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효정
bellaide@naver.com 2009-08-20 (목) 16:07최근 선에 대한 관심이 유래 없을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선종의 1700공안이 모두 죽은 화두(死句)이므로 구태의연한 공안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일부에서는 그 화두들이 수많은 선사들에 의해 검증된,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의제(活句)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1700공안이 살아있는 화두이든, 죽은 화두이든 일반인들에게는 먼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간화선이란 무릇 화두를 가지고 큰 의심을 일으키는 수행법인데, 화두에 대한 논쟁 속에서 정작 화두의 본질에 대한 접근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1000여년전 중국 송대의 화두를 오늘의 언어로 되살린 책이 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법정 스님 이후 ‘조계종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는 원철 스님이 선의 화두를 현대적이고도 일상적인 언어로 풀이한 책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를 펴냈다.
할(喝)은 선종에서 스승이 참선하는 사람을 인도할 때 질타하는 일종의 고함소리이고, 방(棒)은 수행을 독려하는 몽둥이를 뜻한다.
원철 스님은 이 책을 통해 선이 일상적인 수행법이고, 화두 또한 일상적인 언어임을 강조한다.
“선종의 1700개 공안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박제와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일상적인 생명력 그 자체였다. 그 공안이 생명력을 가지려면 지금도 계속 새로운 화두가 만들어져야 한다. 선불교의 신화를 한꺼풀 한꺼풀 벗겨 내어 일상 종교인 선종의 진면목을 드러냄으로써 그 일화가 뜻하는 당시의 일상을 읽어낼 수만 있다면 오늘날의 그것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다.”
크게보기혹 어떤 이들은 1700공안을 모조리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본래 의미까지 파헤치고 나면 어디에서 대의심을 일으킬 것인가 하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한 현대인들에게 선의 본질에 대한 이해없이 무조건적으로 화두를 참구하라고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히려 현대인들에게는 1700공안의 본래 의미를 알아채고 그 다음에 만나게 되는 자신만의 화두를 갖고 수행하는 방법이 훨씬 더 빠르고 쉬운 길이 아닐까.
원철 스님은 “선사들의 화두나 선어록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또다른 현실이고 바로 우리의 현재”라고 강조하면서 “선종사의 신화 같은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오늘에 되살려 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원철 스님은 이 책에서 선어록과 화두 가운데 핵심이 되는 중요한 공안과 독특하고 의미있는 이야기를 내어, ‘원철의 눈’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한 예로, 이 책에는 중국의 한 고사에 등장하는 고약한(?) 노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 신심 깊은 노파가 20여년간 토굴을 마련해 수행승을 시봉하다가 자신의 딸을 보내 스님을 시험에 들게 한다. 딸이 온갖 아양을 떨며 유혹을 해도 스님은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대니 한겨울에도 따스한 기운이 없도다”라며 죽은 나무처럼 뻣뻣하게 군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노파는 스님의 토굴을 찾아가 ‘내가 20년간 속인을 시봉했구나’라며 암자에 불을 질러버린다.
선의 융통성을 강조하는 이 고사는 깨달음이 일상과 둘이 아님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하지만 원철 스님의 해석은 기존의 것과 사뭇 다르다.
“고지식하게 원론만을 죽어라고 고수한 그 납자에게도 큰 허물이 있다. 하지만 젊은 딸에게는 그 답변이 맞다. 하지만 딸에게 한 법문을 그 어머니는 자기에게 법문으로 이해한 것이 잘못이다. 만일 노파가 와서 안겼더라면 납자는 ‘한 줌의 버들가지를 거둘 수 없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달아 두노라’고 답했을 것이다.”
물론, 스님의 해석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스님 또한 “내 생각대로 해석한 것이죠. 누구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 식대로 해석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게 일상 속에서 자신의 화두를 찾아가는 방법이죠.”라고 말한다.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는, 아주 쉽게 풀어놓은 이야기이지만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그 동안 접근하기로 어려웠던 선어록이 대중들에게 이만큼 가까이 다가온 적이 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스님의 수려한 문장과 높은 안목으로 재구성된 1000년전 화두는 이 시대의 재가자들에게 ‘살아있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의 또다른 묘미는 본문 간간이 들어간 만화가 이우일 씨의 일러스트이다. 수많은 매니아층을 거느렸던 <도날드닭>의 작가는 선사들의 화두를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로 재탄생시키고, 그 의미를 한 컷의 일러스트로 극대화했다.
원철 지음/이우일 그림/도서출판 호미/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