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ㆍ기고 >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부채 없이 음식 즐기는 수행자 되시라”

진흙속의연꽃 | | 2016-11-29 (화) 10:36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106- 부처님의 유산상속자라면
“계행이 엉망인자가 시물을 받아먹으면 ‘도둑질한 것을 즐김에 해당”


수행자는 굶지 않는다. 어느 스님이 깊은 산중 토굴에서 정진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촌부가 지게에 쌀을 지고 열심히 올라가고 있었다는 말이 전설적으로 전해 오고 있다. 다만 수행자뿐 만은 아닐 것이다. 공부하는 자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집안에 학생이 있으면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준다. 설령 자신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마을에 세칭 일류대학에 합격한 학생이 출현하면 마을 사람들은 내 자식처럼 돌보아 준다. 학비를 대 주고 거처를 마련해 준다. 누군가 고시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 아낌없는 지원을 해 준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그것은 미래가 기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옛말에 젊은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 별 볼일 없는 젊은 사람이라도 세월이 흘러 나중에 어떻게 성장해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듯이 시골에서 공부 잘한 학생이 판검사가 되어 출세했을 때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공부하는 학생에게 학비를 대주고 거처를 마련해 주는 등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것이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이런 풍습은 수행자라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계행을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는 스님에 대하여 신도들은 아낌없는 지원을 한다. 깊은 산속 토굴에서 용맹 정진하는 스님을 어떻게 알았는지 지게에 쌀 등 먹을 것을 잔뜩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올라가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굶어 죽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수행자 역시 굶어 죽지 않는다. 죽기살기로 공부하고 죽기살기로 수행하는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들이 공부를 마칠 때 까지 수행을 마칠 때 까지 돌보아 주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누군가 도와준다. 수행하는 사람 역시 누군가 도움을 준다. 공부하는 사람, 수행하는 사람은 굶어 죽지 않는다.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긴다
 
수행자는 굶지 않는다. 계행을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는 자에게 먹을 걱정이 없다. 수행자에게 보시하면 커다란 과보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수행자는 부처님의 공덕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Tādisaṃ kammaṃ katvāna
bahuṃ duggatigāminaṃ
Phuṭṭho kammavipākena
anaṇo bhuñjāmi bhojanaṃ.
 
“이와 같이 나쁜 곳으로 이끄는
많은 악업을 짓고
아직 그 업보에 맞닥뜨리지만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긴다.”(Thag.882)
 

 


이 게송은 맛지마니까야 ‘앙굴리말라의 경(M86)’의 게송과 병행한다. 게송에서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긴다.(anaṇo bhuñjāmi bhojanaṃ)”라 했다. 이 말 뜻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네 가지 즐김이 있다. 1) 도둑질 한 것을 즐김, 2) 빚진 것을 즐김, 3) 유산의 즐김, 4) 자기 것을 즐김이다. 번뇌가 부수어진 즐김은 자기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부채가 없는 음식을 즐기는 것은 바로 자기 것을 즐기는 것이다.”(Pps.III.343) 라 되어 있다.
 
수행자는 굶지 않는다고 했다. 일을 하지 않고 직업을 가지지 않는 수행자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을 것 등 누가 보시해도 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심히 정진하지 않는 자나 계행이 엉망인자가 시물을 받아먹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주석에 따르면 ‘도둑질한 것을 즐김(theyyaparibhogo)’에 해당된다. 밥도둑이다. 밥 먹을 자격이 없음에도 밥을 얻어먹는 것은 음식을 도둑질하는 것과 같다.
 
계행을 지키긴 지키되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수용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계행을 지키고 살지만 음식을 받아먹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반조하지 않는다면 ‘빚진 것을 즐김(inaparibhogo)’에 해당된다. 그래서 음식을 대할 때는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라고 대승공양게에서 말하듯이,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반조해 보아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 유산으로 알고
 
음식을 대할 때 유산으로 볼 수도 있다. 왜 유산인가? 그것은 부처님의 은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부처님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먹는 것이다. 출가하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이 제공되는데 이는 부처님의 유산이라 볼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유산을 향유할 수 있는 자는 아라한을 제외한 일곱 부류의 ‘유학’이 이에 해당된다고 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청정도론을 인용하여 “거룩한 님은 제외로 하더라도 계행을 지키는 수행승들은 지방에서 특별한 음식에 대하여 부처님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먹었다.”라 했다. 청정도론을 찾아보니 관련구절은 다음과 같다.
 
