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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9층탑 본뜬 ‘중도타워’ 개원됐다

이학종 기자 | urubella@naver.com | 2016-07-06 (수) 21:52

장상건 동국산업 회장의 ‘전통정신문화 선양’ 원력이 이뤄낸 ‘대작불사’
중도명상·남산순례 등 다양한 프로그램 통한 국민의식 향상 기여 목적

 

경주의 랜드마크로 벌써부터 회자

 

경주에 새로운 랜드마크가 등장했다. 황룡사9층탑을 그대로 재현한 ‘중도타워(中道Tower)’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중도타워는 지하1층 지상 9층 높이 68미터, 연면적 1,637평의 거대한 규모로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두 가지의 양면을 함께 담아내는 컨셉으로 지어졌다. 

 

천년고도이자 한국 최대의 관광명승지인 경주의 특성을 고려하여 고전전통건축양식을 현대화하는 방법으로 미려하고 화려한 고전건축물을 재현해낸 것이다.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단지인 보문관광단지에 자리하고 있어, 벌써부터 이곳을 찾는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고전 전통건축물의 멋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랜드마크로서 회자되고 있다.

 

중도타워(황룡원) 전경

 

장상건 회장 수백억 사재 들여 ‘사실상’ 황룡사 복원

 

중도타워는 동국산업그룹 장상건 회장의 원력의 산물이다. 장 회장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의식구조로 변화해가는 현대인에게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정신문화(전통불교사상, 유교사상)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의식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며 기업연수, 사회단체, 일반인 단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올바른 국가관의 정립과 경주관광객 유치 및 확대에 기여하겠다는 목적으로 수백억 원의 사재를 들여 지난 2011년부터 5년 여에 걸쳐 이 엄청난 ‘불사’를 이뤄냈다.

 

우리시대 유마거사로 불릴만큼 존경받는 고 대원 장경호 거사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상건 회장은 천년고도이자 불교성지이기도 한 경주에 새로운 명소를 마련한 것이다. 

 

2,700평 규모 동국산업연수원 함께 건립 ‘황룡원’ 명명

 

중도타워는 연면적 2,700여 평의 동국산업 연수원과 함께 건립됐다. 장 회장은 중도타워와 연수원을 묶어 ‘황룡원’이라고 명명했다. 황룡사 9층탑을 모델로 삼았으므로 황룡원이라 이름한 것이다. 중도타워는 현대식 철골과 목재로 지어졌으며, 1층에 전시 공간, 2층 숙소, 3층 명상실, 4~5층 교육 다목적홀, 6~7층 VIP숙소, 8층 스카이라운지 전통찻집, 9층 법당으로 꾸며져 있다.

 

신라시대 선덕여왕이 호국불교와 삼한통일을 발원하며 세운 황룡사 구층목탑은 고려시대 몽고 침략시 전화로 소실되었는데, 이번에 장상건 회장이 불교의 중도사상으로 남북의 평화통일과 인류의 화합과 번영을 위한 명상과 인문학, 그리고 다양한 전통문화 프로그램을 진흥하기 위해 중도타워를 건립, 우리 국민들은 황룡사의 옛 위용을 다시금 만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곳에서 진행하는 ‘중도명상’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상, 순례 등 정신문화시대 이끌 치유와 회복의 컨텐츠 마련

 

황룡원을 총괄하는 이퇴은 원장은 “황룡원은 우리문화 원형을 살린 글로벌 명품화 전략으로, 21세기는 정신문화시대라는 점에 착안해 치유와 회복의 컨텐츠를 마련할 예정이며, 아울러 역사문화 관광도시 경주의 정서를 흠뻑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곳은 또한 기업연수 장소로도 활용되며, 한류문화를 체험하고, 각종연회를 열 수 있는 공간 제공, 친환경 건강프로그램 운영 등도 계획하고 있다. 

 

특히 박희승 한국문화연수원 교수가 이끄는 중도 명상코스와 신라문화원이 주관하는 남산 불적순례 등은 이미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중도타워 명상실 모습

 

중도명상·남산불적 순례 프로그램 등 검증된 컨텐츠 7월부터 운영

 

중도타워 명상실은 부처님이 깨달아 인류에게 영원한 자유의 길을 제시한 중도사상으로 명상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오는 7월 22일부터 2박3일 생활명상코스와 8월 13일부터 CEO코스가 합숙과정으로 상설 운영된다. 중도명상은 나-너, 노-사, 빈-부, 갑-을, 좌-우, 남-북 등 대립 갈등하는 모든 이들이 상호 존중하고 더불어 잘 살아가는 중도불이(中道不二) 정신을 이해하고 마음에서 체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이 명상코스를 통하여 일상생활을 지혜롭고 평화롭게 잘 살아가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중도타워는 이외에도 〈사〉한국명상지도자협회와 협력을 통해 다양한 명상, 요가, 다도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아울러 〈사〉신라문화원(원장 진병길)과 협력하여 운영하는 경주 남산 불적 답사코스는 신라문화원이 20여 년 동안 운영하여 호평을 받은 프로그램으로 1박2일 코스로 운영된다.

 

또한 중도타워는 7월부터 시설을 이용하고자 하는 기업이나 학교, 사찰, 신행단체, 그리고 일반단체에도 실비로 개방하여 명상과 인문학 특강, 문화행사, 성지순례, 경주 유적지 답사를 지원해 나갈 계획이며, 타워에 대한 일반 관람은 오는 8월경 사전 예약을 통해 매일 두 차례 개방해 나갈 예정이다. 신청은 황룡원 중도타워 홈페이지와 전화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www.hwangnyongwon.com 또는 www.황룡원.kr, 대표전화 054-760-0500)

 

중도타워 운영 주체는 재단법인 중도(이사장 장세희)다. 재단법인 중도는 동국산업 장상건회장이 부친인 동국제강그룹의 창업자이자 〈재〉대한불교진흥원의 설립자인 故대원 장경호거사의 대중불교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전통 정신문화의 창달과 지원, 그리고 수련 시설 건립 운영을 위하여 사재를 출연하여 설립한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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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무영탑 2016-07-07 08:13:29
답변 삭제  
황룡사 9층탑을
오늘에 재현한듯

건축물의
위용이 엄청나네
꼭 가봐야지.
호잔 2016-07-07 08:39:37
답변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본원인 마하보디선원이 위치한 경주에 세워진 중도타워의 개원을 축하합니다.
한국불교가 경주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오늘 7월7일 개원축하 담마를 올립니다.

<불행과 행복과 지고의 행복인 열반>

붓다의 가르침에서 불행은 형성되는 것이며 행복은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지고의 행복은 열반이며 이 열반은 업이 형성되지 않는 해탈에서 달성된다.
형성되지 않는 담마의 종류에 따라 행복은 여러 수준으로 나누어진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불행이란 악업이 증가하는 아꾸살라 담마가 형성되는 상태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행복이란 선업이 증가하는 꾸살라 담마가 형성되는 상태다.
이 꾸살라 담마가 형성되는 상태가 행복이며 더 높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기본 행복이다.
즉, 기본 행복인 제1단계의 행복은
불선한 담마(아꾸살라 담마)가 형성되지 않고 선한 담마(꾸살라 담마)가 형성되는 상태다.

다음으로, 높은 행복인 제2단계의 행복은
선한 담마(꾸살라 담마)도 형성되지 않고 더 이상 업이 형성되지 않는 해탈 담마(끼리야 담마)가 형성되는 상태다.
이 해탈 담마가 형성되는 상태가 되면 ‘해야 할 일’을 해 마친 상태며, 더 이상 윤회하는 중생이 아니다.
사성제에서 갈애의 소멸에 따른 괴로움의 소멸(유여열반)은 이 행복을 의미한다.

그 다음으로, 지고의 행복인 제3단계의 행복은
업이 형성되지 않는 해탈 담마(끼리야 담마)도 형성되지 않는 열반(무여열반)의 상태다.
해탈 담마도 생멸하는 상카라 담마이지만, 열반은 생멸하는 담마가 아닌 아상카라 담마다.
즉, 유정체에서 업에 따른 어떤 나마 담마도 형성되지 않는 상태가 열반이다.
지고의 행복인 열반은 느낌에 의한 행복이 아니다.
느낌이 없는 행복이 열반이다.

형성된 담마는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으며, 해탈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라지는 것은 반드시 업에 따라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열반은 해탈한 상태에서 사라진 후 다시는 형성되지 않는 담마이므로 더 이상 사라지는 담마가 형성되지 않는 상태다.
즉, 형성되지 않는 상태이므로 사라지는 상태가 없게 된다.
이것은 무(단멸)도 아니고 공(연기 또는 연기의 바탕)도 아닌 단지 열반이라는 담마일 뿐이다.

이 열반이라는 담마가 이해되지 않으면 아무리 수행해도 결코 열반에 들 수 없다.
그러므로 수행 뿐만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에 따른 바른 교학도 중요한 것이다.
즉, 빠리얏띠(이해)와 빠띠빳띠(실천)와 빠띠웨다(실현)가 사성제에 따라 완벽하게 완성되어야 해탈의 깨달음에 이른 것이며, 이 해탈의 깨달음 상태에서만 열반에 들 수 있다.

단지 어떤 담마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는 그 담마가 일어나지 않은 공한 상태이지, 열반 상태가 아니다.
일어날 원인과 조건이 있는 공한 상태는 연기하는 상태이지, 열반 상태가 아니다.
일어날 원인과 조건이 없이 ‘나마 담마’인 상카라 담마가 사라진 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열반 상태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성된 담마는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형성되지 않는 상태(열반)가 행복이라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이해된 상태를 법안이 열린 상태라고 한다.
즉, 초전법륜경에서 언급된 꼰단냐 존자의 깨달음이 완벽히 이해되어야 법안이 열린 상태가 된다.

이 법안이 열린 상태부터 퇴보하지 않는 수행이 시작되며, 해탈 열반에 이르는 흐름에 들게 된다.
퇴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뿌리뽑힌 번뇌 또는 오염원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해탈 열반에 이르는 ‘퇴보하지 않는 수행’에 가장 중요한 유신견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어떤 성인도 이 유신견이 뿌리뽑힌 상태가 아니므로 범부 중생이다.

잘 알다시피 이 유신견이 뿌리뽑힌 법안이 열리면, 이와 동시에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 및 질투와 인색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유신견과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과 질투와 인색이 일어나면, 머리로 또는 지식으로 이해한 상태이지, 법안이 열린 수다원의 깨달음 상태가 아니다.

유신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나라는 개념도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전해지는 붓다의 가르침을 확인 없이 무조건 믿는다거나, 질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어떤 행위도 용인하고 무관심하다거나, 인색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무엇을 펑펑 무조건 아낌없이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유신견과 의심과 질투와 인색에 따른 정신적 괴로움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오염원 또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 오염원 또는 번뇌에 따른 정신적 괴로움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이 오염원 또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이 오염원 또는 번뇌에 반대되는 선법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신의 마음의 질적 상태는 자신과 타심통이 열린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외부로 나타나는 행으로 그 마음의 질적 상태를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 또는 천주교에서 그렇게 절대적 사랑을 실천한 자라고 하는 예수님도 수다원의 성자에 이른 마음의 질적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르침에 따른 절대자라는 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유신견이 지배하고 있는 마음의 범부 중생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불교는 세상의 어떤 다른 종교와도 교리적으로는 화쟁할 수 없는 종교이다.
다른 모든 종교는 서로 교리적으로 화합할 수 있지만, 불교는 다른 종교와 교리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종교이다.
불교의 화쟁 또는 화합이 다른 종교와의 교리적 화쟁 또는 화합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행복의 추구 방향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는 유신견이 내재된 형성된 상태의 행복을 궁극으로 추구하는 종교임에 반해,
불교는 유신견이 제거된 형성된 상태의 행복에서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형성되지 않는 상태(열반)의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아를 긍정하는 기본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이지만, 불교는 자아를 부정하고 무아를 긍정하는 기본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후기불교에서 나타나는 진아 또는 참나라는 개념은 근기가 낮는 사람에게 자아가 부정될 때 발생되는 공황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즉, 후기불교의 불성, 진아 또는 참나 등의 교리는 대중들의 근기에 맞춘 방편 불교(대중부 불교 또는 대승불교 등)일 뿐이다.
말했다시피, 근본불교는 근기가 높은 사람들을 위한 불교이고, 후기불교는 근기가 낮은 사람들을 위한 방편 불교일 뿐이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어떻게 하든 대중들의 근기를 높여 보고자 하는 시도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도 형이상학적 교리를 만들어 어떻게 하든 대중들의 근기를 높여 보고자 하는 시도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후기불교에서는 이 방편 또는 시도가 진실로 왜곡되어 전도된 상태로 나타나고 있다.
유마힐 2016-07-07 11:31:44
답변  
편견과 왜곡이 가득한 글이네요.
참나는 선불교에서 열반을 표현하는 언어일뿐이고, 참나외에 주이공,본래면목,무일물,참마음,자기,진흙소,심금,심검...무수한 이름들이 참나와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선불교식 진리 표현중 하나일 뿐인 참나라는 단어에 끄달려서 온갖 해괴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되려 신기하네요.

특히 자아가 부정될 때 발생되는 공황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부분은 정말 희대의 코미디로 손색이 없습니다. 공황장애라는 질환이 자아가 부정될때 발생하나요? 의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희안한 주장입니다. 공황장애의 원인은 현재까지 생물학적 원인이나 인생경험, 특히 유년기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과 외부 스트레스가 상승작용할때 발생하며, 유전적 요인도 있다고 합니다.  가져다 붙여도 좀 정도것 하시길 바랍니다.

