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두 엽편葉片 소설 ‘철수와 영희’, 그 열아홉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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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잠시 바다 건너, 철수 오빠와 올케 언니가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는 프랑스의 이웃나라 독일의 어두운 과거사로 돌려보자. 독일이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서 필설筆舌로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죄를 저지른 것을 모르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몰살시킨 ‘600만 명 대학살大虐殺’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상처일 것이다.

이 잔혹한 역사의 책임자가 누구냐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종전 뒤 연합국이 이 학살의 책임을 물어 단죄를 하고 처형한 이들도 있었다. 유대인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 정보 요원의 끈질긴 추적 끝에 멀고 먼 아르헨티나에서 잡혀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된 아이히만처럼 온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인물도 있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경우 그 누구보다도 나치 정권의 정책에 충실한 관료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법정의 유죄 선고 여부와 상관없이 유대인 대학살에서 나치 정권 관료들의 책임도 결코 감추어질 수 없는 것이다. 혹 살아 있는 동안의 행위[業]를 낱낱이 비춰주는 명경대明鏡臺가 확실히 있다면, 이들 나치에 충직했던 관료들이 지상에서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해서 호화롭게 살다가 갔더라도, 사후 세계에서는 그 명경대에 환하게 드러나는 죄의 값에 따라 화탕火湯 ‧ 발설拔舌 ‧ 도산刀山 지옥 등에서 수억 겁劫에 걸쳐 고통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문제를 깊이 파헤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유대인들의 머릿수를 헤아리는 것부터 살해된 그들을 땅에 묻거나 화장해서 강물에 뿌리기까지 모든 과정은 계획적인 시스템에 맞춰 진행되었다. 이런 대규모의 준비 작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과 지방, 제국의 중심과 변방을 가리지 않고 모든 부서의 관료들이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

(……)

외무부의 외교관, 법무부의 법률가, 대학교와 강제수용소의 의사, 재무부의 회계사, 제국은행의 은행원, 여러 부처의 사무직 종사자, 철도청의 관리직 종사자와 현장 노동자들은 독일 민족과 아무런 물리적 접촉도 없었던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관여하지 않았다면 대규모 학살은 조직될 수도 없었고 실행될 수도 없었다. 철도 기관사들이 파업에 나섰더라면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들을 실은 기차가 제 시간에 죽음의 수용소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IBM이 개발한 최신의 천공 카드 기술이 아니었다면 유대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소유 재산을 박탈하며, 강제 이송해서 게토에 가두고, 강제노역에 배정하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내모는 작업을 일사불란하게 할 수 있었을까? 1939년부터 시작된 안락사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효과적인 대량 학살이 가능했을까?

(……)

실제로 관료들은 비밀이 유지되는 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식의 집단적 자기최면에 걸려 있었다.” (《나치 대학살: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최호근 지음/ 푸른역사. 139~141쪽에서)

그렇다.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면, 유대인 대학살도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철수 오빠가 마음대로 운영해온 재단에서도 내부 직원들이 오빠를 돕지 않았다면, 절대로 내가 엉터리 공사를 해서 돈을 벌지 못했을 것이고, 프랑스에 이름만 수련원을 사놓고 오빠와 올케가 추억 여행을 다녀오는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했을 것이며, 오빠의 아들인 조카가 관계하는 곳에 수억 원씩 지원해주는 ‘공사불이公私不二의 선행旋行’도 베풀 수 없었을 것이다. 나치 정권에 협력(또는 부역)한 관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다만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식의 집단적 자기최면에 걸려 있었듯이, 오빠 휘하의 직원들도 모든 문제의 책임을 이사장인 철수 오빠에게 돌리면서 “나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양심상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다. ……”면서 자기 최면을 걸어오고 있었던 것만 같다.

이들의 이런 자기 최면 덕분에 철수 오빠가 지난 몇 해 동안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해올 수 있었는데 – 앞에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 그놈의 ‘민주화’라는 역병의 전파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거센지 이제 그들도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는 것 같아 큰 걱정이다. 오빠가 시키는 일에 대가代價를 요구할 뿐 아니라, 여차하면 내부자 고발 프로그램에라도 나가서 “우리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말이죠. …… 이런 못된 짓을 숱하게 저질러 왔거든요.” 이렇게 나올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는가. 온갖 권모술수에 달통하고, 부정직不正直과 비양심非良心의 대가이며 남을 속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타고난 철수 오빠로서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빠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민주화 탓’으로 돌리며 그 ‘민주화 바람[風]’이 잔잔해지길 기다리다가, 역습逆襲을 해서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해치우듯이 이놈들을 절멸絶滅시키는 수밖에.

