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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없애주기 위해 오신 분”

진흙속의연꽃 | | 2016-05-12 (목) 20:50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76- 붓다의 측은지심(惻隱之心)

“도선사마애불의 형용할 수 없는 안쓰러운 표정은 대자비의 표현”
 
 
도선사마애불을 보고

 

도선사에 가면 마애불이 있다. 이를 도선사석불이라 한다. 처음 이 불상을 보았을 때 ‘울컥’했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기 전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을 때이다.

 

북한산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들른 도선사에서 마애불을 접하였을 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 그 때 당시 처지를 비관하였기 때문이다. 마애불을 보는 순간 마치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듯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마애불에 대한 이야기를 ‘도선사 석불(石佛), 그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2007-10-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2007년 당시 올린 글에서 마애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석불의 상호에서 보는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천 년 전에도 생로병사로 고통 속에 헤매다 간 사람이 있었듯이 역시 천 년 후에도 생로병사의 화두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은 앞으로 천년도 더 넘게 중생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이곳 참회도량에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석불을 바라보면서 참회의 절을 계속 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진흙속의연꽃, 도선사 석불(石佛), 그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 2007-10-11)


9년 전 올린 글에서 마애불에 대하여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이라 했다. 실제로 마애불을 보면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중생들이 겪는 고통에 대하여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 한다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된다.

 

서울 우이동 도선사 마애석불.

절에 가면 여러 가지 형상을 한 불상을 볼 수 있다. 명상속의 부처님상도 있고 눈을 반개한 불상도 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애로운 부처님상도 있다. 또한 화려한 보관과 천의, 그리고 진귀한 목걸이를 한 보살상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쓰러운 모습의 불상을 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도선사 마애불은 매우 독특한 것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측은지심이란 무엇일까? 단지 불쌍해 보이는 마음일까? 사전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本性)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이른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측은지심이란 인간의 본성으로서 불행한 자에 대하여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라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행복과 불행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지금 행복하지만 어느 순간 불행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지금 불행한자는 이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사람 사는 곳에서 행복과 불행만 다반사로 일어날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행불을 포함하여 여덟 가지가 다반사로 일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개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재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A8.6) 라고 말씀 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행복과 불행이 번갈아 일어나고, 또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로 살아간다. 이것이 뭇삶들의 모습이다.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측은지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도선언을 했다.

 

부처님의 전도 선언문을 보면 “세상을 불쌍히 여겨(lokānukampāya)”(S4.5) 라는 말을 볼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뭇삶들이 한 없이 측은하게 보인 것이다. 이는 “그때 세존께서는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S6.1) 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다양한 중생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알려 주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대승보살사상이라 본다.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을 불쌍하게 보았다. 그래서 진리를 알려 주고자 했다. 제자가 60명가량 되었을 때 전도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부처님은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고 했다. 여기서 안락은 ‘수카(sukha)’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행복’이라 말한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

 

부처님은 고통 받는 자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세세생생 윤회하며 사는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란 것이다. 이는 사함빠띠가 부처님에게 “과거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미래의 올바로 깨달은 님, 현재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없애주네.”(S6.2) 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슬픔을 없애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한 분만 출현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무수한 부처님이 출현하였다. 경전에서는 디빵까라붓다(연등불)이후 고따마붓다에 이르기 까지 과고 25불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 연등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보살로서 삶을 살 때 수기를 준 부처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옛날의 부처님은 ‘과거칠불(過去七佛)’이다. 

 

디가니까야와 상윳따니까야에 과거 일곱 분의 부처님 이야기가 있다. 이를 과거칠불이라 하는데 이는 위빠시(Vipassī, 91겁전)붓다, 시키(Sikhī, 31겁전)붓다, 웻사부(Vessabhū, 31겁전)붓다, 까꾸산다(Kakusandha, 현겁)붓다, 꼬나가마나(Koṇāgamana, 현겁) 붓다, 깟사빠(Kassapa, 현겁) 붓다, 고따마(Gautama, 현겁) 붓다 이렇게 일곱 분의 과거 부처님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붓다가 출현 하는 것일까? 붓다가 출현하여 다시 법을 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연기법이 변질되어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연기법은 붓다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보편적 원리로 이미 확정 되어 있는 것이다.
 