참나는 대승경전에 나오는 불성,여래,진여,공,유식,법신 등을 상징하는 선불교식 표현입니다. 선승들이 특.별.히 공황장애 환자들을 위해서 참나라는 용어를 고안했다는 근거가 있어요? 졸지에 선승들은 정신과전문의나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대승불교는 500년 아라한 불교의 결과적 실패를 딛고 태동한 것입니다. 붓다 사후 500년경의 아라한 불교의 망조를 극복한게 대승불교이므로 당시 아라한불교의 실패를 언급해야 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승들은 이부분을 의도적으로 감춥니다. 도저히 아란한 불교의 실패를 자기들 입으로 떠들지 못하기 때문이죠.

티벳이나 대승불교는 아라한 불교를 하근기나 중근기로 분류하고 대승불교를 상근기로 분류합니다. 아라한 불교라는게 출가중심주의로 세속을 버리고 숲에서 개인적 명상락만 즐기는 것 아닙니까. 중생들이야 고통받건 말건 그것은 중생들의 업이니 중생들 스스로 해결할 일이라면서. 그래서 아란한 불교는 하근기들의 불교입니다. 이런 불교는 궁극적으로 중생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었던 부처님의 행동과 정 반대이기 때문에 비난받은 것입니다. 대승에서 유마경이라는 위경을 등장시켜서 까지 아라한 불교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까닭입니다. 고요한 숲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고요해 지는 선정이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시장 한복판 시끄러운 곳에서도 선정을 유지할 수 있는 선정이라야 제대로 된 선정이라는게 유마의 일갈입니다. 중생의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열반이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고통받는 중생을 외면하지 않고 인도전역을 누비시며 자비행을 실천하셨습니다. 열반의 경지를 얻었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경지가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경지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견주어 볼때 붓다 사후 500년경 아라한들의 숲속에서 개인적 선정락만 즐기는 행위는 얼마나 소극적이고 한심합니까. 부처님의 열반경지가 상근기 라면 500년경 아라한들의 열반경지는 하근기중의 하근기인거죠. 이러니 대승불교가 보살하자고 나오는 겁니다. 붓다의 제자들은 붓다의 열반경지까지 나와야 한다는 당연한 얘기를 하는겁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법화경,유마경,승만경,아미타경.......대승경전들은 모두 붓다 사후 협소해질대로 협소해진 아라한불교를 실패로 규정하고 다시 석가모니의 붓다의 시대로 가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승경전에서  실패한 아라한 불교를 극복하기 위해 열반에 대해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행위(중생구제)가 적극적으로 나오는 열반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아라한 불교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죠. 열반에 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과 열반을 삶에 회향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 입니다. 대승은 열반을 얻는 것 이상으로 열반을 중생들에게 회향시키는 것이 열반획득의 궁극적 가치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들의 소극적이고 협소하고 개인적인 열반을 '이기주의'까지 깍아내리는 것입니다. 그런 낮은 열반에 안주하지 말고 열반을 중생구제를 위해 써먹자, 부처님 처럼 적극적으로 중생들을 위해 자비실천를 하자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라한 불교가 열반에 안주하고 중생에 나몰라라 하는 것을 반대하니 무주열반을 주창하고 중생들 곁으로 다가가 중생을 돕는 열반을 말할 밖에요.

참나등의 표현은 자아가 소멸될까봐 공포에 떠는 중생들을 안심시키 위해 만들어진게 아니라 아라한의 열반이 아닌 보살의 열반을 표현한 말입니다. 보살이되고자 하는 이의 목표가 참나이고 이 참나를 얻어 부처님처럼 중생구제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의 열반관입니다.

선승들이 자아가 소멸될까 두려워하는 공황장애급 환자들을 위해 참나를 만들었다는 허무맹랑한 소설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대승불교에 대한 무지만 드러낸 것입니다. 아라한을 거부하고 보살이 되겠다는 대승(선)불교입니다. 중생들이 참나를 얻어 공황장애를 극복하는게 대승불교였나요? 누가 그래요? 보살되어 부처님처럼 중생구제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진 분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열반=참나인 겁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이 어떻게 하든 대중들의 근기를 높여 보고자 시도한 경전? 누가 그래요? 틀렸습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사리불,수보리라는 아라한들 불려다 놓고 재교육 시키는 경전입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아라한들을 비판하는 경전입니다. 대중들로 하여금 아라한불교를 버리게 하고 보살불교로 가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화엄경,법화경등이 형이상학적 교리를 만들어 대중들의 근기를 높여보고자 시도한 경전? 누가그래요? 이들 경전도 아라한 불교를 비판한 경전이고 형이상학과 관련도 없습니다. 화엄경의 다른 이름은 10지보살경입니다. 보살에도 등급이 있고 수행으로 십지보살이 되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경지라는 겁니다. 아라한과는 화엄경에서 1지보살보다 하위단계 등급입니다. 화엄경은 아라한과 얻으면 끝이라는 아라한 불교식 생각이 틀렸다는 겁니다. 아라한과는 1지 보살 보다도 하위단계이고 상위 10지보살까지 머나먼 깨달음의 증득과정이 있다고 알려주는 경입니다. 결론은 아라한과에 만족해선 안된다는 겁니다. 법화경은 화성의 비유를 통해 아라한과라는 것은 근기가 약한 제자들 때문에 어쩔수 없이 한 말이다. 사실은 아라한과는 목적지의 절반만 온 거고 이제 좀 쉬면서 기운을 차렸으니 아라한과에서 머물지 말고 더 진도 나가서 보살되자, 이런 경전입니다.

대중들의 근기를 높여보고자 시도한 경전이 아니구요. 아라한과에 머물려는 자들의 근기를 높여 보살이 되자는게 대승경전의 취지 입니다. 쫌 제대로 알고 떠듭시다.  당신의 황당한 글은 처음에는 배꼽잡을 정도로 웃기다가 급기야 민망해지고 화끈거리고 부끄러워 지고 그래요. 멀쩡하게 생긴 분 같은데  왜 이렇게 어리석은 글을 쓰게 됐는지 참으로 안타깝네요.
호잔 2016-07-07 12:05:50
답변  
그대와 같은 사람들의 반론을 충분히 예상했습니다.
보거나 답변하는 것은 그대의 자유이지만, 그대 보라고 적은 댓글도 아니고 그대가 답변하라고 적은 댓글도 아닙니다.
그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교리적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전에도 그대에게는 충분히 저의 입장을 전달했으므로, 더 이상의 답변은 그대와는 지루한 논쟁이 될 뿐입니다.
그대가 뭐라고 해도 저의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에게 저의 글이 어리석은 글로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유마힐 2016-07-07 12:39:08
답변 삭제  
나는 그대 보라고 댓글 달았습니다.
이런 반론글도 없으면 자기 견해가 진실이라고 우기게 되니까요.
또 혹시라도 그대의 글에 혹하는 독자들이 있을까봐 그들로 하여금
그대의 글이 사실보다는 망상에 가까운 자위적 글이임을 알고 읽으라고 댓글 달은 겁니다.

그대의 글에 교리적인 무엇이 있기는 합니까? 초기불교에 대한 교리도 없고 대승에 대한 교리도 없었습니다. 당신글은 어느 초기불교 신봉자의 대승에 대한 삐뚤어진고 왜곡과 편견으로 점철된 망상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자아가 소멸되는 것이 두려워 공황장애에 빠지는 자들을 위해 참나를 고안해 냈다는 코미디같은 주장이 무슨 교리에 해당합니까.

모든 것은 무상.고.무아라고 하면서
자기의 입장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죠? 맹목적 신념으로 자의식을 공고화 시키는 자들은 모두 그대와 같이 말합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자의 말을 다른이가 귀담아 들어줄리 만무하죠.

배타적 근본주의, 종교원리주의에 입각한 독선적 종교관은 자신과 타인에게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변치 않고 그 길을 가겠다니 무섭기 까지 합니다.
동감 2016-07-07 20:03:16
답변 삭제  
해요.
이상한축하글 2016-07-07 13:26:33
답변  
[기사내용]
유마거사로 불려지는 장상건 회장이 사재 수백억원을 들여 황룡사탑을 본뜬 중도타워를 개원하였다. 대한불교진흥원(재)을 설립한 부친 장경호 거사의 대중불교운동의 정신을 이어 가고자 뜻에서 시작한 것이다.

[호잔댓글] 중도타워 개원을 축하하며 한국불교가 경주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개원축하 담마를 올린다.

그런데 개원축하 담마 내용은 대승불교에 대한 왜곡과 편견,비방으로 점철되어 있다. 중도타워 개원에 대한 축하글이라고 할 수 없고 "담마"라고 주장하나 대승불교에 대한 왜곡,편겨,비방이라는 개인적 견해였다. 자기 개인의 허황된 주장을 "담마"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앞 집에 새로운 중국요리집이 개원하였다. 그런데 길 건너편 기존의 중국집 사장이 개원을 축하한다면서 덕담으로 건낸다는 말이 "한국에 들어오는 중국집 식자재가 저급한 것이고 주방장이 추구하는 요리가 시대에 뒤떨어졌고 아마도 그 요리를 좋아할 만한 사람들은 중국본토에서 음식을 먹어본 소수일거라는 둥 진짜 중국식 요리는 자기 친누나가 하는 옆동네  00반점과 그 반점의 분점인 자신의 가게만이 진짜 중국요리다"라는 소리를 했다면 그게 개원축하일까? 과연 개원축하 덕담일 수 있나?

축하라는 외피를 두른 악담이지 않을까.
호잔 2016-07-07 18:12:34
답변  
붓다의 법이 펼쳐질 수 있는 장소인 '중도타워'의 개원을 축하한다는 뜻이지,
그 장소에서 대승불교의 전도되고 그릇된 담마가 펼쳐지는 것을 공감하며 축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원정사에서도 대원불교대학 강좌를 통해 현재 붓다의 바른 담마가 펼쳐지고 있기도 합니다.
대승불교에서 바른 담마가 펼쳐져 한국불교가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원한다는 첫 문단에서 저의 의도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건물은 세월이 지나면 언제든지 다른 견해와 사상이 펼쳐지는 건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붓다의 바른 담마는 한국의 불교관련 절이나 건물 등 어떤 장소에서도 잘 펼쳐질 수 있다는 점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중불교운동의 근본을 알고 담마가 바르게 펼쳐지기를 기원하고 그 장소가 생기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라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대승불교의 모든 행위를 다 긍정해야 그 개원을 축하할 수 있는지요?
공감의 축하 말이 아닌 ‘다른 견해’의 축하 말도 축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대도 위 유마힐님의 견해와 별 차이가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유마힐님은 무상-고-무아의 의미도 왜곡하고 있습니다.
저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여 무상-고-무아이므로 입장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마음이 생멸함에 따라 동일한 입장의 견해가 연속하여 반복하며 연기하는 것도 무상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연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이 고이고 이 무상에 따라 무아가 되는 것입니다.

무상-고-무아이므로 하나의 견해만 가져서는 안된다며 배타적 근본주의나 종교원리주의라고 운운하는 것은 무상-고-무아라는 삼법인의 진실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배타적 근본주의나 종교원리주의라는 말은 다른 견해를 없애야만 직성이 풀리는 도그마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불자라면서 다른 견해를 없애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하는 것은 불교를 잘못 배운 것이며, 불자에게 이런 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불교에서 정견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견을 없애기 위한 배타적 근본주의나 종교원리주의는 분명히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만 이러한 도그마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테라와다불교에서도 경계한다는 것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님이테라와다불교하는분인가요 2016-07-07 19:44:51
답변  
다른분들의 이견이 전혀
잘안보이는가요?
공감합니다 2016-07-08 10:37:18
답변 삭제  
테라와다건 마하야나건, 불자로서,
남 비방이전에 자신과 다른 이견에 대한 화남을
잘 보는 노력이 우선인 것 같아요...

불교가운데서, 다른분파가 또 다른 분파를
비방할 때는, 참으로 조심할 문제 같아요.
의견제시도 공개토론을 전제로 열린 공간에서
해야지 이렇게...좀 ...?
그리고 몇 천년 내려온 공인된 분파들에 대한 다름비방은,
수많은 선배제현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요, 많은 경우가
자기속한 분파에 대한 이해부족이 가장 큰 원인 이더군요...
각 다른 분파에 대한 다름건립도 부족한데, 다름비방이라니...
역지사지 2016-07-08 10:43:41
답변  
궤변입니다.
만일 테라와다 사원이 한국 모처에 개원하였는데 누구나 다 아는 대승불자가 지금 당신과 같이 축하한다는 짧은 언급을 하고 담마라는 미명하에 테라와다는 소승불교이고 소승하면 안되고 대승불교 담마가 펼쳐지어 모든 사람들이 아라한이 아닌 보살을 지향해야 한다고 글 맺으면 그게 개원축하글이요, 대승홍보글이요. 아님 테라와다 개원에 먹칠하는 행위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오. 이정도까지 뻔뻔한 사람은 아니라고 봤는데....당신의 입장이라는 것은 오온이 연기한 것일 뿐입니다. 당신의 입장이 변할지 말지는 당신이 결심한다고 결과가 꼭 당신뜻대로 되는게 아닙니다. 무상.고.무아를 안다는 말은 오온이 연기한 생각이란 것이 늘 변해간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무상고무아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견해에 대해 '지금까지는 이렇다'가 입장이어야 하지 '제 견해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로 답하면 안된다는 거지요. 어떤 상황과 조건이 발생하더라도 결코 자기 견해를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다는 것은 무상.고.무아라는 진리에 저항해서 내견해를 고집하겠다는 것이지요.