 
evaṃ satthu mahattapaccavekkhaṇatā, “saddhammasaṅkhātaṃ me mahādāyajjaṃ gahetabbaṃ, tañca na sakkā kusītena gahetu” nti
 
reviewing the greatness of the heritage thus: “It is the great heritage called the Good Dhamma that is to be acquired by me, and it cannot be acquired by an idler”(냐니몰리역)
 
‘나는 정법인 큰 유산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게으른 자는 받을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유산의 위대함을 반조함.
(청정도론 4장 55절, Vism.1.132,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 따르면 계행을 지키는 자로서 가르침을 실천하여 경지에 오른 성자는 부처님 유산의 상속자라 했다. 따라서 시주가 보시한 음식물에 대하여 부처님 유산으로 알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산의 즐김(dāyajjaparibhogo)’이라 했다.
 
수행자들은 음식 등 시물에 대하여 부처님의 유산으로 보고 수용한다. 그러나 계행이 청정하고 성자의 반열에 들어간 유학에 해당된다. 아직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음식에 대한 수용은 빚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빚진 것을 즐김’ 또는 ‘빚낸 것의 수용’이라 한다. 열심히 정진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만 부처님의 상속자가 되어 음식을 유산으로 여겨 즐기는 것이다.
 
번뇌가 부수어진 무학의 아라한에게 있어서 음식의 주인은 자기인 것이다. 아라한은 모든 오염원이 소멸되어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자기의 것으로서 부채 없이 음식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학의 아라한은 보시한 음식에 대하여 ‘자기 것을 즐김(samiparibhogo)’이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 상속자로서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굶어 죽지 않는다. 한국스님들이 노후를 걱정하여 노후대책용으로 토굴을 장만한다든가 개인 절을 갖고자 하는 것은 수행자의 모습으로서 바람직스럽지 않다. 만약 스님이 굶어죽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국불교의 수치일 것이다. 아마 한국불교의 신도들은 스님이 굶어죽도록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계행이 청정한 스님들은 부처님의 상속자들이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은 스님들은 부처님의 유산을 상속 받았으므로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계행이 청정하지 못한 자는 음식도둑과 같은 것이다. 계행을 지키며 정진하는 스님들은 채무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식 먹는 것에 대하여 빚진 것을 즐기는 것과 같다.
 
자식은 부모를 봉양하며 산다. 때에 따라 용돈을 드리고 먹을 것 등을 전한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부모는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부모가 자식에게 ‘고맙다’거나 ‘감사하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보일까? 아마 매우 어색해 보일 것이다. 부모는 나를 낳아주고 키워 주고 교육시켜 주었기 때문에 시물을 받을 권리가 있고 시물을 즐길 권리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모가 자식에게 받는 음식 등은 부채 없이 즐길만한 것이고 자기의 것이라 볼 수 있다. 수행자도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모든 것이 무료라고 한다. 도이법사의 미얀마수행기에 따르면 “특히 외국인 비쿠와 수행자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독방과 수행처가 마련되어 있고 1주일에 두 번의 수행에 대한 참문인 인터뷰와 한 번의 담마 스터디가 곁들인 문화가 연면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이런 체험을 하는 비용이 전부 무료라는 점입니다.” ([도이법사 수행기 Ⅲ] 2- 미얀마의 변화)라 했다. 비행기 값만 있으면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이다. 가르침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부처님 공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수행자로써 부처님이 남겨 주신 유산을 찾아 먹는 것이다.
 
어느 스님은 보시물을 받을 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스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당연히 받아야 할 보시물에 대하여 ‘감사하다’ 또는 ‘고맙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속에서 거래할 때나 하는 말이다. 스님들은 보시물에 대하여 당당하게 받아야 한다. 그것도 부처님의 상속자로서 받아야 한다. 따라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아직 공부중인 학인이라면 시물에 대하여 채무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가르침을 실천한 스님들은 부처님 상속자로서 부처님 유산으로 생각하고 시물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시주의 음식공양에 대하여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긴다.”라 했을 것이다.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전   다음
Comments
수행은아무나합니까 2016-11-29 17:20:16
답변 삭제  
깨달음을 구하면 안된다나?
왜? 세상이 진리니까.....