보편적 원리인 연기법이 제대로 전승 되었다면 또 다시 붓다가 출현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붓다가 출현한다는 것은 과거 붓다가 깨달았던 진리가 더 이상 전승되지 않고 도중에 끊어진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의 실종이다. 연기법이 변질 되어 사라진 것이다.

 

붓다가 출현하여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극히 짧다고 한다. 공백 기간은 한량없이 길고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짧기 때문에 영겁의 시간 속에서 본다면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하나의 깜박임에 지나지 않는다.
 
정법이 사라진 후 암흑과 같은 한량없는 오랜 시간 후에 마침내 붓다가 출현한다. 과거 붓다가 발견하였던 똑 같은 방법으로 연기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법을 펴고 그 법은 전승된다. 그러다가 연기법이 변질된다. 변질된 법은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다음 붓다가 출현 할 때 까지 암흑의 시대가 계속된다. 이러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붓다가 출현한다. 마치 맹구우목의 비유처럼 붓다가 출현하는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라 한다. 

 

청정한 삶(brahmacariya)

 

과거의 부처님들이 한 결 같이 말한 것이 있다. 이를 칠불통계게 한다. 이는 법구경에서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 (Dhp183) 라고 표현 되어 있다.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전도 선언문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S4.5) 로 표현된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삶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청정한 삶으로 귀결된다. 청정한 삶이야말로 모든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과거 출현한 부처님들이 한 결 같이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Dhp183) 이라 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없애주네” (S6.2) 라 했다.

 

최상자로서 부처님

 

부처님은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여 ‘불사(不死)’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탄생게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의 탄생게와 북방대승불교의 탄생게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다른가?

 

우리나라 불자치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풀이 하면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 구절이 더 있다. 이는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문구이다. 이 말은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한자어 ‘안(安)’자를 행복이라 번역할 수 있다.

 

대승의 탄생게를 보면 초월적이고 신격화된 부처님을 연상케 한다. 세상의 구원자로서의 이미지이다. 이는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문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빠알리 탄생게를 보면 이와 다르다. 디가니까야에 실려 있는 탄생게를 보면 다음과 같다.


Dhammatā esā bhikkhave. Sampatijāto bodhisatto samehi pādehi patiṭṭhahitvā uttarābhimukho1 satta padavītihāre  gacchati setamhi chatte anuhīramāne , sabbā ca disā anuviloketi , āsahiñca vācambhāsati: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Ayamettha dhammat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원리가 있다.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단단하게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북쪽으로 일곱 발을 내딛고 흰 양산에 둘러싸여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이 경우의 원리인 것이다.
 
(Mahāpadāna Sutta-비유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4, 전재성님역)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최상자로서 당당한 사자후를 볼 수 있다. 비록 신화적이지만 태어나자 마자 일곱 걸음을 떼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처럼 최상자로서 부처님은 율장 ‘웨란자의 이야기’에서 “바라문이여,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A8.11) 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부처님은 태어나자 최상자라 선언했다.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예견한 것이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정등각자로서 부처님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스승이 없다고 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나서 오비구를 찾아 나설 때 우빠까에게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M26)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정득각자로서 부처님에게 스승은 없다. 그래서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고 천상과 인간의 세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네.” (M26) 라 했다. 이처럼 최상자로서 부처님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라고 일곱 걸음을 떼자 마자 당당하게 선언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은 최상자로서 부처님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

 

대승에서 최상자로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말하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구는 ‘삼계개고아당안지’라 하여 빠알리탄생게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되어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바로 이런 차이가 대승과 테라와다를 분명하게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한 듯 하다.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아라한송으로 되어 있다. 청정한 삶을 실천하여 마침내 모든 오염원이 소멸 되어 있을 때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 때 스스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문은 정형구로서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돤더.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될 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이를 아라한의 오도송, 또는 아라한송이라 한다.