참나라는 용어가 자아소멸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공황장애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는 학계에 있지도 않는 잘못된 주장, 대승경전은 아라한불교 그만두고 보살불교해야한다는 관점을 철저히 지키는데 당신은 그저 대승경전이 대중의 근기를 높이려고 만들어진 것이다며 학계에 있지도 않은 주장을 합니다. 이런 잘못된 견해와 입장을 결코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무상.고.무아를 아는자의 말이겠습니까. 내 좁은 소견으로는 이런 관점이 맞는거 같지만 다음순간, 혹은 내일, 혹은 1년후에 나의 지혜가 더 발달했을 때 보는 관점은 지금과 다를 수 있다. 이런 열린 관점을 늘 유지하는게 무상.고.무아를 아는 불자들의 모습입니다. 당신은 초기불교'만'이 옳다는 도그마를 하고 있으면서, 대승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면서(그러니까 개원축하한다면서 비방글이나 삽입하는 무례한 행위를 하고, 또 장황하게 변명으로 포장까지함) 근본주의나 원리주의자가 아니라고 발뺌하니 무슨 설득력이 있습니까.

어디에 누가 다른 견해를 없애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했나요? 그저 당신의 잘못된 행위(축하한다면서 대승비방하는 내용을 삽입하는것)을 지적한 것이고. 당신의 주장( 참나가 자아소멸을 두려워해서 공황장애에 빠지는 자들을 위해 고안해낸 용어다)이 학계에서 통용되는 주장이 아니라 매우 허황된 사견이라는 점을 밝혀두는 것입니다. 대승경전은 또한 공통적으로 아라한불교 그만하자, 보살불교로 전환하자, 보살불교를 잘해야 한다는 당위를 거듭해서 말하는 경전입니다.  아라한불교 지향하는 사람 뜯어 말려서 보살불교하자는 거지, 근기 낮은 대중의 근기를 높이겠다고 생긴게 대승이 아닙니다. 대승에서는 명백하게 니까야 불교에 대해 소승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서 스스로의 이름을 "대승"이라 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중의 근기를 높이기 위해 대승이 생긴게 아니라 "소승"과 우리는 다르다, 소승하면 안된다는 입장에서, 즉 아라한불교를 반대하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당신의 개인적 견해와 입장이 사실과 너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 당신의 견해를 없애버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입장에서 댓글 단거 아니거든요. 착각도 지나치면 우스워요.
호잔 2016-07-08 12:41:35
답변  
학계에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기에 공식 논문 등으로 저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학자가 아니며, 학자로 인정받고자 하지 않기에 이와 같은 주장을이런 곳에서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학계에 있는 주장 만을 언급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대의 자유입니다.
말이 대승불교나 그대를 비방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런 뜻은 전혀 없습니다.
저도 저가 보는 사실이 그렇다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보는 사실이 다른 점을 지적한다고 하면서 그대가 쓰는 말을 보면 그것이 의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역지사지 2016-07-08 13:05:41
답변  
그러니까 당신의 견해는 공신력도 없는 망상,상상,억측이라고 하는 겁니다. 초기불교도들은 걸핏하면 8정도를 강조하는데요. 8정도중 정견이라는 항목이 개인의 사견이 될 수 있습니까. 개인의 잘못된 사견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태도가 정상은 아닌거죠. 최소한 보편타당한 주장이라야 공적인 게시판에서 인정을 받는겁니다. 황당무계한 주장이나 견해에 대해서 공적인 게시판에서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겠다면 댓글을 아예 달지 않은게 좋을겁니다. 대중이 모이는 게시판에서 자기의 견해에 대해서 자기입맛에 맞는 댓글만 수용하겠다는 태도 역시 토론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보편타당하고 수긍이 갈만한 견해는 환영을 받는 것이고 억측과 왜곡 망상으로 점철된 삿된 견해는 당연히 쓴소리의 댓글이 달리는 겁니다. 학계에서 통용되는 주장만 해야한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최소한 터무니 없는 사실을 주장하지 말라는겁니다.

참나가 자아소멸을 두려워하는 중생들이 공황장애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생긴 것이라는 부분은 대승어디에도 없습니다. 최소한 대승의 가르침을 비판하고자 하면 대승의 가르침에 대한 공부나 이해를 한 다음에 하시라는겁니다. 당신의 견해가 상식적으로 맞으려면 대승경전이나 논서에서 자아소멸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해 참나 개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라도 있어야 되는 겁니다. 대승=보살이 되자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역으로 아라한이 되지 말자, 아라한과에서 머무르지 말고 진도 더 나가자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최소한 아라한수준의 공부가 된 사람들에게 대승가자 하는 것이됩니다. 대승의 실천적 측면인 선불교는 아라한 수준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자, 아라한의 열반안주에 반대하며 보살로서 무주열반으로 가자합니다. 이 무주열반을 뜻하는게 참나개념입니다. 아라한과 수준을 훌쩍 넘은 사상인데 겨우 자아소멸을 두려워하는 중생들을 위해 참나를 고안했다구요? 틀렸어요. 참나는 아라한의 열반을 뛰어넘는 열반을 가리키는 말로 선불교에서 설명합니다. 선불교가 괜히 대승불교의 카테고리에 포함되는게 아닙니다.

대승불굘르 비방한 적이 전혀 없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소리하세요. 대승이나 선불교에 대한 헛소리 주장이 비방이고 왜곡입니다. 그것을 왜 대중불교 운동하고 유마힐이라는 별칭을 듣는 분이 개원하는 곳에다가 축하한답시고 붙여넣어요?

내가 쓰는 말을 보면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구요? 당신말을 그대로 돌려드리죠. 저는 그저 당신을 보는 사실이 그렇다는 것만 말한겁니다. 당신을 보니 종교도그마에 빠진 맹신주의자이자 타종단에 배타성과 공격성을 보이는 원리주의자 근본주의자입니다.정상적인 사람은 왠만해선 타종단의 개원에 축하를 빌미로 자기의 종교를 설파하는 더러운짓은 안하거든요. 제가 당신을 비난하거나 비방하는게 아니라 제가 보는 "사실"이 그렇다는 것만 말한거에요. 그러니 저를 의심하지 마세요.

어때요? 자기가 한 말 그대로 돌려받으시니
호잔 2016-07-08 13: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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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어떤 자인지 이제 알겠습니다.
그대의 글에는 더 답하지 않겠습니다.
역지사지 2016-07-08 13:24:38
삭제  
그대가 어떤 자인지 이미 알아챘습니다.
그대의 잘못된 글이 발견될때마다 또박또박 그대의 오류를 지적해 줄겁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는 것, 이게 무지를 설파하는 중생에 대한 보살의 자비 실천입니다. 보살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관리자님 2016-07-09 19:56:10
삭제  
욕쟁이 다원이가 또 게시판을 '개판'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무영탑 2016-07-07 14:54:16
답변  
어느 시대 어느 때를 막론하고
나쁜 무리들은 항상 있었다.

맑고 밝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무리들은
외곡과 질시로 순리를 부정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물은 아래로만 흐르고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인 것을...
산시산수시수 2016-07-07 19:40:28
답변 삭제  
는 함부로 쓰지 마시길....
그리고 나쁜무리란 어딜 말하는건지요?
공심 2016-07-07 21:39:51
답변  
아무튼 한국의 종교 추구를 하는 사람들은 쌈박질의 무슨 말들이 그리도 많은지... 잘들 났어요...삶이 그리 살지들도 못하시면서....
쌈박질이라뇨 2016-07-08 05:17:05
답변  
왜이러세요?
한마디 2016-07-08 10:47:12
답변 삭제  
토론자체를 쌈박질로 여기는 꼰대성향의 살람들이 있습디다
테라와다의실상 2016-07-08 18:54:19
답변  
테라와다 불교의 실상

불교의 타락 vs 군정의 탄압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60708143858248 한겨레 21

내용요약
호랑이사원 스님들의 호랑이 밀수출,도살,호랑이가죽, 호랑이와인까지 만듦.
호랑이와인은 성적흥분을 일으킨다고 함, 그걸 왜 스님들이 만들어?

담마꺄야 사원-태국불교상업주의 상징
신도들에게 헌금강요. 이동통신사 대표가 이 절의 신도가 되어 460억 헌금바침
99년,2002년 주지스님이 두 차례 돈세탁 혐의로 수사받음,

앞의 호랑이 사원이 불교의 생명윤리가 타락할대로 타락했다는 점을 상징한다면
후자 담마까야 사원은 돈과 관련된 부패와 정치권력이 연결되어 있다점

승려를 첩자로 사용하는 군부정권은 태국전사회를 통제하려고 하고 불교도 예외가 아님.
이 군정에 승려들이 협력함. 오노이 사원 주지승은 군부출신의 승려로 2014년 총선 방콕 북부이 투표 이송함을 방해하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였음.

이웃나라 스리랑카,버마의 불교는 '불교쇼비니즘'의 광기가 발현 소수민족과 이교도에 대한 무차별적이 테러행위를 가함.

요즘 태국에서는 종교자체에 '회의'를 느끼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태국승려들으 성추문,마약은 이제 뉴스거리도 아님. 너무 비일비재해서 그러려니 함.


테라와다는 부처님 정법이며, 테라와다 승려는 계율을 잘 지키며.......
한국승려들은 정법이 아닌 사법을 배우고 있으며 그래서 타락했으며
한국불교는 사법인 대승,선불교 버리고 정법인 테라와다로 바꾸지 않으면 멸망할 거라던 한국의 테라와다 불자님들, 한마디 해보슈?

용수이후 조계종까지 말법시대 사법이 판쳐서 정법이 훼손됐다고 주장하는 테라와다 불자님들,  기사를 정독하면 한국불교의 타락은 조족지혈 수준인데 정법을 계승한 테라와다가 어찌 사법보다 더 타락한 것이우?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함 해보슈
호잔 2016-07-09 10:53:13
답변  
태국현지 불교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2016년 05월 07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서울법회에서는 태국에 계셨던 악카삿또 스님께서 그 실상을 바르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악카삿또 스님은 사사나 스님의 속가 아드님이시고 안거를 두번 지냈셨습니다.
태국의 불교 공동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고, 질의에 답하여 태국의 현재 상황과 함께 앞으로의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20160507_태국현지불교 소개 및 질의응답_악카삿또 스님
https://youtu.be/ULv48qbQzu4

불교닷컴의 기사
<불교국가 태국 스님들, 정교분리 주장...왜?>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31223
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말씀이 법문의 뒷부분(31분경) 질의에 대한 답변으로 있습니다.
호잔 2016-07-09 16:01:19
답변  
위 악카삿또 스님의 법문에서 언급된 무슬림에 대해서 좀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슬림은 ‘이슬람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는 자’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하나님을 신봉하는 유일신교로서, 천주교, 기독교 등과 동일한 계열입니다.
아래 참고자료인 <기독교와 이슬람> 내용을 참고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계에서도 이슬람 또는 무슬림의 한국 진출을 경계하여 막고자 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이슬람이 남방의 테라와다불교에 우선 진출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는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테라와다불교에 대해 대승불교의 사람들이 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라고 공격하는 것과 같이,
이슬람교에 대해 기독교의 사람들이 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라고 공격합니다.
교리를 별도로 하고 합당한 비유가 될 수는 없지만, 신앙생활 면에서 테라와다불자를 무슬림에 비유한다면 대승불자를 기독교인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힌두교에 물든 대승불교에는 기독교가 진출하기에 적합한 대승 교리적 바탕(홍익학당의 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한국에서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테라와다 불교에는 이슬람교가 진출하기에 적합한 근본 교리적 바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앞으로 남방에서 이슬람교가 득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참고자료 <기독교와 이슬람>
출처 : http://blog.naver.com/eunsuya/110106388928

"무슬림은 예수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실제로 그는 위대한 예언자로서, 이슬람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여러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람에서 말을 했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흙으로 새를 빚어 숨결을 불어넣으니 살아있는 새가 되어 날아가는 기적 등을 행하였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다른 예언자들이 가져온 메시지와 동일하며,
그는 ‘하나님 이외에는 숭배받을 존재가 없다’는 유일신 사상을 사람들에게 설파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를 부정하는 무슬림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무슬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이며, 그녀의 이름은 꾸란 제 19장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꾸란 제 19장=’마리아’의 장)

그렇지만 이슬람은, ‘예수가 하나님이다’ 또는 ‘그는 인류의 원죄를 씻기 위해 왔다’ 라는
기독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은 또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그를 구했으며, 그를 하늘 위로 올려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이슬람의 믿음이며, 하나님께서 꾸란(코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입니다."
위뉴스가틀렸다는거에요 2016-07-09 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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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이미 이슬람이 와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에서 이슬람에 대해 남방테라와다 승려나 불교신자들처럼 테러행위 안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 이슬람신자에게 폭력 테러를 가하고 이슬람신자가 가지고 있는 상권을 빼앗고 재산을 강탈했나요?

한국기독교가 이슬람을 경계한다는 비유로 테라와다가 이슬람을 공격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설득력이 없어요. 적어도 한국기독교는 이슬람에 대해 테라와다처럼 폭력적이지는 않습니다.

이슬람에 대해 원리주의, 근본주의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아주 몰상식한 사람입니다. 이슬람 교리를 맹신하는 IS, 알카에다등 무슬림 무장단체에 국한시켜서 근본주의,원리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기독교인들만 이슬람에 대해 근본주의,원리주의라고 말하는 거 아니구요. 세계인들 대부분이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극단적이고 원리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이슬람인들에 대해서만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무조건 이슬람에 대해서 근본주의 원리주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식에 반하는 주장으로 기독교를 내몰지 마세요.

한국 대승불교가 힌두교에 물들었다? 말은 바로 해야죠. 힌두교와 교리적으로 가까운 것은 초기불교입니다.초기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대승불교는 힌두교와 매우 다릅니다. 힌두교와 초기불교는 열반과 해탈을 목적으로 수행하고 이 사바세계를 버려야할 부정적인 곳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대승불교는 무주열반과 해탈거부를 통한 중생구제를 목표로 수행합니다. 이 사바세계를 더럽고 버려야할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 사바세계 그대로가 정토,불국토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대승불교 사상을 힌두교는 전면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세세생생 보살로 윤회하면서 중생구제한다는 발상을 근원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어디 대승불교를 힌두교에 가져다 붙여요? 초기불교와 힌두교가 수행의 지향점, 열반과 해탈이 완전 판박이인데요.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말이 될 정도입니다.