이런 전도망상이니.....
호잔 2016-11-30 08:05:06
답변 삭제  
미얀마 승려의 폭력에 대한 앞 댓글을 보고 올리는 글입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승려가 불교 승려인가?>

불자는 ‘불교 승려(출가 불자)인가? 아닌가?’를 그 행위를 보고 판단한다.
불교 승려는 어떤 경우에도 남을 해코지 하거나 폭력을 쓰지 않는다.
남을 해코지 하거나 폭력을 쓰는 자는 불교 승려가 아니라 가짜 승려나 사이비 승려다.

댓글의 내용이 조작되지 않은 진실에 따른 사실이라면 남을 해코지한 그 자나 폭력을 쓴 그 자는 불교 승려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으로 볼 때 불교 승려가 아닌 자를 불교 승려라고 하는 자는 불자가 아니다.
불교 승려가 어떤 자인지 모르는 자를 어찌 불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불교는 비폭력의 종교이며, 불교 승려(출가 불자)는 이를 실천하며 재가 불자의 복밭인 상가(승가)의 일원이고 재가 불자의 모범이 되는 자이다.

댓글로 묘사되는 승려를 불교 승려라고 알고 있는 자는 불자가 아니다.
불교 승려가 어떤 자인지도 모르는 불자는 가짜불자이거나 사이비 불자다.
가짜 불자나 사이비 불자는 불교(붓다의 가르침)를 모르는 자이다.
불교의 비폭력을 모르는 자가 불교나 불교 승려에 대해 하는 말이나 글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불자는 기본적으로 팔정도를 바르게 알고 있는 자이다.
팔정도의 정사유는 감각적 욕망을 여윈 사유(출리의 사유), 성냄(분노)을 여윈 사유 및 해코지 하지 않는 사유이다.
불교 승려는 정사유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남을 해코지 하는 사유(폭력을 쓰는 사유)를 하지 않는다.

불교 승려로서 완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사유 3가지에 어긋나는 사유에 의한 행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남을 해코지 하지 않는 사유에 어긋나는 폭력이 밖으로 드러나는 자는 기본적으로 불교 승려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승복을 입고 폭력을 휘두려는 자는 아무리 자신이 승려라고 해봐야 ‘나는 불교(붓다의 가르침)을 모르며, 불교 승려가 아니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행이다.

이 불교의 비폭력을 모르는 자는 불자(출가불자 또는 재가불자)라고 할 수 없다.
불교 승려의 옷을 입고 머리를 깍았다고 해서 모두 불교 승려는 아니다.
불교 승려의 옷을 입고서 총칼을 들고 전쟁에 참여하는 자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불교 승려가 아니다.

불교 승려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과 불교 승려의 옷을 벗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자는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불교 승려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는 테라와다불교의 계율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테라와다불교에서 비구는 어떤 경우에도 가사가 몸에서 떨어져 있는 상태가 지속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잠잘 때도 가사가 몸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안되고, 목욕을 할 때도 반드시 목욕가사를 입고 목욕을 하여 가사가 몸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불교 승려의 옷을 입고 있는 한, 불자(출가 불자)는 불교 승려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을 하지 않아야 한다.
불교 승려의 옷을 입고 출가 불자로서의 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떻게 출가 불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불교 승려인지 아닌지 그 행을 보고 판단하지 못하고 외모나 옷을 보고 모두 불교 승려라고 하는 자를 어찌 불자(출가 불자 또는 재가 불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댓글로 묘사되는 미얀마의 폭력 승려를 불교 승려라고 우기는 자는 불자(출가 불자 또는 재가 불자)가 아니다.
버마 2016-11-30 15:19:04
삭제  
미얀마 큰스님 사야도들은 왜 가만 있는가?
침묵은 동조다.
샤이 아신 위라투이다.
직시하라 2016-11-30 15:48:46
삭제  
[분석]미얀마 로힝야 인종폭동의 배후에 있는 민주화 단체들

http://cafe.daum.net/khmer-nomad/87jJ/155?q=%B7%CE%C8%FE%BE%DF%20%BB%E7%BE%DF%B5%B5
로힝야족님논평 2016-12-01 00:56:15
답변 삭제  
접수.... 합니다...
사실...
미얀마의 저럼 문제....
태국의 그 문제...
캄보디아 그넘들...
베트남의 영감...
라오스의 하는 짓거리...