 

최상자로서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승탄생게처럼 모든 중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매우 구체적이다. 그것은 해탈과 열반이다. 오온이 생멸하는 윤회의 삶에서 해탈과 열반의 불사의 삶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측은지심의 도선사마애불

 

가장 큰 어른으로서 부처님은 자비롭다.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관용과 자애와 지혜뿐이다.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욕망으로 분노로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는 뭇삶의 모습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도선사 마애불의 모습을 보면 형용할 수 없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으로 살아간다. 욕망과 분노의 어리석음의 삶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괴로움과 슬픔을 겪는다. 과거 뭇삶도 그랬고 현재 뭇삶도 그렇고 미래 뭇삶도 그럴 것이다. 이런 삶의 모습을 알기에 부처님은 전도선언을 했다. 그런 부처님의 마음이 잘 표현 된 것이 도선사마애불이라 본다.

 

도선사마애불을 보면 형용할 수 없는 안쓰러운 표정이다. 그래서일까 삶에 지친 자들이 오늘도 내일도 그곳에 앉아 기도를 한다. 그런 도선사마애불은 뭇삶에 대한 측은지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 도선사마애불을 처음 보았을 때 울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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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무상상 2016-05-13 12:30:28
답변  
과거에는 줄기차게 해탈만 이야기하더니만 이제는 "해탈과 열반"이라고 정확하게 글을 쓰고 있어서 과거의 잘못된 글에 대해서 지적하고 가르친 보람이 있습니다. 다시말하지만 해탈하고 열반 합니다. ㅎㅎ 해탈 = 열반이 아닙니다. 해탈은 외도등 타종교인이든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탈은 불교 고유의 것도 아니고 이미 불교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인도수행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해탈한다고 모두다 열반을 획득하는게 아닙니다. 해탈하고 열반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불교적 수행을 해야 합니다.

해탈 = 족쇄에서 풀려나다
열반 = 불이 꺼진 상태

불교에서는 해탈을 8해탈이라고 하여 초선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 나열을 합니다. 쉽게 말해서 해탈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탈을 지나서 비로서 열반을 획득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뒤섞어 사용하고 같은 개념으로 혼동도 많이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불교는 해탈을 뛰어넘어 또다른 경계인 절대적인 평화/행복의 경지인 열반이라는 또다른 세계를 설파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불교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확립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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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는 "사무량심(자비희사)"을 이야기 합니다. 사무량심의 개념은 초기불교가 한국에 전파되기 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교리입니다. 이러한 자비희사의 마음을 사방팔방 아래위로 널리 보내는 수행이 자비행수행이라고 하여 수행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대신에 "사홍서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붓다의 삼대서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생들이여, 행복하라 편안하라 안녕하라.." 제가 듣기로는 성철스님께서도 말년에는 아침에 처음하신 일이 절을 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서원을 널리 널리 퍼져나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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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한국불교에서는 열사람이면 열사람마다 각자 수준에 맞게끔 해석하는 것을 봤습니다만... 이 말은 글자그대로 "내가 세상에서 최고이다"라는 말입니다. 붓다라는 분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나요? 붓다보다 위대한 사람이 있나요? 없죠.. 그러니 유아독존인 것입니다.
그닥 2016-05-13 14: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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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족쇄에서 풀려나다,라고 했을 때 족쇄가 '윤회'를 뜻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당신이 살아생전에 열반을 얻었다고 해도 아직 육체라는 굴레가 남아있다면 아직 윤회의 사슬(족쇄)로 부터 벗어난게 아닙니다.  이경우는 생전에 열반을 얻은후 사후에 완전히 윤회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해탈하여 법계로 사라지는 것이니 열반이후 궁극의 해탈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의 의미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해탈이 열반이전이 될 수도 있고 열반 이후에도 쓰여질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탐진치가 사라진게 열반이지만 탐진치의 족쇄로 부터 벗어난 것 또한 열반이므로 이경우는 열반과 해탈을 동의어로 써도 됩니다. 당신의 기준만 맞는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색즉시공 2016-05-14 21: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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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붓다 담당자님 ! 이다윈이라는 작자가 욕을 해도 가만놔두는 이유가 뭡니까?  여기 댓글수준을 한없이 추락시키고, 반말찌꺼리에, 쌍욕 하는 이런 정신병자같은 인간은 불자도 아니고, 재가자도 아닌 사이비불자에다, 댓글을 읽어봐도 당최 무슨소리하는지...주제도 없고 핵심도 없습니다 .건의하건데....이다윈이라는작자를 영구히 삭제퇴출시키세요!!! 우리모든 불자들의 바램입니다. 이작자의 출현은 매우 불퀘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작자를 방치하는 이유가 뭔가요?
반야 2016-05-15 19:30:25
삭제  
다원님 말씀대로라면 진흙속의연꽃님도 얼굴 까고 대승불교 비판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일관성 있죠.
이상하네 2016-05-16 00:41:00
삭제  
내가 원하는 증거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말도 안되는 답을 하냐?
사바하 2016-05-16 01:13:43
삭제  
다원씨가 색즉시공님에게 얼굴 까라고 했는데 얼굴 까는 건 연꽃님이 가장 싫어하는 겁니다.
다원씨가 연꽃님에게도 공평하게 얼굴 까라고 할수 없으면 색즉시공님에게도 얼굴 까라고 하는 건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애초에 넷상에서 상대보고 얼굴 까라고 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무유정법 2016-05-13 15: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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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누구라도 이 네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사념처)을 7년 동안 정확한 방법으로 수행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실 중 한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 생에서 최상의(아라한) 지혜를 얻거나, 또는 오온의 토대가 얼마간 남아있다면