최소한 남방불교가 원리주의,근본주의 성향이 있다는 정도는 인정하시는 건가요? 의외네요.

한국에 기독교가 득세하는 것은 한국의 어려웠던 근현대사때 미국정부를 등에 업고 공격적으로 전파한 까닭이 커요. 그리고 동북아권은 예부터 도교,유교,불교와 같은 대승적 사상부류들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는 문화였습니다. 기독교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교리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대승적 사상부류에 속하니까 동북아권에서 수용가능한 것입니다. 기독교에 나혼자 천국가자(소승적 경향)는 식의 교리가 없어요. 네 이웃(공동체)을 사랑하라 하지 않습니까.

이슬람과 기독교와의 관계는 거론할 필요는 없죠. 더불어 유대교까지.

주제는 테라와다 불교라는 것이 한국테라와다 불자들이 퍼트리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도 한국의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추악한 승려들이 소위 권승의 외피를 두루고 불교를 망신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거에요. 한국승려들이나 한국불자들이 이슬람사원이나 교회성당, 이슬람인나 기독교인들에 대해 테러하지 않습니다. 이교도의 재산을 뺏지는 않아요. 이런 점에서 보면 테라와다의 몰지각한 승려와 불자들은 근본주의적 성향,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무자비한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겁니다.  태국의 승가 규모와 한국의 승가규모는 아예 비교도 안될 정도로 차이가 커요. 사찰이 보유한 부와 경제력면에서 한국불교는 게임도 안됩니다. 당연히 크기와 비례해서 부패도 태국승가의 부패가 훨씬 커요. 그런데 한국의 테라와다 불자들은 이런 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침묵하고 있죠. 한국테라와다 불자들은 입만 열면 한국 대승불교가 사법이라서 승려들의 타락이 심하다고 떠들고 자신들이 신봉하는 테라와다 승려는 정법을 배우기 때문에 매우 청정하게 산다고 주장해 왔다는 거죠. 이 가증스러운 행태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습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교리 비교가 왜 나와요 여기서.
위뉴스가틀렸다는거에요 2016-07-09 17: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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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부분의 승려들도 소박하게 청정한 삶을 삽니다.
권승에 해당하는 분들 중에 타락한 소수의 분들 때문에 나머지 선량한 스님들이 덤터기로 욕먹고 있는거에요.
그런데 한국초기불교도들이 언제 그런거 따졌어요?
그냥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라는 사법을 하기 때문에 온통 청정하지 않은 승려들 뿐이라고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태국불교의 타락상은 한국불교의 타락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호랑이 와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상습마약 승려들이 전체 승려의 10%나 되고, 태국언론에는 변복한 태국승려가 성매매로 적발되어 발뺌하는 일은 뉴스가치로도 떨어질 정도랍니다. 이런 얘기는 지어낸게 아닙니다. 태국에 사는 한국불자들이 SNS상으로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태국불교의 실상입니다.
악카삿또 스님이 과연 객관적으로 실상을 알려줄까요? 아마도 뉴스에 나오는 것 보다는 좋게 포장해 줄것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거죠.

태국승려들이 군부독재 정권과 과연 떨어질 수 있을까요.
오랜동안 사실상 한몸이었잖습니까.
군부독재에 협력하는 댓가로 권승들은 대대손손 권력을 손에 쥐어 왔습니다. 태국불교 전체가 어느 날 갑자기 각성해서 각파의 혜게모니 싸움을 버리고 정권과 분리되어 승가공동체가 민주적인 방법으로 법왕을 스스로 선출할까요. 안믿어요.
참진실은 2016-07-09 01:01:23
답변  
대승불교야말로 "아라한 재교육을 위한" 동기에서 발생한 운동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느 사람들이 믿는 불교가 과연불교라고 할 수 있을지?

그렇다면 그 운동을 한 사람은 부처님이 부활하여 다시 재교육을 하였단 말인가?
재교육의 대상이 아라한이라면 재교육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지 분명히 말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도 아라한이신데, 누가 구구를 가르친다는 것인지....허참!

대승불교는 저질의 힌두논사들이 대거유입되어
우매한 중생들에게 부처님을 함께 모셔놓은 힌두사원을 찾길 원하는 동기(앉아서 밥그릇 챙기는)에서 비롯된 훼불종교인 것입니다.

유마와 역지사지님 주장의 진원은 마치 홍익학당의 주인이 외치는 재방송 이하도 이상도 아니군요.
사실인데요 2016-07-09 14: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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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그런것 아니오?
답답한분이군 2016-07-09 17: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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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을 읽어보세요.
전부 수보리,사리불등 아라한들 불러다 놓고 아라한 불교 틀렸다, 석가모니가 니들한테 가르쳤던 것은 너희들의 약한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한 방편이었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살불교 하자는 게 원래 생각이다,는 취지로 설득하는 내용입니다. 왜 대승불교와 아라한이 아닌 보살을 지향해야 하는지 그 당위를 설파한게 대승경전입니다.

대승경전의 근거들 때문에 "아라한 재교육을 위한"이런 표현이 들어가는 겁니다. 제 말이 틀린지 아닌지는 대승경전이라 불리는 경전을 살펴보세요. 하나같이 다 초기경에서 이미 아라한과를 얻은 부처님 제자들을 하나씩 불러다 놓고 재교육 시키고 있습니다.

유명한 대승논사들 대부분이 전부 소승불교에 입문하여 뛰어난 활약을 하시다가 대승으로 전향하신 분들입니다. 용수(중관),무착세친(유식) 같은 분들이 초기불교출신이라는 정도의 상식은 알고 있어야지요.
유가답답 2016-07-09 18: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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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물어봅시다.
대승경전 누가? 어느 시점에? 누그를 위해 지은 소설이요? 

저질 힌두전통에 물든 오염된 논사들의 소설이 어떻게 바른 불교경전이라는 말이요? 정말 당신이 답답한 분이군요.

용수, 세친이 참불교라면 그 분은 부처님 위라는 말이군요. 아라한을 재교육하고,

무아, 무상을 공으로 돌려차기 해서 힌두교리에 짜 맞추는 불교가 참불교라면 당신은 평생 그렇게 한 소식해서 가시구려.
님이더답답 2016-07-09 18: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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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도 잘살펴보세요.
사실이라니까요.....
답답한분이군 2016-07-09 18:34:01
답변  
대승경전 내용이 " 아라한 재교육하는 것"입니다요. 대승경전이 소설이냐 아니냐의 여부와는 별개로, 대승경전이 힌두교에 오염된 사람들이 썼다는 주장과 별개로 말입니다.

"대승경전이 아라한 재교육하는 내용" 허무맹랑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대승경전 자체가 '아라한 재교육하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려준겁니다. 당신이 상식을 가진 자라면 "내가 대승경전을 읽어보니 아라한 재교육 안하던데"라고 반론을 해야 맞는겁니다.

대승경전이 소설이라는 주장
용수,세친이 부처님 위라는 말,
무아,무상을 공으로 돌려찼던 옆차기 했던간에(그런 부분의 궁금증과 진위여부는 당신스스로 가 알아서 할일이고)

대승경전 내용이 "아라한 재교육하는 것"이라는 팩트는 확실하다는 겁니다.
지대로 2016-07-09 18:44:27
답변  
그래서 오염에 쩔은 용수는 식칼로 살해당한 겁니다.
부처님의 참진리를 오염시킨 인간.
용수가 아라한 이상을 교육할 만큼 부처님과 동격이거나 그 이상인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불교라는 말을 붙이면 안되지요.
부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주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교가 아닌 것입니다.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에도 부처님 말씀은 보탤것도 뺄 것도 없이 여일한 것입니다.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엮어 놓은 소설을 버리시고 초기 경전을 읽기를 권합니다.
언제까지나 키보드 워리어로 남을 건가요?
지금 당장 숨이 멈춘데도요?
안타깝네요 2016-07-09 19: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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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이교도에 의한 살해를
지금 정당화 시키는건가요?
답답한분이군 2016-07-09 19: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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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 자체가 "아라한 재교육"이라는 내용이라구요.
아라한 재교육하는 내용이 허무맹랑하다면서요? 그러면 대승경전이 아라한 재교육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근거를 가져오라니까요.

용수가 식칼로 살해됐으면==> 대승경전은 아라한 재교육하는 내용,이라는 주장이 부정됩니까?
용수가 부처님 참진리를 오염시켰건 말건간에 대승경전은 모두 아라한 재교육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사실에 기분나쁘거나 말거나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대승경전이라는 게 다 아라한들 불러다 놓고 일장훈시를 하는 내용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용수가 식칼로 살해당했다는 소설은 누가 창작했나요? 역사적으로 용수에 관해 구체적 기록이 전해진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의 생애는 친구들과 궁궐에 몰래 들어갔다가 친구들이 살해되고 왕옆에 숨은 용수만 살아남고 이 사건으로 용수의 인생이 바뀝니다. 그는 처음 소승불교를 배웠고 더이상 배울게 없자 대승불교로 전향했으며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인도전역을 돌며 이교도들과 토론해서 백전백승하여 제 2의 붓다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초기경전을 연구하여 중관을 주창하였습니다(초기불교도들의 바람은 힌두교에 오염됐거나 힌두교 스파이여야 하는데 미안하게도 그는 초기경전을 연구하여 중관사상을 창시합니다).

용수는 출가위주인 상좌부 불교를 비판하고 대승교단을 출범시켜 대승불교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게됩니다. 초기불교의 이론화, 특권화한 교단에 비판적이었고 아라한불교의 극단과 분열을 종식시켜 육바라밀등 보살행을 실천하자고 주창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용수가 힌두교에 오염됐다는 부분과 식칼에 살해당했다는 부분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입니까. 날조를 통해 용수를 힌두교에 취짃킨다고 해서 용수에 의해 꽃피운 대승불교가 사라질까요. 용수 때문에 생긴 8개의 종파가 사라질까요? 제 2의 붓다, 대승불교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힌두교의 아버지가 되는 일은 아마도 없을겁니다.
식칼살해라뇨 2016-07-10 10: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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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못대시나요?

그렇다면 그,
키보드워리어로 남을건가요?
여실지견 2016-07-09 19:20:21
답변  
참신도와 외도조차도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이 논쟁하는 구려.

부처님 말씀으로 남기신 율법을 이런저런 핑계로 근본을 변형시키고,
가름침 담마를 근본에서 왜곡시키는 작자는 누구가 되었던 그가 바로 외도입니다.

 일부 댓글 중에는 누가 외도인지, 바른 믿음의 사람인지를 거꾸로 매달려 보는 도착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안타깝네요 2016-07-09 19: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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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없이 애매하게 깍아내림만 있는 의미없는 멘트.

그리고 용수가 아니라, 데바가 이교도에 의해 살해 당한겁니다.
누가 왜곡시키는지 잘생각하시길.......
참불교 2016-07-09 21:10:56
답변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상 천하 어느 곳에도 부처님 같으신 분 없나니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 세계에도 비교할 이 없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상에 있는 것 내가 다 보아도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같이 귀하신 분 없네

이와 같은 게송을 외우면서도,
정작 부처님 말씀과 계율 수행은 뒤로 밀쳐두고,
불교라고 하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불교 제대로 합시다.
그리단순하지않아요 2016-07-09 21: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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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승려,선불교승려,티벳승려 모두 "부처님같이 귀하신 분 없네"라고 합니다.
정박 부처님 말씀과 계율 수행은 뒤로 밀쳐두고?? 누가??

용수는 수행 안하고 이론에 몰두하는 당시의 아라한 불교를 반대한 것입니다.
이론적것에 몰두하면서 분열된 아라한 불교, 각 교단의 특권, 경전해석에 대한 승가 독점, 개인의 열반만 추구하고 중생의 고통은 외면하는 승가....이런 아라한 불교에 반대한 것인데 왜 대승이 석가모니 부처님에 반대하는 것으로 둔갑을 시켜요? 대승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조석으로 예불올립니다. 아라한과 지향하는 수행의 목표가 다르다고 해서 부처님이 대승논사들보다 수준이 낫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아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없었다면 대승불교라는 귀한 가르침도 세상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하는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2700년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예배의 대상으로 모시고 있는겁니다.

자기 기준만이 참이라는 생각,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한
차이와 다름을 차별과 틀림으로 전도몽상하게 되어
본인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게됩니다.
그건불교가아니다 2016-07-09 22:17:45
답변  
니가르주나(용수)의 근본적 오류는
힌두사상에서 차입한 공(空)사상을 불교 확장으로 한 나머지 잠시는 그럴듯 하였으나,
 결국 부처님의 독특한 발견과 참진리를 힌두이즘과 뒤섞어 놓아 불교의 정체성 상실을 가져온 상황에서
외도 이슬람이 힘으로 밀고 들어오자 결과적으로 인도땅에서 불교가 가장 먼저 무너지게 하는 원죄를 저지른 비불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덮으면서 비불교를 불교로 계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승문외한 2016-07-10 10: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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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대승경전의 모토는,
귀하의 의견과는 정반대라오.

붓다의 진리는 모든 유신종교와,
왜 어떻게 다른지를
갖가지로 자세하게
설파하고있는데...

