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두 칼럼 ■ <종교평화연구원장, 종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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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포와 기개가 없으면, 차라리 복지부동伏地不動하자. 부당한 지시를 내려주면 소극적 태업怠業을 펼치든가, “서류 검토가 필요하다”며 시간을 끌기라도 하자. 실무자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함부로 징계를 할 수는 없는 세상이 아닌가.

지금 온 나라가 최순실(최서원으로 이름 바꿈)과 그의 딸 정유라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정윤회라는 이름이 그 역할을 맡았었는데, 얼마 전부터 정씨는 사라지고 그의 전 아내와 딸이 국회의 정기 국정감사장 분위기를 완전히 휘어잡았고, 온 언론 매체가 그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정도면, 자유당 시절 이기붕 ‧ 박마리아 부부와 그들 사이의 아들로 이승만의 양자가 되었던 이강석 사건 이후 가장 큰 정치 스캔들,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큰 스캔들이 되어 흔히 쓰는 말로 ‘단군 이래 최대의 미스터리’가 되고 있다.
  
최씨와 정씨, 이 모녀母女야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니 이렇게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 대화방에서도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된 데 대해서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이들은 “왜들 이래? 너희들 까불어 보았자 아무 소용없을 거야. 내 말 한 마디면 끝장날 사람들이 한 둘인 줄 아나? ……” 하면서 이 논란 자체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사태를 두 여인의 문제로 끌고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실은 이것은 대한민국 정치가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치사건’이지 황색黃色 신문에 가십거리로 등장할 웃음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치사건’의 최종 피해자는 국민이지만, 제1차 피해자는 최씨가 주무른 것으로 전해지는 두 재단법인-‘미르’와 ‘K스포츠’재단- 허가 과정의 결재선상에 있었던 관료들이다.
  
나도 어쩌다가 ‘전문임기제’ 관료로 5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앙부처에 근무한 경험이 있지만, 요즈음 관료들 능력이 뛰어나고 고생도 많다. 전체의 약 1~2% 정도 되는 극히 일부의 정치지향적인 관료나 비리 혐의가 있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만난 관료들 중 98~99%는 정직하고 능력이 뛰어나며 공정하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썩어빠진 정치인들이 나라를 망칠 것 같은데, 이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관료들이 든든하게 버텨주는 덕분이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관료들에 대한 이 믿음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자,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문제의 두 재단을 단 하루 만에 허가해준 것이 관료들 책임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안다. 기자들도 알고 야당 국회의원들도 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말고, 무조건 허가해주라!”고 지시한 실체는 숨어 버리거나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며 발뺌을 하고 있고, 죄 없는 관료들 그것도 주무관이 국회의원들 앞에서 답을 하는 상황을 보려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누가 가장 높은 자리의 책임자였는지는, 앞으로 현 정권이 아니면 다음 정권에서 검찰 조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그에 앞서 그 윗선의 지시(또는 부탁)을 부처의 담당 국장 ‧ 과장에게 전달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실무자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은 〇관님의 지시였습니다”는 ‘실체적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뒤집어쓰고 있는 실무자들(과장 포함)을 보면서 안타깝고 답답하였다. 그리고 실무자에 대한 연민憐愍이 그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윗선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지나간 일이고, 이왕 벌어진 일이니 내가 뒤집어쓰겠다’는 자세도 가능하긴 하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당시 수상이었던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榮)의 비리 혐의를 옥죄어오는 검찰의 수사를 맞아 수상의 운전기사가 자살하여 보스(boss)를 지켜주려던 일까지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이 재단 허가 문제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고 발뺌 하는 윗분들을 지켜줄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가 말이다. 이들은 나중에 정권이 바뀐 뒤 검찰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때 가서도 “나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 아래 실무자들이 알아서 한 일이다”며 모든 책임을 실무자에게 돌릴 인사들이 아닌가 말이다.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실무자들이 알아서 그랬다면, 사안이 이렇게 커진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고 조사 결과 업무상 잘못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무자들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된 부처의 모든 구성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참여정부 시절 어느 법무부장관이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구태의연하게 바뀌지 않는다”며 관료들을 질타한 적이 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나는 “저러면 안 되지. 관료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되면 나라가 위험해지는 법이다.”는 생각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었던 적이 있다.
  
이처럼 특정 정당을 가릴 것 없이, 정당이라는 조직의 유전자에는 ‘관료사회를 장악하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한 나라에서는 이 욕망을 슬기롭게 다스릴 줄 알지만, 그것이 정착되지 않은 민주주의 후진국에서는 그 욕망이 겉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관료사회 전체를 마구 휘저어 놓고 국정을 망치는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갑자기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는 하지 말자. 그들은 잠시 잊어버리자. 그러나 관료들이 부당한 행위를 용서하지 않는 올바른 ‘선비’가 되어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곳에서는 정치인들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앞날을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큰 권력 배경을 갖고 있는 인물이 압력을 넣어서 장차관이 그 압력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그에게 아부하려고 해도, ‘선비’ 정신으로 무장한 관료들이 “이렇게 못 합니다. 이건 부당한 지시입니다.”라며 버티면 어찌 하겠는가 말이다. 버티는 그 관료를 다른 자리로 보내고, 새로 온 공직자도 똑같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며 버티면 …….
  
만약 그럴 정도의 배포와 기개가 없으면, 차라리 복지부동伏地不動하자. 부당한 지시를 내려주면 소극적 태업怠業을 펼치든가, “서류 검토가 필요하다”며 시간을 끌기라도 하자. 실무자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함부로 징계를 할 수는 없는 세상이 아닌가.
  
일본 정치권이 썩어 문드러졌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그래도 그 나라가 버티는 이유는 이른바 록히드 마틴 뇌물 수수 혐의로 현직 수상 다나까를 구속 수사했던 일본 검찰의 자부심自負心과 기개氣槪 덕분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러나 우리 관료사회 문화와 정서상 그 정도의 의지를 보이기 어렵다면 차라리 ‘복지부동’하여 ‘저 위의 높은 곳’이 바뀔 때까지 엎드려 기다리는 것도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 네이버 블로그 <香山의 세상이야기 - 葉落糞本>에 실린 글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미디어붓다>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