미산의 그림도 여러 점 소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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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집 상하 권

그런 서화 중에 <초의선집>으로 발간된 모본이 <초의집 上下>이다. 해남 인사들의 ‘해남차인회’ 결성은 차계의 여러 가지 업적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초의선집> 발간이 그 대표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의 본향 해남에는 차문화 복원과 부흥에 열정을 가진 우록 김봉호 선생이 있었고, 그의 도반인 행촌 김제현(杏村 金濟炫, 1926~2000)원장이 있었으며 자료의 검증이 가능한 응송스님(應松 暎熙, 1892~1990)이 건강하게 생존해 있었고, 그 자료의 완벽한 번역이 가능한 창강 김두만(倉岡 金斗萬, 1909~2001) 선생이 있었다. 이들로 인해 이런 일들이 가능했다.

<초의선집>의 발간으로 해남차인회는 차문화의 보급과 확산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어지는 일지암 복원까지 차문화계의 대서사시라 할만하다. 해남의 차인들은 우선 일지암을 복원하여 차인들의 성지로 만드는 것을 추진했다. 해남차인회의 활발한 활동은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다. 전국의 차인들이 해남으로, 대둔사로 모였고 여기서 전국적인 모임이 태동했다. 전국차인연합회의 결성도 이로 인하여 잉태된 것이다. 서울에도 차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동안의 왜색시비나 우여곡절은 과도기의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차인들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차문화운동’을 ‘정신개혁운동’으로 격상시켜 펴 나가기로 했다.

<초의선집>의 발간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한학자 김두만 선생이 일우의 형 댁에 있는 <초의선집>에 관심을 보이며 빌려 주기를 청했다. 이후 작업은 사진작업과 출판을 위한 과정 중에서 원본이 돌려졌다. 그 원본을 일우의 형이 차문화에 많은 활동과 깊은 인연이 있는 동생에게 주어 현재는 일우가 소장하고 있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을 시집보내야 되겠는데,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건넨다.

2006년 10월 16일 남산소재 하얏트 호텔에서 제11회 ‘명원차 문화대상’ 시상식이 있었다. 명원차 문화대상 시상식은 우리 차문화의 발전과 보급에 헌신한 인물에게 보은(報恩)하는 자리였다. 또한, 우리 차 문화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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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원’은 쌍용그룹 창업자인 성곡 김성곤(省谷 金成坤, 1913~1975)의 부인인 故 김미희(茗園 金美熙, 1920~1981)여사의 호이다. 명원은 1979년 다도의 메카인 대흥사 일지암을 복원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한국차인회’를 창설하는 등 우록 김봉호 선생과 함께 우리나라 차문화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명원차문화재단은 김미희 여사의 딸인 김의정(金宜正) 이사장이 어머니에 이어 2대째 이끌고 있다. 다음은 이날 문화대상을 수상할 당시 일우선생을 소개한 글이다.

“일우는 차문화 발굴과 보급을 위해 고군분투한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다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부부가 함께 다도의 길을 걸었던 참 다도인(茶道人)이다” “차를 통해 우리는 선(禪)의 경지를 깨달을 수 있고, 선의 오묘한 경지를 터득할 수 있으며 삶의 도(道)를 깨칠 수 있다”

일우 선생은 차인으로 차문화 확산 운동을 하면서 적잖이 고생도 했다. 가장 큰 상처라면 이런 와중에 인생의 반려자가 먼저 세상을 떠 몸 반쪽이 잘려 나가는 아픔도 있었다. 차인연합회의 살림을 꾸려오다 혼탁해진 모임에 환멸을 느껴 차문화계를 떠나, 자연인으로 살아온 지 오래됐다. 긴 세월 명상과 수행으로 아물어진 상처가 아직도 아쉽기만 하다는 말끝에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 날 일우는 “오늘의 영광을 어려운 시절 못난 지아비를 따라 즐거이 봉사하다 세상을 떠난 착한 아내 최희윤의 영전에 바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50여 년 동안 다도와 함께 한 일우 선생은 “정신을 맑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녹차는 현대문명이 가져온 불치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명약이 될 수 있다. 귀향해 해남에서 차밭을 일구는 일이 남아 있다”며 80이 넘은 연치에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일우 선생은 고양시의 일우재에서 기거하고 있다. 일우재(一羽齊)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에 있는 그의 당호이다. 차와 명상수련을 하며 살고 있는 곳이다. 자신의 호 일우(一羽)에서 따 왔다고 한다. 일우(一羽)라는 호는 날개라는 뜻인데, 한창 차 문화운동을 하던 시기에 만난 전각의 대가 청사 안강석(晴斯 安光碩, 1917~2004)선생께서 지어주신 호이다. 중국 당나라 때 다경(茶經)을 쓴 육우(陸羽)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우(羽)자를 따 지은 것이다.

“육우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용개사 스님인 적공(積公)대사에 의해 길러졌다고 합니다. 적공대사는 차를 무척 좋아하여 육우가 어렸을 때부터 차 끓이는 법을 가르쳐주었는데 나중에 이것을 편집해 묶은 것이 다학 전문서로 <다경>의 초고가 되었지요. 오늘날 차에 관한 많은 이론들은 이 <다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저도 차 연구가로 한평생을 살고자하는 염원에서 이 호를 받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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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우 선생은 차의 정신을 이렇게 말한다.