정말 ㅅㅁ입니다.
거기에 남탓까지...
부처님의 깨달음을 힌두이즘과 뒤섞어서 ?
불교정체성 상실?이라구요?
정말 불교 ㅁㅇㅎ 아닐까요..?
.
뻔뻔스럽다 2016-07-09 23: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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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에서 공사상을 차입했다고? 힌두교에 공사상 없다.
공(空)은 대표적 불교사상이다.
대승에서는 이 공을 이공(二空)이라고 한다. 하나는 아공(我空) 다른 하나는 법공(法空). 초기불교-아공, 대승불교-법공. 사람에게는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아공, 법에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에 대해 대승에선느 법에도 실체가 없다는 법공을 말했다. 아집을 부수고자 아공, 법집을 부수고자 법공

다 불교에서 나온 공이다. 힌두교에 공사상이 있다면 근거는? 그저 근거없이 힌두교몰이, 이게 극우꼴통들이 근거없이 좌익빨갱이로 몰아부치는 매카시즘과 뭐가 다르냐.

외도 이슬람에 무너진개 대승불교 혼자만 무너졌냐, 테라와다도 함께 무너졌다. 대승은 힌두교 짝퉁이라 인도에서 무너졌다고 주장하는데 소승은 정법인데 왜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냐? 정법이면 살아남았어야지.

나가르주나라도 있었기 때문에 불교가 인도에서 더 빨리 사라지지 않고 버티었던 것이고 나가르주나 때문에 인도불교가 중국,티벳,베트남,한국,일본으로 대승불교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 상상의 나래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날조하지 마시라
공도리는 2016-07-10 09:20:51
답변  
공사상이 대표적 불교사상이라 하지 마십시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님이 말하는 아공)에 용수가 법공까지 말하여 보완하였으니 용수가 부처님보다 한수 위로 보고 계시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요?

아공, 법공을 보태어 나가니 결국 부처님의 고유한 정체성이 인도사람들에게는 별것 없는 사상이 된 것입니다.

테라와다는 한번도 끊어지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근본에서 벗어난 적이 없이 면면이 유지 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상좌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그냥 상좌(장로)입니다. 왜냐하면 여타의 부파불교가 원줄기 테라와다에서 나뉘고, 분파하다가 지금은 사라졌을뿐입니다.
불교는공사상이대표적입니다 2016-07-10 10:02:56
답변  
그깟,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아무리 외우고 더듬고 이해해봐야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불교는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윗분말씀대로 초기불교는 재교육 받아야 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싸띠 2016-07-10 10:15:01
답변  
수행은 철저히 부처님이 제시한 차례에 맞게 수행해야 합니다.
변형되고 왜곡된 교설로써는 무상정등정각은 커녕 문턱도 넘지 못합니다.
근본불교에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분은 불교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가 아닌 공교를 믿자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도 싸~띠를 놓지지 마십시오. ^^
싸띠님 2016-07-10 10:2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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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처님 제시한 차례란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저 에고속에서 외워봐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 공교가 불교입니다....
공도리는씨 2016-07-10 17: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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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가 법공을 말한 까닭은 당시 아라한불교의 '법집' 때문이었습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아공으로 끊어내고
법에 대한 집착인 법집에 대해서 법공으로 끊어내었던 것인데
불교는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용수의 법공이 석가모니 가르침에 훌륭하게 부합하는 것이지 석가모니 가르침을 배격하는 게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법공은 힌두교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공사상이 힌두교에 왔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왜 밝히지 못하는 겁니까. 용수 스스로가 부처님 보다 위대하다 한 적이 있나요? 용수의 뛰어남을 찬탄하는 대승불자들도 용수가 부처님보다 뛰어나다 하지 않습니다.

뒤에 태어난 자가 아무리 뚜어나다고 해도 종교를 창시한 사람만 못합니다. 부처님이 프로그램을 처음 만든 사람이라면 용수는 프로그램을 잘 연구해서 버전업을 했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 훨씬 더 위대한겁니다. 어떻게든 대승불교에 흠집을 내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참 안타깝네요.

테라와다는 한번도 끊어지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주장을 초기불교 학자들한테 해 보세요. 아마도 초기경 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으나 고증학적인 근거는 무엇인가요,라고 되물을 겁니다.
새김으로수행을 2016-07-10 10:41:42
답변  
가공의 유마힐을 내세워 아라한 경지의 성문제자 수보리 등에게 쫑끄주면서 재교육하는 불교가 무슨 불교입니까?
정작 부처님이 계신다면 재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틀림 없이 "이 어리석은 사람아!"라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공으로 돌려 내려 놓을 대상은 부처님의 참말씀이 아니라 공도리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어떠한 경우에도 잊지 않는 새김을 통하여 수행하여야 합니다.
공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글쎄요 2016-07-10 17:20:12
답변  
부처님은 아라한 재교육하는 대승경전에 대해 잘 했다고 박수를 쳐 줄겁니다.
유마힐이 가공의 인물이다,
유마경은 날조된 소설이다 따위의 주장 대신에
유마가 하는 아라한들 재교육시키는 내용을 반박해 보세요.
초기경불자로서 유마경에 대한 분노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분노를 아무리 한다고 해도 유마경은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유마경이 경전으로서의 권위,힘을 잃게 하려면 그대들은 유마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부숴야만 합니다.

분노를 잠시 내려놓고 유마경속에서 유마가하는 말이 왜 틀렸는지를 논술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유마경을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든 말든 지금 이순간에도 유마경을 읽고 이해하고 유마의 사상을 실천하려는 대승불자들은 널려 있습니다.
당신이 공을 부정하면 석가모니의 공도 부정된다는 간단한 이치정도는 숙지하시고 주장하시길 바랍니다.
호잔 2016-07-10 17:47:27
답변  
아라한을 재교육시키겠다는 발상 자체가 아라한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모르는 범부 중생의 발상입니다.
아라한은 해야할 일을 해 마친 성자이며,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해야할 일이 더이상  없는 성자입니다.

아라한이 이기적이라는 말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라거나 이타적이라는 말은 갈망(갈애)이 일어난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애를 포함한 번뇌가 그 뿌리까지 뽑힌 성자는 행의 마음으로서 해탈 마음만 일어납니다.

해탈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도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만이 아라한을 재교육시키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교육시켜야 하는 사람은 중생들이지 해탈한 성자가 아닙니다.
교육시켜할 사람이라고 보이면 그 중의 한 사람은 아라한이 아닙니다.

교육시켜야 할 사람이 아라한이라면 교육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라한이 아닌 범부 중생일 뿐입니다.
수다원 성자만 되어도 아라한을 재교육시키겠다는 발상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을 재교육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중생 중에서도 어리석은 범부 중생일 뿐입니다.
왜늘변두리에서 2016-07-10 18: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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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분류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글쎄요 2016-07-10 18:48:32
답변  
거론한 내용정도를 대승불교를 만든 아라한들이 몰랐을까요?

대승불교가 태동할 무렵의 "아라한과를 얻은 자들"이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 당시의 아라한들이라는 자들은 부처님과같은 경지의 열반도 얻지 못했고 열반을 얻었다는 자들의 자비행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불교는 더 빨리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겁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그것만 고치면 되지 왜 아라한 불교를 통째로 버리고 보살교로 나아갔느냐고. 하지만 인류 사상발달사나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상이 정립할 때는 기존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게 상식입니다. 안그러면 부조리한 현실이 개혁이 안되고 보다 좋은 사상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라한==>보살로의 전향에서 후대의 보살이라는 개념이 올바른 아라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숲속에서 자신의 선정락만 즐기고 있는 아라한을 어디다 써먹어요? 아픈 중생들 구제하는 아라한이 중생들에게 도움이 되지않겠어요? 중생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아라한이 보살입니다.

아라한이 이기적이라는 말은 아라한이 중생들처럼 탐욕에 쩔어서 이기적이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개인의 탐욕을 떨어져 나갔을지는 몰라도 적극적으로 중생을 돕지 않는다는 측면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잖습니까. 똑같이 아라한과인데 부처님은 왜 중생구제를 열심히 하고 부파불교시대의 아라한들은 중생구제 안하고 숲에서 선정락만 즐겼습니까.  어떤 아라한과의 실천이 불교다운겁니까. 저는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적극적으로 중생구제하는 아라한이 진짜 아라한이고 개인이 탐욕심만 제거하고 숲에서 선정락만 즐기는 후대의 아라한은 진정한 아라한이 아니라고 봅니다.

석가모니와 같은 아라한과가 바로 보살이다,라는게 대승의 입장입니다. 혹자가 열반을 얻었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적극적 중생구제가 자동적으로 나와야 제대로 된 열반의 경지를 얻었다고 봅니다. 이런 대승의 관점이 뭐가 잘 못됐다는 것인지요? 실패한 아라한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견주어 상대적으로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는 개인적으로 탐진치 끊었다,하고 선정락만 즐기는 삶을 살았나요? 아닙니다. 다른 중생들도 탐진치 끊을 수 있도록 인도전역을 돌면서 법을 설하셨습니다. 최소한 대승불교가 태동할 무렵의 아라한들은 석가모니와 같은 자비행(=보살행)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뜯어고치고 제대로 불교하자고 나온게 대승불교입니다.

아라한 재교육이라는 언어적 부분에 끄달려 발끈하기 전에 왜 대승에서 아라한 재교육이라는 고육지책을 들고 나왔는지 그 취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하게 대승에서 아라한을 부정하고 이는 힌두교의 행태라고 선입견을 가질 수록 대승의 진위에서 점점더 멀어지고 대승은 초기불교를 파괴하는 악마로 보일겁니다.

누구는 대승에서 올바른 수행법을 캐취하고
누구는 대승에서 초기불교를 파괴하는 악마의 모습을 캐취하고..다 팔자소관으로 치부하기에는 차이가 너무 크네요
호잔 2016-07-11 08:38:26
답변  
그대가 말하는 아라한은 테라와다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이 아니라 범부 중생일 뿐입니다.
아라한이 어떤 분인지 아는 최소한 수다원 성자에 이른 분들은 부파불교를 비롯한 대승불교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테라와다불교는 원줄기의 장로불교이지 부파불교의 한 파가 아니라는 것을 바르게 알기 바랍니다.

말했다시피 대승경전을 만들어 대승불교를 만든 자들은 수다원 성자에도 이르지 못한 범부 중생입니다.
아라한의 해탈 마음에는 기본적으로 자애가 포함되어 있고 연민이 선택적으로 포함됩니다.
붓다께서 분류하신 마음공부부터 다시 하세요.

선정만 닦는다고 해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데와닷따 같은 사람은 선정으로 신통력까지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수다원 성자에도 이르지 못한 범부 중생수준이었기에 그와 같이 행동한 것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선정력으로 신통력까지 얻은 사람으로서 대행스님이 있습니다.
이 스님은 데와닷따와 같은 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주인공 교리로 교리를 왜곡한 한마음 선원 일으킨 사람이며 수다원 성자에도 이르지 못한 범부 중생입니다.
이런 범부 중생들에게 중생들은 혹하는 것입니다.
저도 혹하여 그곳에서 법명까지 받았지만 지금은 불자로서 부끄러워서 그 법명을 쓰지도 않고 호잔이라는 필명을 씁니다.

실패한 아라한?
그대의 말도 안되는 용어들은 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라한이 무슨 진짜 아라한이 있고 진정한 아라한이 있어요?
아라한은 말 그대로 아라한입니다.
무슨 진아가 있고 참나가 있어요?
자아라는 망상만 있고, 아라한의 열반(유여열반)이 있을 뿐입니다.

보살도는 부처가 되는 길이며, 아무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기를 받은 사람만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살을 붓다께서 어떻게 정의하셨는지 다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범부 중생들이 편집하여 가르치고 있는 보살도에 따르지 않아도.
보살행과 유사한 행은 모든 붓다의 가르침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불선한 행을 하지 않고 선한 행을 하며 마음을 청정히 하는 행이 바로 붓다의 보살행과 유사한 행입니다.

붓다가 되기 위한 보살행은 붓다가 되기 위한 수기를 받은 자에게 쓰는 말입니다.
그냥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수기를 받지 않은 이상, 부처가 되겠다는 허황된 망상은 아예 하지 말기 바랍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
헛소리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불성을 부처가 되기 위한 성품이라고 보면, 수기를 받은 유정체에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좀 과격한 말을 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글쎄요 2016-07-11 11: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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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범부중생이 만든 대승경전이 어떻게 주류가 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무슨 바보천치인줄 아십니다. 아라한불교 실패라는 말은 붓다사후 500년 무렵 시스템으로서 아라한 불교가 실패했다는 의미입니다. 더이상 아라한이 배출되지 않았고,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자들의 수준이 너무 미천해서, 아라한불교라는 시스템을 용도폐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왜 인정을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제 식민치하의 민족말살,탄압이 벌어지니까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생긴거잖아요.  독립운동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 원인이 있듯이 대승불교가 왜 생겼는지에 대한 원인이 있는겁니다. 대승경전 전체가 아라한 재교육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당시 아라한 불교가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게 보편타당한 분석입니다. 대승경전은 범부중생들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불자생활 수십년만에 처음 접하는 듣보에요. 듣도보도 못한 주장입니다. 제발 평균적 수준이라도 유지해 주세요.

테라와다가 부파의 산물이 아니라 원줄기라는 주장은 당신들의 신념이라니까요. 그 신념을 타인에게 객관적 사실로 강요하지 마세요. 학자들에게 통하지도 않는 주장입니다.
마음공부를 다시해라 마라 할 정도는 되세요?

