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구한말 화엄교학 대강백 재조명

최승천 기자 | hgcsc@hanmail.net | 2016-06-17 (금) 18:41

<화엄종주 경운원기 대선사 산고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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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원기(擎雲元奇) 선사(1852-1936)는 구한 말 조계산 선암사에서 침명-함명-경붕-경운으로 이어지는 대강백이다. 경운은 문하에 많은 강사를 배출했다. 금봉, 석전, 진응 등이 세상에 알려졌으나 석전만이 후사를 이어 나중에 운허를 배출했고, 나머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선후기-대한제국-일제시기에서 화엄교학의 풍몰을 알기 위해서는 경운원기의 교학사상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

 

<화엄종주 경운원기 대선사 산고집>(도서출판 중도)이 출간됐다. 선암사에 있는 경운원기대선사문손회(공동문장 홍파 스님, 사무총장 호명 스님))가 연세대 신규탁 교수에게 의뢰해 만든 책이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책의 제1부는 ‘경운원기 대선사 행장’이다. 경운 스님의 손자 상좌인 철운 조종현 스님이 쓴 경운 선사의 이력과 위당 정인보와 석전 박한영이 쓴 경운 선사의 비석이 소개돼 있다. 이어 범해 각안(1820-1896)이 쓴 <동사열전>에 실린 경원 선사의 기문이 실려 있다.

 

제2부는 ‘경운원기 대선사 유고’인데, 스님이 직접 지은 시, 게송, 서간문, 기, 문, 화, 화제, 영찬, 서판 등이 원문과 함께 우리말로 번역돼 실려 있다.

 

제3부는 ‘경운 대선사를 기념하는 문인들의 글’이다. 육당 최남선, 운양 김윤식, 하정 여규형, 선각 권중현, 퇴경 권상로, 매천 황현, 구하 선사, 남전 선사, 경호 선사, 일우 선사, 금봉 강백 등 당대의 지식인과 고승의 글이 모아져 있다.

 

제4부는 ‘경운원기 선사 유고 영인본’이다. <견문록>, <견문록초>를 영인했다. 이 자료는 경운 선사가 당시 조선 전국의 명산대찰과 고적을 유람하면서 선인(先人)들의 글을 옮겨 적은 것으로 자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책 앞부분에는 귀중한 각종 사진 자료들을 모았다. 선암사박물관에 소장된 <조계산 선암사 대각국사 중창건도기>, <주장자에 새겨진 경운 대선사의 법어>, <석옥청공 산거시에 차운한 시판>, 고종의 전용 사진사가 찍은 <경운 선사의 진영>, <진영과 영찬>, 침명-함명-경붕 등 선암사 4대 강주들의 <진영과 영찬>, 고종황제가 내린 <쌍룡 문양의 금란 가사>, <금니 법화경 사경>, <80권본 화엄경 사경>, <선암사 비림 전경>, 선사가 주석했던 <선암사 대승암 전경>, 쇄락한 <비로암 전경>, <화엄십지품 게송을 요약한 10폭 병풍>, <10폭의 화첩>, 조선불교선교양종의 교정으로 추대하는 <망첩>, <경운 선사의 비석 사진> 등이 실려 있다.

 

책 뒷부분에는 태고종의 원로 큰스님이자 전 선암사 주지였던 지허 스님(현 금둔사 주지)의 추모의 글을 실었다.  


 

■ 신규탁 교수가 보는 경운원기 선사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요, 문장가요, 수행인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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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교학 연구 전통은 현수법장-청량징관-규봉종밀에 의해 ‘화엄종’으로 뒷날 불교사에 평가되고 있다. 이런 전통은 한반도 불교계에도 들어와 여러 종파의 하나로 이어져왔다. 고려 때는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로 유학하여 장수자선-진수정원의 화엄교학을 계승했고,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교 양종 체제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화엄종은 교종의 유일한 대표가 되었다.

 

임란 이후 전라도 앞 바다 임자도에 대장경을 실은 배가 조난되어 그로부터 화엄종 관계 책들이 쏟아지자, 그것을 수집하여 당시 선암사에 계시던 백암성총(1631-1700) 스님이 인쇄 보급 강의하셨다. 그 뒤를 선암사의 상월새봉 스님이 이어, 연담유일, 용담조관 등 유명한 화엄 강사를 배출했다. 또 선암사로 출가한 묵암최눌 스님이 종풍을 날렸고 침명한성 스님이 그 뒤를 이어, 마침내 침명한성-함명태선-경붕익운-경운원기로 이어지는 ‘선암사 4대 강맥’을 형성하였다.

 

한편 고창 선운사와 순창 구암사에서는 설파상언, 백파긍선, 설두유형 등 큰 학승들이 이어졌다. 여기에 또 대흥사의 고승들이 대를 이었고, 인악의첨 강백도 보태졌다.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문중이나 산문에 걸림 없이 뛰어난 방장과 좌주를 모셨을 뿐 파벌은 없었다. 설혹 학문적 견해를 달리할 수는 있어도 서로를 존중했다. 구한말과 일제 당시는 경운원기(擎雲元奇; 1852-1936) 스님을 북극성 삼아 뭇별들이 돌았다. 그 분의 강의실에서 배출된 제자들 중에 뒷날 이름을 날린 인물 중의 한 분이 구암사 사문 석전 박한영 스님이시다.

 

봉건왕조의 몰락, 일제의 강점, 서양 종교의 극성, 급조승의 횡행, 한문 식자들의 감소, 등등으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요, 문장가요, 수행인이셨던 경운 스님은 역사에만 남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운 스님은 당대에도 존경을 받던 분이셨다. 그 분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비석이 만들어지자 위당선생 정인보가 글을 짓고, 위창거사 오세창이 글씨를 쓴다. 음기는 수학 제자 석전 박한영이 쓴다.

 

필자가 마음에 품는 비석이 셋 있는 데, 첫째는 왕희지 글씨를 모아 새긴 삼국유사의 주인 일연 스님 인각사비인데 달아 없어져 그저 아쉬움으로만 간직하고 있고, 둘째는 추사대감이 짓고 쓴 선운사 백파긍선 스님 비석으로 그 탑본을 연세대 연구실에서 우러르고 있고, 셋째가 바로 경운 스님의 비석인데 이렇게 유고집을 만들어 장서가들의 서가 올려드린다.

 

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안연위연탄왈: "앙지미고, 찬지미견, 첨지재전, 홀언재후.")

 

우러러 볼수록 높기만 하고,
파고들수록 더욱 단단하기만 하다
바라보면 앞에 계신가 싶더니
홀연히 뒤에서 채찍질 하고 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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