이거만 생각하면  남방상좌불교에 대해서 내 할 말이 없어...
논평 2016-12-01 01:03:03
답변 삭제  
공감.. 접수합니다... 좋은 글과 지견을 보여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대로 알겠습니다. 내가 그쪽 현실은 모르는 것이 많아서요

나 다원입니다.
그렇다고 2016-12-01 01:15:35
답변 삭제  
조롱받으라는 말에 토는 못달겠다... 종롱 받을 사람은 받아야지....

근데 생각해보자....
조폭에 그 아들이 여기저기서 주먹질로 사고만치고 비난들을 일만 하고 다닌다면... 그 애비를 비난해도 말 잘못했다 할 사람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 총장 아들이 수능에서 떨어졌다고...
서울대 총장감 아니라고 사표내라고는 안하잖아???
이것이 일반화의 오류잖아?

나 다원이네.
호잔 2016-12-01 08:59:43
답변  
<http://blog.naver.com/hojanyun/220874148037 의 댓글>

앞 댓글에서 로힝야족이 말하기를,
“위에 호잔이라는 작자가 "댓글 조작"을 의심한다, 정말 파렴치하지 아니한가. 구글 검색창에 <미얀마 로힝야족> 혹은 <미얀마 불교, 로힝야족, 수치여사> 등의 검색어를 넣어 구글링 해 보라. ~
~ 이래도 댓글이 조작이라는 것인가.”고 한다.

‘호잔이라는 작자는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는 말인 것 같다.
이런 경우에 깔라마 경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해야 된다고 본다.
자신이 실제로 본 사실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확인한 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실제로 본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조사하고 확인한 후, 행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거나 무조건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로힝야족의 댓글은 의심과 믿음에 대해 잘못 이해되고 적힌 글인 것 같다.

아신 위라투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도 못하고 직접 조사하고 확인하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단정하여 믿거나 단정하여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신 위라투에게도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타당한 이유도 있을 것이며, 타당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 올려진 국제기구의 기사 등을 국제기구가 날조를 할 리 없으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붓다가 말했더라도 그대로 믿지 말고 직접 조사하고 확인하여 탐진치 소멸의 길에 따른 바른 이해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 깔라마경의 취지이다.
무조건 그대로 믿거나 무조건 믿지 않는 것은 탐진치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에게 일어나는 마음도 사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띠상태에서 직접 조사하고 확인하여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사띠하는 자는 누가 자신의 주장 또는 전달에 대해 믿지 않는 말을 한다고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믿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직접 보아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직접 보지 않아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그 사람에게 얽혀 있는 매우 복잡한 원인과 조건 관계의 조합에 따라 결정되어 나타난다.

믿지 않게 되면 그러한 원인과 조건관계로 인하여 믿지 않는 것이고,
믿게 되면 그러한 원인과 조건관계로 인하여 믿는 것이다.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기에 자신과 관련된 갈망을 일으키지 않기에 화를 낼 이유가 없다.
화를 낸다는 것은 갈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갈망하지 않고, 갈망하지 않으므로 화를 내지 않고 단지 자신의 목표와 목적에 따라 적절하게 자신의 행을 할 뿐이다.
갈망의 충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갈망하지 않는 것(갈망의 소멸)을 목표로 하면 조금씩 욕망에서 벗어나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호잔 2016-12-01 09:47:05
답변 삭제  
위 저의 댓글에서,
"단정하여 믿거나 단정하여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를,
"단정하여 믿거나 단정하여 믿지 않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로 정정합니다.
배희정 기자 2016-12-01 09:55:47
답변  
한 분이 본문과 상관 없이 미얀마불교 비방의 목적을 갖고 도배성 댓글로 닉네임을 계속해서 바꾸며 댓글을 달아 해당 댓글을 삭제하고, 해당 아이피를 일시적으로 차단합니다.  더불어 은어, 비속어, 비방 등의 댓글도 삭제합니다.
비밀글

이름 패스워드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