아, 한마음선원 출신이었구나.
그런데 주인공(=열반)이라는 단어가 교리를 왜곡했다고 여겨서 탈퇴한 것입니까? 미안한데요 대행스님이 말한 주인공은 이미 선불교에서 오래전부터 쓰던 용어였어요. 대스님이 만든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왜 참나라는 용어에 경끼를 일으키는지 약간 이해가 갑니다. 당신같은 부류는 붓다께서 중생들이 유위법에 집착하는 것을 끊어내기 위해 무아를 강조해서 말씀하신것에 지나치게 꽂힌 나머지  무위법까지 부정해야 한다고 착각하는겁니다.  선불교의 참나,주인공,본래면목은 무위법(열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대행스님이 색,수,상,행,식(오온)이 주인공이다, 무아는 틀렸다, 이렇게 말씀하셨나요? 잘 기억해 보세요 대행스님이 주인공이란 단어를 어떻게 쓰라고 하셨는지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대행스님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에만 매달렸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실패한 아라한들이라는 말에도 흔들리는 것을 보면 당신은 '언어'에 매우 예민하고 과민반응을 보이는 성향을 가지신것 같습니다. 언어적으로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호불호의 감정이 휘몰아치는가 보죠. 그런 감정상태로는 상대방이 말하는 본의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마음상태가 몇몇단어로 인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는데 상대방의 본의가 제대로 인식될 턱이 없죠. 그래서 계속 당신이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부에서만 겉도는 주장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더이상 배출되지 않는 시기가 있었습니다.배출된 아라한이라는 자들의 수준이 형편없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명실상부한 소수의 아라한들은 이러다가 석존께서 열은 불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대대적인 개혁, 수술이 없이는 불교가 역사속으로 사라질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방식을 획기적으로 뜯어 고치고 찬란했던 붓다의 시기로 되돌아갈 새로운 불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결론이 대승불교입니다. 당연하게도 대승불교의 경전내용이라는 것이 기존이 실패한 아라한불교를 용도폐기하는 내용이어야 겠지요. 기계도 오래되면 바꾸고 바꾸다가도 안도면 기계를 통째로 버리고 더 좋은 새로운 기계를 씁니다. 언어도 마찬가지고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범부중생이 무슨 원대한 기획력이 있어서 대승불교를 일으켜요? 왜? 범부 중생이 대승불교를 만들었다는 당신의 주장이 맞다면 당시 아라한들은 왜 범부들의 운동을 막지 못했어요? 당시 아라한들은 범부들보다 실력이 모자랐다는 것인가요? 당시 재가자들이 수준높은 아라한을 따르지 않고 수준낮은 범부의 말에 현혹되어 대승불교가 커진거에요? 망상이 지나치십니다.

대승불교를 창시한 아라한들이 당신이 말한 보살개념을 몰라서 썼겠어요? 당시 아라한불교의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불교, 붓다시대의 불교로 되돌아가는 취지에서 이미 기능을 상실한 아라한이라는 용어 대신에 새로운 개념으로 보살을 도입한 것입니다. 아라한에 대적할만한 용어을 '보살'로 한 것입니다.  보살이란 용어는 석가께서 이미 쓰신 것이기도 해서 쓰는데 거부감도 없었지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개념과 석존께서 쓰신 보살개념은 다른 것입니다. 석존께서는 부처되기 전단계로 쓰신것이구 대승불교에서의 보살은 아라한과를 획득한자가(열반을 성취한 자) 중생구제하겠다고 서원했을 경우 보살이라는 겁니다. 아라한은 열반을 얻고 열반에 안주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대승의 보살은 열반을 얻었지만 열반에 안주하지 않고 타자인 중생들을 돕기 위해 무주열반을 선택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보살로서 윤회하면서 중생들을 계속 돕다 보면 언젠가 부처님이 된다는 것이지요?

초기불교도가 생각하는 보살은 아라한과  아래단계
대승불교도가 생각하는 보살은 아라한과 윗단계입니다.
대승불교도에게 초기불교식 보살개념을 강요하면 안되죠.
이미 다르게 쓰이는 개념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알고 있는 개념만이 옳다고 떼를 쓰면 쓰나요.

'모든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는 소리가 헛소리'라는 소리가 헛소리죠. 수기를 받은 유정체에만 불성이 있다는 소리가 참이면 수기를 내려줄 부처가 없는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부처가 될 수 없겠군요. 당신도 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은 사실이 없으므로 부처가 될 수 없겠네요. 부처가 돌 수기도 받지 않았는데 수행은 왜 해요? 당신논리에 의하면 당신도 불성이 없는거잖아요.

과격한 말 이미 다 해놓고 형식적인 사과를 왜 해요? 굉장히 위선적인 분이군요. 사람 때려 놓고 폭력적이어서 미안해라고 하면 끝나나보죠?
안타갑네요 2016-07-11 13: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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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개인적 ‘추론의 결과’만으로 다름비방을 그렇게 하다니…

안타깝군요...
호잔 2016-07-10 11:55:37
답변  
닙바나를 완전한 죽음으로 여기는 자들은 자아에 대한 망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현명한 불교신자에게 닙바나는 단지 괴로움의 소멸만을 뜻한다.(마하시 사야도)
-담마의 향기 블로그, 7월 7일자 한 줄의 담마-

닙바나(열반)란 용어를 나두고 굳이 참나, 진아, 한마음의 상태를 고집하는 자들도 닙바나를 완전한 죽음으로 여기는 자, 즉 자아에 대한 망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아라한을 재교육하겠다며 대승경전을 편집한 자들도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대승경전을 편집한 자들은 불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 오계 중의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도 지키지 않으면서 경전을 편집한 파계자이거나 불자라고 할 수 없는 자들이다.
아함경을 제외한 대승경전은 ‘여시아문’이라는 말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아함경을 제외한 대승경전은 언제 어떻게 결집되었는지 후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경전이다.
대승경전을 편집한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현재 전혀 모르며,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지 않다.
익명 또는 무기명으로 자신을 숨긴 떳떳하지 못한 자들의 그릇된 행위(불선한 행위)에 의한 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말하는 어떤 선행에 대해 익명 또는 무기명으로 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선행이 될 수 있지만, 경전 또는 경전의 내용이나 견해 등에 대해 익명 또는 무기명으로 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불선행이 대부분이다.

1차 결집의 빠알리경 중에서 손에 주먹으로 쥐고 있는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후대에 대승경전 같은 경전이 더 편집되지 않도록 ‘가르치지 않고 남겨둔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대승경전을 그대로 신봉하고, 이를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바이블을 신봉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자들과 기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1차 결집의 빠알리경 중의 깔라마경은 이런 맹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경전이다.
후대에 알려지도록 비밀스럽게 남겨 둔 대승경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경전의 말씀이다.

깔라마경은 흔히 잘못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그 설법의 취지가 전혀 다르다.
즉, 깔라경은 어떤 가르침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포함하여 누구의 가르침이라고 누가 말하거나 경전(당시에 전해진 경전이나 후대의 변형된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바로 믿지 말고, ‘스스로 확인할 때까지 일단 버리지도 말고 받아들이지도 말라’는 것을 강조한 경이다.
정견 2016-07-10 13:06:47
답변  
정리 잘 해 주셨습니다.
비밀안장이 따로 없음을 몇번이고 확인시켜 주신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정신차리세요 2016-07-10 18:16:54
답변 삭제  
"비밀안장이 따로 없음"......


이런말은,
타종교인이나 초보자가 알수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헛소리그만 2016-07-10 17:49:03
답변  
닙바나를 완전한 죽음으로 여기는 자들==> 초기불교도들이죠.
미디어붓다의 초기불교도들의 열반==> 인간은 단백질 깡통, 자아가 없는 로봇,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심지어 열반은 체험할 수도 없다,고 까지 말합니다. 체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면 그것은 열반을 실체화한 것이기 때문이고 또 열반을 체험했다고 해도 체험한 자가 있을 수 없답니다. 열반을 체험한 자가 있다면 아직 '무아'가 된게 아니니까요. 또 열반은 제법무아의 적용을 받아서 실체가 없답니다.

정말 그래요? 석가모니 붓다는 체험할 수 없는 열반을 체험하라고,고 주장하신겁니까. 석가모니 붓다가 초기경에서 열반은 제법무아라서 실체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적이 있나요?

초기불교도들에 의하면 열반은 체험할 수도 없고 실체도 없고 인간은 자아가 없는 로봇이고(누가 조종하는거야? 그럼 수행하는 행위도 로봇처럼 한다는 것야?)...열반에 대해 온갖 망상을 다 늘어 놓고 열반을 체험할 수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고 또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자니까 열반을 추구해야 한대? 이게 무슨 막장개코미입니까. 부처님을 사기꾼으로 만들고

오죽 열반에 대한 이런 막장,개념놀음을 했으면 용수가 나와서 교통정리를 해댔을까요.

초기불교도들은 일부러 그러는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지 대승불교가 발생한 연유을 생깝니다. 아라한 불교가 실패한 사실을 부러 숨기거나 모른척 합니다. 초기불교의 실패를 인정하고 대승불교가 태동한 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들은 존립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승불교에 대해서 힌두교로 매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초기불교의 존립근거가 굳건해 지기 때문이죠.

미안하게도 모든 대승경전은 아라한 재교육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대승의 출발은 아라한불교의 실패가 원인이라는 거죠. 힌두교와 아무 관련도 없는데도 대승을 힌두교에서 유입한 것이라고 발악하는 이유는 아라한불교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라한들이 가진 열반관이 수행을 통한 체험과 거리고 멀고 그저 머리로 개념적으로 이해한 열반이었으며, 당시 아라한들이 얻었다는 열반이 미천하였고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과 너무 동떨어진 형편무인지경의 열반이었습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 시대로 되돌아가 가자는 운동입니다. 따라서 실패한 아라한 불교의 열반관을 뜯어 고쳐야만 했습니다. 교리적 다툼이나 이론에 치우친 불교가 아니라 실제수행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불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래,불성,진여,한마음,참나와 같은 대승식 열반표현은 실패한 아라한 불교의 열반관을 극복하자는 취지였지 '자아'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여래,불성,진여,한마음,참나라는 용어는 '자아'라는 허상, '가짜 나'에 대한 집착을 수행을 통해 끊어냈을 경우 드러나는 진리(열반)를 뜻하는 용어라고 대승경전에 다 나옵니다. 그러므로 대승이나 선불교의 진여,참나와 같은 용어를 자아와 결부시키고 자아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히 헛소리입니다.

대승에서 여래가 자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까?
대승에서 불성이 자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까?
대승에서 진여가 자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까?
대승에서 참나가 자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까?
대답은 모두 아니오,입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모두 기본적으로 아공을 가르칩니다.
대승은 법공까지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아가 소멸될 것이 두려워서' 참나를 고안해 냈다고요?
법공까지 가르치는 마당에 자아가 소멸될까 왜 두려워해요?
또 설령 두려워하는 자가 일부 있다손 칩시다.
허면 대승불교에서는 자아가 소멸될 것을 두려워하는 일부에게만 참나를 가르치면 효율적이고 간단할 것인데 어째서 모든 대승불자에게 그런 용어를 다 써요? 이 자체로 '자아 소멸될 것이 두려워 참나를 가르친다'라는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황당무계한 주장인지 다 드러나는 겁니다.

아공,법공까지 가르치는 게 대승불교인데 '자아 소멸'을 왜 두려워해요?
'자아소멸'이 두려웠다면 '아유, 법유' 사상을 가르쳤겠죠. 그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잖아요. '아유, 법유'를 가르쳐야 '유신견'이 되는거에요.
도반삼고싶네요 2016-07-10 18: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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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보살답게 명료하게 잘이해시켜주는군요.

저위에 식칼살해운운자는 뻥인가요?
차이는 2016-07-10 19:31:47
답변  
단답으로 한번 물어봅시다.
무아와 무상을 바탕을 하는 오온무아를 왜 님들은 오온개공으로 부르지요? 오온무아와 오온개공을 동일한 개념으로 봐도 된답니까?
인터넷상에서의예의라할까요 2016-07-11 09: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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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건
예의를 갖춰 가르쳐달라고 해야하지 않을지요?
왜냐하면, 나같으면 그냥은 절대 안가르쳐주거든요.
비방이수행은아닌데요 2016-07-11 12:5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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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없이, 늘 갇힌 다람쥐 체바퀴 돌 듯
계속하면 어찌될까요...?
식칼살해운운한분보세요 2016-07-11 09: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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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도 없는 이야기 왜 했나요?
님이 잘못알고 이야기 한건지?
아니면?

사과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잘못된 정보로 타인인생의 귀중한시간을
낭비하게 할수 있거든요.....
직접하세요 2016-07-11 12: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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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소환해서 재교육하는게 가능하면 직접하세요
엉뚱한소리한다 2016-07-11 12: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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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는 유마경의 등장인물이다.
등장인물이 다른 등장인물을 직접소환하냐? 머리가 어떻게 된건가.

허구의 소설 내용을 기준으로 역사를 까면?
소승==>대승이라는 역사가 없었냐?
그런 역사가 있었고 오늘날 소대승 지역이 있는거다.
대승경전 내용을 통해 당시 아라한을 유추하지 뭘로 유추할건데? 너는 어떤 방법으로 대승이 만들어졌고 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 팩트로 말해봐라
엉뚱한소리한다 2016-07-11 13: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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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유마경 작자라고 안했고
유마는 직접했답니까, 라고 했거든요?
말을 개똥같이 해 놓고 찰떡같이 못 알아먹든다고 남탓하네.

유마경 속편을 케릭터인 유마가 왜 쓰냐?
만화 아기공룡 둘리를 둘리가 직접 그리냐?
둘리가 직접 속편을 만드냐?

유마경 속편을 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리고 유마경 속편을 쓸 사람이 언젠가 미래에 있다고 치더라도 그 자에게 속편을 쓸때는 부처님을 초대하라,고 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전달해야하냐?