아나함(불환과)의 단계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7년이 아니어도 좋다.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6년간 정확한 방법으로 수행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실 중 한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 생에서 최상의 지혜를 얻거나, 오온의 토대가 얼마간 남아있다면

아나함의 단계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6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5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4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3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2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1년이 아니어도 좋다. 누구라도 이 사념처를 7개월간 정확한 방법으로 수행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실 중 한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 생에서 최상의 지혜를 얻거나,

오온의 토대가 얼마간 남아있다면 아나함의 단계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7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6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5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4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3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2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보름이 아니어도 좋다.

누구라도 이 사념처를 7일간 정확한 방법으로 수행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실 중 한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 생에서 최상의 지혜를 얻거나,

오온의 토대가 얼마간 남아 있다면 아나함의 단계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이자 유일한 길로서,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며, 괴로움과 고통을 소멸시키게 하고,

​진리의 길을 얻게 하며 그리고 열반을 직접 체득하게 하는 길이다.

​바로 이것이 네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四念處)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참나 2016-05-13 15:53:36
답변 삭제  
북한산를 사랑하고 주변 사찰을 두루 다녔던 불자로서 말하자면 도선사 마애불이 불자나 일반인들에게 있기가 있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안스러운 표정' 때문이 아니라 소위 기도발이 잘 통한다, 영험하다는 소문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대입수능 학부모들, 고시공부하는 자식을 둔 부모들, 가족중 암등 치유가 힘든 병을 얻은 사람들, 사업하는 사람들 등이 끊이질 않고 모여드는 곳 중 하나입니다.  평범한 소시민들은 법당의 불상보다는 눈,비,바람에 노출된 집밖의 불상에 친근함을 느끼고 선호해 왔죠.

우리민족의 미학은 불상의 얼굴에 두가지 측면을 담는것입니다. 하나는 미소, 다른 하나는 찡그림인데 미소는 웃으려는 의도는 아니고 열반에서 우러나오는 내적인 평화,평안,이완이 밖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중생들이 보기에 부처님이 미소를 짓는다고 여기는 것일 뿐 사람들이 아는 미소는 아닙니다. 찡그림은 중생의 고통에 감응하고 있는 것 맞습니다.