마을 주민들에게 연쇄 성 폭행을 당한 사실을 감추지 않고 세상에 드러내 언론을 바쁘게 했던 어느 선생님이나 5년이나 지난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밝혀내는 어느 형사처럼 세상 사람들이 ‘바른 일을 했다’고 칭찬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은 철수 오빠가 좋아하지 않는다. “악행惡行은 ‘없었던 일’로 덮어 주고, 가족들을 위한 공금의 무차별 사용은 ‘공사불이’의 모범 사례로 크게 포상을 해주는 그런 시절이 아름다운 시대이고 그런 분위기가 넘쳐나는 곳이 활력 넘치는 나라”라고, 철수 오빠는 그렇게 확신해 왔는데 이런 믿음이 깨지고 있으니 “이런 때에 이런 나라에 태어난 것이 답답하고 화가 날 뿐”이라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소리가 이 나라의 1%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 청담동 아파트 단지를 흔들리게 할 정도인 것이다.

나는 이런 오빠의 심정을 백분 이해하고 있다. 내가 공사 몇 건 더 해서 몇 십억 원을 챙긴 뒤에 이런 일이 터졌으면 그래도 덜 억울할 터인데, 프랑스의 ‘이름만 수련원’ 공사까지 도맡아서 신사임당을 그려넣은 5만 원짜리뿐 아니라 유로(Euro)화를 세어보는 즐거움을 누렸어야 하는데 이게 뭐냐 말이다. 그래서 요즈음 들어서는 철수 오빠에게 섭섭하고 화가 난다. 왜 자기 조직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일이 터지게 하고, 나와 올케 언니 그리고 조카들이 좀 더 큰 즐거움을 누려보게 해주지 못하느냐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제 오빠뿐 아니라 나도 밤에 흉몽을 자주 꾸게 된다. 그 무서운 꿈에서 깨어 난 뒤에는 “기자들이 내게 달려들면 어떻게 하지? 검찰에서 나를 부르면 어떻게 하지? 오빠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하고 나는 도망쳐야 하나? 범죄 영화나 첩보 영화에서처럼 설사 물고문 ‧ 전기고문을 당해도 ‘모든 일은 내가 한 것이오. 철수 오빠는 동생을 위하고 아내를 위하고 아들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을 한 것이란 말이오!’라면서 멋지게 연기를 해야 하나? ……” 이런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잠을 이을 수 없어 밤을 꼬박 새우는 날이 허다하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철수 오빠가 집안을 부흥시킨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을 불안에 떨게 만든 주범이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 말도 안 돼!’라며 나를 야단치기도 하지만, 단 몇 초만 지나가면 다시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나도 연약한 인간이니까.

내가 이럴 정도이니 오빠를 도와 문제를 만들어왔고, 이제는 오빠가 저질러놓은 쓰레기 치우는 일까지 맡아 하고 있는 그 아이들은 또 얼마나 철수 오빠를 원망하고 있으며 이참에 ‘딴 길’을 찾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써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아이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이들이 더 잘 버텨주기를 바란다.

얼굴을 가린 오빠 얼굴이 신문과 TV화면에 나오는 장면만은 피해야 하니까. 내가 오빠를 설득해야겠다. 이 아이들 연봉을 두 배로 올려주고, 직급도 두 계단씩 뛰어 올라가게 해주고, 프랑스뿐 아니라 스위스와 미국에도 ‘이름만 수련원’을 사서 그들에게 매년 6개월씩 가서 싫도록 놀고 오게 해주시라. 그러면 그들이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러고 보면, 나도 철수 오빠 못지않게 권모술수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가 싶지만 내가 안 되는 게 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넘나드는 철수 오빠의 ‘지성인知性人 척 할 줄 아는 그 능력’, 그것은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음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 철수 오빠는 대한민국이 낳은 위대한 ‘부정직자不正直者’ ‧ ‘이중인격자’임에 틀림없다.

 

* <미디어붓다>는 <이병두 엽편(葉片)소설 '철수와 영희'>를 6월 9일부터 연재하고 있습니다. 종교평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는 필자(사진)는 오랜 기간 불교계를 비롯한 종교계와 함께 생활하면서 현장의 상황에 남다르게 주목하고 발언해왔습니다. 그동안 보고 듣고 느꼈던 경험들을 이번엔 엽편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엽편소설이란 인생에 대한 유머, 기지, 풍자가 들어 있는 가벼운 내용의 아주 짧은 이야기를 지칭합니다. 필자가 펼치는 새로운 글쓰기 마당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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