니가 먼 미래의 둘리 속편 쓸 사람한테 말해보렴
"둘리야 속편도 쓸거니?  속편 쓸거면 둘리 대신 고질라가 주인공이어야 해" 라고 ㅋㅋㅋㅋㅋㅋ

아마도 니 식구들이 너의 그런 인식에 배꼽빠지게 웃어줄꺼야 암.
글빨이상당히제비같군요 2016-07-11 13:3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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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이세상은 정보와 사유의 세상입니다.
이라크전쟁서도 보듯이,
잘못된정보로 인한 착각 일으킴은 전쟁도 일으킬정도로 중대한것입니다.
나라간도 그럴진대, 사람인생에 있어서도 잘못된정보로 착각신념 때문에 귀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쪽박차는신세는 어떠하겠어요?

맞으면 기고 아니면 말고식의 이런태도로 불교를 한다?

우리가 만드는 불교 이러면 안되지요.
잘못된 착각정보는 진정한 대승보살들이 바로세워야 합니다.
대표적인 착각정보 중 하나가 바로,

(1)입전수수가 사회참여라는 우스운 망상입니다.
그리고, (2)수처작주입처개진이 내가 주인이면 모든게 진리다 라는
어림도 없는 망상이구요.
(3)도교의 팔우도가 선불교의 십우도에서 첨가된것이다 라는
이런 엉터리 망상들입니다.

해석도 뜻도 근거도 모두 엉터리요,
증거도 없는, 착각망상들이지요.....

어떠세요?
님같은분들 그렇게 믿고 살아왔죠?
그렇게 믿고 살아온 시간동안 속은겁니다.

식칼운운이 이제 좀 제대로 보이는지.......
지나다가 2016-07-11 11:24:09
답변  
지나다 질문드립니다.
아라한 재교육 여부의 핵심 논쟁은 결국 아라한이 어떤 경지이며, 재교육대상이 되는지 여부에 달려 있군요.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분은 아라한을 자기수행만 즐기는 범부수준로 보는 것 같고,
 재교육이 왠말이냐를 주장을 하시는 분은 아라한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불교를 파괴하려는 음모의 비불교로 보는 것으로 보는데, 맞으신지요?

그렇다면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그 시점에 인도땅에는 어느정도의 아라한이 있었으며, 그들의 폐악질이나 비자비행위에 대한 비판은 주로 어떤 것들입니까?

여기서 저가 궁금한 것은  용수의 경지와 수준은 분명히 아라한 수준을 넘은 부처님 경지 이상으로 보는지, 그 이하로 보는지요?
쉬워요 2016-07-11 12:11:58
답변  
대승경전 내용을 살펴보면 알게됩니다.
반야심경에서 사리불 불러다 놓고 관자재보살이 어떤 식으로 일체고액을 벗어났는지를 설명하죠. 오온개공의 관점을 제시하고 공상의 입장에서 보면 초기불교의 모든 개념들이 부숴진다는 점,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그렇다면 당시의 아라한들은 교리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빠져서 빠졌다는 얘기며, 반야바라밀(공성에 대한 통찰,지혜) 수행이 부족했다는 의미가됩니다.

금강경을 볼까요.
수보리라는 아라한을 불러다 놓고 '보살도'를 가르칩니다. 아라한들은 열반에 안주한 케이스입니다. 이들에게 보살도를 행하라는 얘기는 열반안주 하지 말고 중생들을 위해 오온(색.수.상.행.식)을 다시 굴려야 한다는 소리죠. 오온을 굴리면 다시 탐진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어떻게 버린 오온인데 다시 보살도를 위해 오온을 굴리라 합니까,  아라한들은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야야 합니까,라는 걱정반 우려반으로 질문합니다.

그래서 응무소주이생기심하면 된다고 알려주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법상,비법상에 걸리지 않게 마음을 쓰면 그게 보살이고 마음 항복받는 것(오온을 굴려도 탐진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 보시를 하고 보시했다는 상을 가지게 되면 보살이 아니지만 보시를 하고 상을 가지지 않으면(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사용하면) 보살행 할 수 있게 되고,,,이런식으로 보살행을 하면 탐진치에 걸리지도 않고 아라한과를 잃어버리지도 않고, 항하수의 모래알 보다 더 많은 공덕을 쌓게된다는 점...

금강경내용을 역으로 유추해 보면 당시의 아라한들 수준이 나오죠?

유마경보면 유마힐에게 부처님 제자 모두 벌벌 떱니다.
제자들은 재가자인 유마에게 한 소리 들은 경험을 실토하면서 유마힐문병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죠. 유마는 시장통 한복판에서도 선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숲속 고요한 곳에서의 선정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싶다는 겁니다. 아라한들의 선정이란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교라는 것은, 혹은 깨달음이라는 것은 숲속에 있어서는 안되고 저자거리 , 중생들이 있는 곳에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연꽃(열반,깨달음,불교)은 진흙(중생,고통,사바세계)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게 유마의 관점입니다.

유마경의 내용을 통해 당시 아라한들은 중생구제에 별 관심이 없었고 숲속에서 선정락 위주의 삶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은 사리불을 소환해서 수기를 주고...그 유명한 화성의 비유를 통해 아라한과라는 경지는 전체 과정중에 1/2 정도에 해당한다, 아라한과에서 머물면 안되고 더 가야한다고 말하죠. 물론 더 가야할 길이 바로 보살도입니다.

그런데 초기불교도들은 대승경전 내용을 아예 안봐요. 대승경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아예 관심도 없어요. 그들은 그저 대승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원가르침을 버렸다, 돌아가신 아라한들을 재소환하여 가르치는 패륜을 저질렀다, 대승경전은 창작된 경전일 뿐이다......그런 입장만 고수합니다.
대승경전 내용을 읽고 왜 그런 경전이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하고, 대승경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불자는 필연적으로 당시 아라한불교의 폐단을 인정해야 하거든요. 그것은 또 죽기보다 싫겠죠. 아라한은 완벽하다고 믿어의심치 않고 살아왔는데 초기불교는 완벽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처님 사후 500년 무렵의 아라한 불교는 처참했다는 거...그걸 어찌 인정하겠어요. 인정하게 되면 대승불교를 긍정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벌는데 말입니다.
지나다가 2016-07-11 12:27:13
답변  
답변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최고경지인 아라한을 초월한 경지가 보살의 경지인가요?
보살=부처로 보아도 되는가요?
됩니다만 2016-07-11 13:10:50
답변  
대승에서는 보살=부처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보살도 등급이 있습니다.
1지보살~10지보살까지 10개 등급이 있느데 마지막 10지 보살이
퍼펙트한 부처님 경지입니다. 1지 보살은 제일 낮은 등급의 부처님이겠지요.

대승에서는 아라한과(1주 보살)- 1지 보살-2지보살....10지보살 이렇게 등급을 나눕니다. 아라한과는 대승 1주보살에 해당되고 선불교의 초견성단계에 해당됩니다. 선불교에서 견성했다(참나를 깨쳤다)는 단계는 대승에서도 가장 낮은 등급입니다. 선불교에서 이 견성단계를 마치 마지막 공부단계를 마친것처럼 포장하는 이유는 일단 견성을 하면 성품자리(참나)를 잃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보살로 윤회하면서 수행을 계속하여 종내에는 보살 10단계로 자동적으로 간다고 생각해서 초견성(아라한과)을 공부를 마쳤다,라고 높게 평가를 해 주는 것뿐. 실상은 견성후에도 점수수행을 통해 10지보살단계 퍼펙트한 부처님 경지까지 가야 합니다.

초기불교를 보면 아라한과 부처님의 수준차이가 매우 심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 스스로도 당신을 아라한과다 라고 말씀하시지만 다른 아라한들과는 격차가 매우 심하죠.  이런 격차 차이를 초기불교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석가모니께서는 과거에 공덕을 많이 쌓아서, 반면 아라한들은 전생 공덕쌓은게 없이 바로 아라한과를 얻어서 능력차이가 발생하는 거라고 말하죠.

하지만 언급한 10지 보살체계(화엄경)로 보면 명확히 설명됩니다. 아라한과는 대승 1주보살단계로 최하위 등급이고
10지 보살은 최 상위 등급입니다. 초기경 아라한들과 부처님의 경지차이를 대승에서는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따라서 깨달음(열반)을 얻었다고 해도 완전한 부처님 단계까지는 갈길이 멀다는게 대승의 입장입니다. 초기불교 아라한과는 대승에서 볼때 보살로 가기 전 시작단계에 불과합니다. 대승에서 아라한과를 얻으면 윤회가 끝났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요. 마지막 10보살 단계에 가야 윤회가 끝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견성후에도 보살로서 윤회하면서 중생구제를 해야 상위 보살레벨(부처레벨)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는 입장이죠. 왜 대승에서 열반안주(아라한)해 버리면 안된다고 하는지 그 이유도 여기서 나옵니다. 안주해 버리면 상위등급으로 진도 나가지 못하잖아요.
지나다가 2016-07-11 13:34:48
답변  
감사합니다.
아라한 위에 보살지위가 있다는 주장은 부처님 당시에 어떤 경전에 있었던 내용인지요?
 아니면 부처님 멸후에 후대 어떤 완성자가 새로이 첨가한 내용인가요?
첨가했다면 애초부터 전해지는 불교경전이 불완전해서 완벽하지 못한 부처님 말씀을 보완했다고 보면 될까요?
이만 2016-07-11 13: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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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 위에 보살지위가 있다는 주장이 어떻게 부처님 당시,경전에 나올 수가 있어요? 보살지위 체계는 대승불교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초기경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아라한과 부처님의 격차)을 대승에서는 설명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당연히 대승불교는 부처님 멸후에 생긴것입니다. 대승경전을 만든 사람이 새로이 첨가?한게 아니라  대승에서 아라한과를 보는 관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대승경전이 생긴 시기는 붓다 사후 500년 년경입니다. 이미 가르침이 변질되어 전승되고 있었습니다. 대승불교는 붓다의 원음시대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대승불교 태동시기의 아라한 불교가 원래줄기에서 많이 변절,왜곡 돼어 그것을 바로잡고 오류를 시정하는게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는 석가모니를 부정하는 불교가 아니라 석가모니 가르침이 불멸후 500년경 왜곡 변질,오염됐기 때문에 그 한계를 극복하여 붓다 원래의 가르침으로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아라한보다 보살이 강조된 이유는 석가모니 붓다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멈추지 않고 인도전역을 전법하며 중생구제한 행위(자비행)가 나오는 열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불멸후 500년경 무렵의 아라한들은 석가모니와 같은 자비행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대승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반드시 부처님과 같은 자비행이 나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불멸후 500년 경의 아라한들의 모습이 정상입니까 아니면 석가모니 붓다처럼 자비행이 나오는게 정상입니까.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후자일 겁니다.

대승에서 아라한을 반대한다고 하니 마치 석존시대의 아라한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고려치 않고 단순하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거죠. 요근래의 초기불교도 맹신자들처럼 말입니다.

다른 일 때문에 더는 댓글 못답니다.
망상은정도것 2016-07-11 13: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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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호잔이라는 분도 h학당을 언급하던데
당신같은 초기불교도들은 h학당에 무슨 노이로제 걸렸나요.
대승얘기하는데 왜 자꾸 h학당을 언급하는지 모르겠습니다.
h학당과 1도 관련없는 대승불자입니다.
당신들이 하도 언급해서 h학당을 검색해 보니 창립된지 12년 밖에 안됐군요. 저는 대승불자로 살아온지 25년이 넘어요.
저의 스승은 숭산스님과 법화경 권위자인 비구스님입니다(현존).
h학당 생기기 훨씬 이전 부터 대승불교를 공부한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h학당에 노이로제 걸릴 정도로 그 학당이 대단한지는 모르겠고 관심 1도 없습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는것 같은데 h학당 홍보는 당신들이 지금 다하고 있는 것 같네요.
안되면꼭무슨탓 2016-07-11 13: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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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도 없고, 근거도 없으면 항상 남탓 인가?
쉽단다 2016-07-11 14: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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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아무 방해도 안받고 참선하는게 뭐가 어렵냐?
시장 한복판에서 선정에 드는게 훨씬 어렵지.
숲속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는게 뭐가 어렵냐 무지 쉽지.
사람도 거의 없고, 싸울 일도 없고, 이익 충돌도 없고..
하지만 시장통에서는 시비이해가 극렬하게 대치하는 곳이라서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는게 숲속보다 훨씬 힘들지.
그래서 시장통에서 단련한 선정이 숲속에서 단련한 선정보다 뛰어나다는게 유마의 주장이며, 이 유마경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서 오늘날에도 유마경의 대대로 전승되는 것이란다.

산속 깊은 암자에서 선정수행 해 봐라
그리고 도시로 돌아와서 집에서 선정수행 해 봐라
산속 암자에서는 선정 방해하는 것이 없지만
집에서 선정하려고 하면 "계란이 왔어요~, 칼 갈아요, 세탁~~ 똑똑 교회에서 왔어요...고양이들 영역싸움,발정기 전쟁, 옆집 청력 떨어진 할아버지 텔레비전 소리에 건너집 가수 지망생의 기타소리와 돼지 멱따는 노랫소리에...개짖는 소리에...

도시 시장통에서의 선정이 훨씬 어렵고 도시에서 선정 잘 하는 사람은 숲속 선정 잘 하는 사람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수준차이가 발생한단다. 선정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대승이라고 반대하는..........

부처님의 선정과 지혜를 유마가 잘 계승한 거지 숲속 아라한들이 잘 계승한 거냐? 숲속 아라한 불교가 위대하다고 여긴다면 여기서 별 영양가 없는 댓글질 하지 말고 너부터 머리깍고 숲속아라한 불교를 해라 왜 초기경대로 출가하지 않고 있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기경 위대하다고 떠들면서 왜 출가 안하냐고.