“차란 평화스러운 것입니다. 다산, 추사, 초의의 어울림을 보십시오. 당시 신분계층이 엄했던 시절에 차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극대화시켜 주는 매개체로 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지요. 다산은 가톨릭과 실학의 학자요, 추사는 유학자, 초의는 승려인데 한 잔의 차는 이 세 사람의 종교적인 울타리까지 무용지물로 만드는 구심점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차는 처음에 약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 보건음료로서 효과가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차는 사람들이 건전한 삶의 길을 걷는데 있어 가장 소중한, 몸을 튼튼히 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기호음료지요. 뿐만 아니라 차를 끓이고 마시며 대접하는데 있어 따르는 정성과 예의범절 및 청정하고 고요로운 분위기 등에서 각성의 생활을 체득(體得)하게 됩니다. 대흥사의 초의선사(草衣 意恂, 1786∼1866)가 김명희(山泉 金命喜, 1788∼1857)에게 보낸 다시(茶詩)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어요.

‘예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어서라네’(古來聖賢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

이런 의미에서 다도란 차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이지 차 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끓이는 행다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현재 각 지자체들이 차를 테마로 다양한 문화행사들을 펼치고 해남에서도 초의선사 입적일을 전후로 차문화제가 개최되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본인의 견해를 내 놓는다.

“차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많은 연구와 실행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 초까지 한국차인회 상임이사로 일선에 있을 때 우리 차를 보급하기 위해 어깨띠를 메고 거리에 나가기도 하고 사무실을 활성화해 보려고 서화전시회를 열어 기금모금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지자체들이 나서서 행사를 추진해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요.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초창기의 그 때에 비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른 감이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선(禪)과 같다'하여 선다일여(禪茶一如), 혹은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하는데 명예욕으로 행사를 끌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이 기거하는 일우재의 한 쪽 벽에는 살아계실 때 자주 만나 뵙던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遲耘 金隋洙, 1893∼1986) 선생께서 직접 써준 다시(茶詩)가 걸려 있었다.

차 한 잔은 목과 입을 축여주고
두 잔을 마시면 외롭지 않고
석 잔째엔 가슴이 열리고
넉 잔은 가벼운 땀이나 기분이 상쾌해지며
다섯 잔은 정신이 맑아지고
여섯 잔은 신선과 통하며
일곱 잔엔 옆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나온다.

“차인은 모름지기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선의 경지에 있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 어림도 없지요. 이 경지를 생각하며 오늘도 차를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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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조선의 차와 선' 번역본과 일본의 책 원본.

일우 선생의 차문화에 대한 일관된 열정을 조사하면서 또 하나의 책을 발견했다. 1983년에 발간된 <조선의 차와 선>이다. 모름지기 김명배 선생이 번역하여 발간한 책보다 8년이 빠르다. 최순자 선생의 역본이다. 당시 광주민속박물관 관장이었던 최계원(崔啓遠, 1929~1991) 선생이 쓴 ‘우리 차의 재조명’과 발간연도가 같다. 이 책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역자는 서두에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다. 이런 때 우리 고유의 차를 널리 알려 우리 다도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우리 젊은이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생하는 차에 대해 연구해 보려고 해도 참고가 될 만한 책이 없어 지식을 얻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한국차에 대한 숭고성과 우수성 영양관계 등을 알아 자원개발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데도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끝으로 금호문화재단과 한시번역에 힘써주신 최장학씨와 정학래씨 그리고 광주시립 박물관의 최계원 관장님께 감사드린다”는 소감을 남겼다.

이후 김명배 선생의 <조선의 차와 선>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두 책의 번역의 차이는 차후 분석해 볼 일이다. 차문화 연구 논문에서 적잖이 인용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비교 논문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최순자 선생이 <조선의 차와 선>을 번역하게 된 과정도 매우 중요한 현장조사가 될 것이다. 광주의 ‘요차회’, 그리고 차인들의 활약상도 크게 주목할 일이다.

일우 선생의 차문화 지향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벌써 5년 전의 선생님의 모습과는 또 사뭇 다르다. 인터뷰에 적극 응해주신 일우 정학래 선생의 건강을 빈다. 더불어 이글이 연재되는 <미디어붓다>가 불교 관련 매체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은 분들 가운데 정학천 스님의 기억을 갖고 계신 분의 제보를 기다린다. 역사는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학자들의 집념과 노력, 그리고 연구열이 필요한 것이다. 현재까지 필자는 이렇게 분석하지만 정학천 스님의 기록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기록이나 기억의 출현을 바랄 뿐이다.

*일우 정학래 연보

1930년  전남 해남읍 수성리 출생
         해남 동초등학교 졸업
         6년제 해남중학교 2회 졸업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3년 중퇴, 도일
         일본대학교 정경학부 졸업
1966년초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선생을 만나면서 차 세계에 입문
1976년 <법륜>지에 '초의선사의 차' 발표
1979년  식물학자 이덕봉, 박종한, 김미희 등과 함께 한국차인회 창립 주역
1980년  1월 한국차인회 상임이사 부임, 첫 사업으로 일지암 복원추진 등 차문화 보급에 앞장
1980년 <분재 수석>에 '한국의 차를 말한다' 발표
1983년 <정원학회지>에 '한국의 다도' 발표
        <월간 다원> 창간호에 '일본의 차 정신' 등 발표
1990년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에 1000여 평의 자연농원 개발
         귀농 후 대체의학, 자연식 연구, 다도, 요가, 단식, 명상수행 생활
         현재 명원문화재단 고문
2006  제11회 명원차 문화대상 학술상 수상
2009  제18회 초의문화제 초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