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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들은 모두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김재진 그림과 글, 꿈꾸는서재
148쪽, 1만3800원

어느 날 일러스트를 배우러 가는 지인을 따라 백화점 문화센터를 갔던 것이 시작이었다. 네 차례, 하루 두 시간씩 그곳에서 그림을 그린 게 그림 수업의 전부였다. 그리고 두어 달 뒤 문득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실내로 들어왔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은 호랑나비를 발견했을 때다.

A4용지의 하얀 여백 위에 호랑나비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비를 그리면서 성취감과 짧은 희열을 느꼈다. 검은 파스텔 한 조각으로 나비의 날개 위로 그려진 무늬들을 묘사하는 동안 온전히 뭔가에 몰두하는 자신을 경험했다. 그것은 일종의 치유였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 지내는 노모에 대한 슬픔과 절망, 인생의 막장을 본 듯한 좌절감으로 삶의 의미를 곱씹고 있던 그에게 그것은 힐링이고 안식의 경험이었으며, 폭포처럼 터져 나오는 상상력의 폭발이었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된 후 40여 년간 글쓰기에 몰두했던 김재진 시인. 예순을 넘긴 나이에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고 그림 에세이를 펴내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파킨슨병으로 꼼짝도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는 시인의 노모가 갑자기 시인을 향해 벽 위에 ‘입’을 하나 그려달라는 부탁을 한 후 시인은 미친 듯 그림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온종일 벽만 바라보고 누워 있는 절대적인 적막함과 고독함을 위안 받으려 한 것인지, 입을 그려달라는 노모의 말은 오랜 시간 병상을 지켜온 시인을 움직이게 했다. 매일 그린 그림을 노모에게 가져가 보이며 시인은 그리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위안하고, 병상의 어머니를 잠깐이라도 위안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눈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그림에 몰두했던 열정과 상상력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 속에 펼쳐졌다. 짧은 에세이처럼 하나하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그림들은 곧 형태와 색을 갖춘 시이며 문장이다.

김재진 시인의 그림을 본 미술평론가 유경희 씨는 “시의 세계로만 치닫던 시인 김재진이 다시 그림으로 돌아왔다. ‘다시’라는 말은 그가 근원적으로 그림에 맥이 닿아 있던, 태생이 환쟁이였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의 시심이란 애초부터 그림 혹은 이미지와 연동되었을 만큼 그가 그려내는 그림이 그대로 시가 되었다는 의미다.”라고 평했다.

“손으로 그린 그림은 잠시 눈을 스치며 즐거움을 주지만 마음으로 그린 그림은 가슴속에 머물며 즐거움을 준다.”는 김양수 화가의 말처럼 김재진 시인의 작은 그림과 짧은 글들은 우리 가슴속에 오래 머물며 삶의 휴식과 깨달음을 전해주기에 안성맞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