또 h학당 거론하고 싶은거냐? 그거 거론하면 니말이 옳은게 되냐? 희안한 얘들이네 ㅎㅎ
댓글수준좀높이자 2016-07-11 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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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민중은 개돼지,,라는 얘기가 왜 나오죠?
혹세무민 운운은 또 뭐고. 아는 체, 잘난 체는 집식구들 앞에서 핫구요. 타인과 토론할 때는 하지 마세요. 되게 없어보여요.

숲속의 방해받지 않는 상황과 조건에서의 선정
도심의 많은 방해요소의 상황과 조건에서의 선정
두 선정중 어떤 선정수행이 더 어렵고 쉬운지는 어린애도 알 정도죠.
숲속에서 길러진 선정수행은 도심으로 나오면 얼마 버티지도 못해요. 대개 산속으로 들거가야만 도가 닦인다는 부류가 바로 소승적 성향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도심의 시끄러운 곳에서 선정이 안되니까 산속으로 자꾸 가려고 하는 거죠. 자기가 선정 못하는 것을 도심의 시끄러운 탓으로 돌리는 거죠.

유마의 말이 사실에 부합하냐 아니냐만 말하면 되는데
팔정도-계정혜 "선정-지혜"가 왜 나와요?
석가모니가 출가자중심주의를 표방했다는 것 모르세요?
승가의 위치가 세속 한복판입니까? 아닙니다. 마을과 떨어진 숲속입니다. 숲속에서 살다가 아침에 탁발하러 마을로 가는 겁니다. 석가모니의 초기불교는 숲속불교라는 별칭이 괜히 붙은게 아닙니다. 유마가 할 일없어서  숲속에서의 선정을 비판하고 도심속의 선정수행이 진짜라는 말을 한게 아닙니다. 나보다 더 초기불교가 뭔지 모른다니까.

윤회-사탕은 또 뭐야. 개인적인 망상은 일기장에나 쓰라고요.
소통하고 싶으면 공유된 언어를 써야지 지 혼자만의 개념이나 망상을 늘어놓으면 곤란하죠.

쉬운건쉰떡이라네... 따위의 재미도 없고 공감도 안되는 한심한 개그를 왜 하지? 치매걸렸다더니 아주 나이 많은 어르신인갑다. 쌍팔년도 개그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높이자 2016-07-11 17: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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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 불교는 숲속불교라고 했다. 마을과 떨어진 숲속에 살면서 매일 아침 마을(시장통,저자거리)로 탁발하러 간 것이다. 초기불교는 마을,사바세계를 떠나 출가주의다. 유마가 비판하는 것은 그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숲속 선정과 도심속 선정의 차이를 거론하면서 유마가 아라한들의 선정을 낮은 단계의 선정으로 깍아내린 취지도 출가중심주의가 잘 못됐다는 것이다. 중생의 아픔이 있는 현장(마을)에 불교가 있어야 하고 깨달은 자(아라한)도 마을에 있어야 하는데 왜 숲속에 있냐는 것이다.

초기불교가 출가중심주의, 탈세속주의라는 것은 초기불교도들도 다 아는 내용인데 너 혼자 초기불교는 숲속과 상관없고 세상속에서 변화의 대한 얘기라고? 유마경도 출가중심주의 반대, 탈세속주의 반대하는 내용이란다.

유마가 부처님을 비방한게 아니라 소위 아라한들이라는 작자들의 수준을 비판한 것이다. 뭘 좀 제대로 아시지. 아라한을 왜 인질로 잡냐? 유마가 아라한을 납치라도 했냐?

열반을 미디어붓다의 초불 맹신주의자처럼 죽여버렸기 때문에 진여,여래장등으로 살려놓은거고 먼 훗날 이것을 동북아시아의 선불교에서 참나로 이어받은 것이다.

대승교인들은 그저 윤회-사탕을 입에 문 벙어리 <= 이게 무슨 소리냐? 윤회는 뭐가 사탕은 또 뭐고 대승불자가 그걸 왜 물고 벙어리인지 설명을 해야 할거 아니냐. 미치광이 처럼 혼잣말 쓰지 말라고 했지? 개인적 망상은 일기장에 쓰라고.

선불교에서도 산 중 선정 되는 부분을 날 새워 비판해. 선불교도 대승불교인데 그걸 모르겠냐. 결재때 산중에 있고 해재때 산중을 나와 만행하는 이유다. 간화선만 알지 무시선,무차선은 모르지? 선불교는 세속을 버린 아라한 숲속불교가 되지 않는다.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여 숲속 선정만 하는 수준이니까 재가불자 유마한테도 까이는 거야.

유마가 아라한의 선정이 수준낮다고 깐게 유마경이다.
아라한이 유마의 선정이 낮다고 깐게 유마경이 아니고
유마경 내용도 모르는게 무슨 수준이 높은거냐? ㅎㅎ
높이자 2016-07-11 18: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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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불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사세요
누가 말려요, 다 자기 착각속에 사는게 인생인데
웃어야할지울어야할지 2016-07-11 17: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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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사탕, 너나 많이 드세요.

석가모니가 출가자중심주의, 탈세속주의 표방한 거 맞지?
그런데 왜 숲속불교 아니라고 잡아떼냐?
탈세속 해서 마을과 떨어진 숲에서 머리깍은 출가자들끼리만 사는 공동체를 만들었잖아. 머리깍은 자들이 선정 어디서 했겠니? 도심,마을에서 했겠니 숲속에서 했겠니?

유마가 출가자 중심주의,탈세속주의 이 자체를 비판한게 아니야.
불멸후 500년 경의 아라한 숲속불교는 출가자중심주의와 탈세속주의에 권위를 부여했지. 이부분을 유마가 비판한거야. 소위 중생구제라른 석가모니의 위대한 실천은 비록 석가모니가 숲속에서 살았어도 실천했던 덕목인데 후대 500년경의 아라한은 안했다. 석가모니는 숲속 선정에 대해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불멸후 500년 무렵의 아라한들은 자신들의 선정이 최고라고 자만에 빠져 있었다. 불교에서는 선정을 잘하는 것이 불교를 잘하거나 부처님말씀을 잘 따른다고 말하지 않았다. 선정은 왜 하는 거냐?  아라한은 열반,해탈을 위해 한다. 보살은 선정을 통해 보시.지계.인욕.선정,정진.지혜라는 진리의 다양한 양상을 깨어나게 하기 위해 선정을 한다. 그리고 그 선정은 필연적으로 중생구제로 향한다. 부처님이 중생구제를 하셨넌 것처럼. 그러므로 유마의 선정 이유와 불멸후 500년 무렵의 아라한의 선정 이유가 질적,양적으로 매우 다르다.

부처님 말씀 안듣고 재가의 구들방에서 살 생각만? 아침에 남겨둔 누룽지 땜에? 저녁에 만나야 될 마누라와 새끼들 땜에? 너는 지금 무슨 얘기하고 있는 줄도 모르냐? 유마가 유마경에서 출가하지 말라 하디? 숲속보다 구들방에서 살자는게 유마경의 취지냐. 마누라 땜에 출가하지 못한다고 말하는게 유마경의 내용이냐?

넌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 생각도 아예 안하는구나.
출가중심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재가자가 출가못하는 점을 비난하고 탈세속주의를 말하면 불교는 세속에서의 변화를 말하는 거라고 우기고......쪽팔려서 너랑 얘기 못하겠다ㅋㅋ 니가 출가하지 못한이유가 재가의 구들방에서 살고 싶어서, 아침에 남겨둔 누룽지 때문이었고, 저녁에 만나야할 마누라와 새끼들 때문이었구나 ㅋㅋㅋ

석가모니의 출가자중심주의(이 말은 재가자는 깨달을 수 없다는 관점이 깔려 있는 말이야)를 인정하는 자가 왜 출가를 못하고 있나 했더니 소박한 이유가 있었구나. 유마난 출가하고 말고는 깨닫는 거랑 크게 상관관계 없다는 입장이다. 숲속 아라한 불교만 해야 선정에 이르고 깨달을 수 있다는 주장에 단호히 반대하는 거다.

너처럼 출가하지 못한 자들에게 유마거사가 큰 희망을 주고 있느데도 유마를 까대고 숲속 아라한불교에 권위를 부여하는 재가불자도 있구나. 자기가 어디 소속인지도 모르고.
기운내 2016-07-12 08: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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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거사 앞에서 절망하는 재가 초기불자,라고 해야 맞지.
출가중심주의가 옳다면 출가해야지
출가 안하고도 출가자보다 뛰어난 유마를 비난하고
재가자 보다 못한 출가자 편애를 하자니 힘에 부쳐 횡설수설..무더위에 고생이 많구나
머리사용하래미치긋다 2016-07-12 10: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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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국회의원이 왜 나와?

대통령,국회의원은 선거로 선출하는 제도
출가,스님되는게 투표로 결정되냐?

좀 이상한게 아니라 많이 이상하다.
머리사용은 니가 해야지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출가자중심주의는 출가해야만 아라한되고 부처가 될수있다는 얘기야. 초기불교 경전은 재가자용이 아니라 철저하게 출가하 비구들을 위해 설해진 것이야. 일반재가자들한테 부처님이 교리위주의 설법을 했는 줄 아냐. 재가자들한테는 착하게 살아라, 악하게 살면 과보받는다는 수준의 윤리,도덕 위주로 설법했어. 니가 정말 초기불교와 초기불교 경전을 우러러 보고 부처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게 맞다면 출가해야 맞는거라고. 너같은 일반재가자한테 부처님이 경전보라는 얘기 안했어.  테라와다에서 재가자가 아라한되는 경우 있냐? 없어. 초기경 샅샅히 뒤져봐라 재가자가  아라한이 된 케이스가 있는지. 이게 초기불교가 출가자중심주의라는거야. 훗날 출가자특권주의로 망가졌고 이에 대해 유마경이 통렬하게 비판한것이란다.

반드시 출가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는 출가자중심주의가 틀렸다, 재가자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 굳이 머리깍고 출가할 필요가 없다....초기불교도인 니가 깨닫고 싶으면 출가해야만 하고 출가 안했으면 초기경 공부하지 마라, 그것은 비구용이지 재가자용 아니다.

출가 안해도 불교공부 하고 싶다고? 깨닫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럼 대승경전 공부해야지. 대승은 깨닫는데 있어 출가가 필수조건이 아니야.

닭대가리 수준이 아니라면 출가중심주의가 뭘 뜻하고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지.

우리나라가 대통령중심제니까 온 국민이 대통령 되어야 하고, 국회의원이 대의제인줄도 모르고 의회중심제이니 온 국민이 국회의원이 되야 한다는 발상은 참 기가막히고 코가막힐 지경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휴 내가 말을 말어야지, 차라리 벽보고 대화를 하는게 낫겠다 ㅍㅍㅍ
충격먹었군 2016-07-12 11:5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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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반공표어,수령,울릉도엿,두발자유화 이런 단어를 구사하시는 걸로 봐선 연식이 장난이구나.

아이고 할아버지 생판 어린놈이 몰라뵈서 죄송허구만유.

손주랑 놀던지 경로당에서 할마시들하고 꽁냥꽁냥 연애하시지 뭔 익숙치도 않은 넷질을 하시고 젊은 것들한테 무식하단 소리 들어먹어 가며 고생하신대유
경로우대에 입각혀서 더는 못 놀아 드리네유
무식허다고 놀려먹은거 사죄합니더 넙쭉~
중도타워검색하다가 2016-07-11 12:28:13
답변  
동국산업 회장님이 홍익학당 대표를 초청하였군요.
유마힐이라는 별명을 가지신 회장님이 중도타워에서 대승불교에 대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같네요. 경주분들 복도 많은 것 같습니다.
복이많은지적은지는잘모르겠지만요 2016-07-11 13: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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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도타원가 뭔가에서, 공개토론 좀 하면 좋겠네요.
불교 수준 좀 높이게 말이죠......

이게뭡니까?

논리도 근거도 없이 친설친설........
공개토론이필요한이유죠 2016-07-11 13:48:29
답변  
(1)입전수수가 사회참여?
(2)수처작주입처개진이 내가 주인이면 모든게 진리다?
(3)도교의 팔우도가 선불교의 십우도에서 첨가된것이다?

이런게 여러분들의 귀중한 시간을 소진하게 하는 착각신념들이죠......
각설이냐 2016-07-11 14:04:12
답변  
작년에 왔던 각설이 또 나왔네.
병원가서 치료받아요.
1)입전수수가 사회참여인지 아닌지는 댓글의 주제가 아닙니다.
2)수처작주입처개진도 마찬가지, 아무도 관심없거든요.
그리고 수처작주입처개진의 뜻이 '내가 주인이면 모든게 진리다'라는 뜻도 아닙니다.
3)도교의 팔우도가 선불교의 십우도에서 첨가된것이다? 말이 되요?
선불교의 십우도의 기원은 도교의 팔마도이다. 도교의 8개 그림에다가 곽암선사가 2개 그림을 붙여 10우도라 하였다,가 바른 정보입니다.

당신은 문장을 완벽하게 만들지 못할 정도로 정신에 문제가 많아요.
치료부터 받으세요 부디
이분은뻑하면정신병원이야기군 2016-07-11 16:37:59
답변  
님이 ㄷㅇ이란분이요?
이자도미친듯 2016-07-11 17: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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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런얘기 뜬금없이 꺼내는 자에게 뭐라고 해야 하죠?
정신병원 외엔 생각이 안나는군요.
지금 이 순간에 제가 당신에게
"신 나치즘에 대해 공개토론합니다"라고 멘트 날리면 당신은 제게 뭐라고 할겁니까. 아마도( 이놈 미친사람이가 할겁니다)
ㄷㅇ은 뭐죠? ㄷㅇ이라고 얘기하면 제가 알아 듣는다고 생각하세요?
원효 2016-07-12 00:37:28
삭제  
소승맹신각설이
정신병원 2016-07-12 17: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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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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