전국각지에 유명하다는 마애상들이 많이 있지만 그리고 특징도 제 각각이지만 영험하지 않는 마애불에는 사람들이 많이 가질 않습니다. 도선사, 팔공산 갓바위 등은 서울, 대구라는 대도시를 조건으로 하고 예로부터 영험하다는 곳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을 뿐, 사람들은 마애불의 표정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석굴암 부처님은 표정이 웅장하고 압도적이고 월정사 약왕보살상은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표정인데도 인기가 무지 많습니다. 다만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격리조치 되는 바람에..

대승을 불교로 인정하지 않는 분이 대표적인 대승사찰인 도선사의 마애불을 언급하니 이게 참 적응이 안됩니다. 도선사의 마애불은 초기불교적 시각에 따르면 입시, 각종 시험,승진,사업,질병등 인간의 욕망이 다 모여서 돌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초기불교도들이 날선 비판을 해대는 이른 바 힌두교식 불교의 절정이 아닙니까. 부처님 오신날이 되니 대승불교라는 탈을 쓰고 힌두교식 불교하는 도선사의 마애불이 비판의 대상이 아닌 애정의 대상이 되었군요. 대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셨는지 걱정입니다.

필자께선 측은지심이라는 유교덕목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게 본성관입니다. 님이 비판해 마지 않았던 대승과 선불교의 가르침이 본성관에 입각해서 펼쳐진 것입니다. 측은지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은 인정하면서 대승(선)의 본성은 왜 인정하지 않습니까. 대승의 본성은 바로 6바라밀입니다. 유교의 덕목(인-측은지심, 의-수오지심, 예-사양지심, 지-시비지심)과 보시,지계,인욕,선정,정진,지혜라는 본성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유교에선 인간에겐 탐욕말고도 보물같은 본성(성품)이 있어서 이걸 개발해 줘야 인격이 완성되고 세상이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선 인간의 번뇌와 탐진치라는 무명,업장을 수행을 통해 녹여 내면 6바라밀이라는 공덕상이 그대로 발현된다 하고 그게 부처(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대승불교를 비판(비방?)할때는 본성관을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부정하시더니 오늘은 유교의 교리를 들어 본성관을 통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자의 본성이 바로 측은지심이고 이는 중생을 돕겠다는 자비심이라면서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언급한 오늘 글이 사실상 당신의 지난 글과 입장이 180도 달라지는 글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초기불교의 현상관으로 대승(선)불교를 무아의 가르침을 위배한다면서 비불로 매도한 글 말입니다. 그 기억이 아직도 머리에 생생한데 오늘은 180도 돌변해서 본성관을 인정해 버리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측은지심이 인간의 본성이자 깨달은자의 성품이 된다면 본성,불성이 있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님의 오늘 주장은 무아의 가르침에 어떻게 위배가 안되는 것입니까?

미붓에 오는 독자들은 모두 아시다시피 필자께선 대승의 상.락.아.정을 부정하셨습니다.  예의 그 영원한 것은 없다면서요. 그런데 오늘 글에서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불사(不死)의 경지를 말씀하십니다? 불사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의미죠? 대승이나 초기불교인 필자나 피장파장인데 왜 대승식 표현은 틀렸고 필자의 대승식 표현은 맞는 것이 됩니까?

왜 필자의 글은 일관되지 않는 것인지요. 한가지만 하세요, 독자들 헷갈리지 않게요.
참나 2016-05-13 17: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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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글이 문화와 예술에 대한 글이 아닙니다.
그리고 필자더러 문화와 예술을 누리지 말라고 댓글 달은 바가 없습니다.

그동안 필자는 대승을 비불교로 여겼습니다. 도선사의 마애불은 필자가 그동안 비판해 왔던 대승불교, 즉 힌두교식 미신불교의 전형입니다. 부처님께 소원을 빌어서 욕망을 해결하려는 타력신앙이죠. 하지만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평소 비판해 왔던 전형적인 대승의 힌두교식 행태에서 부처님 오신날의 의의를 찾으니 황당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욕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의 본성(불성,품성)이 있다고 보고 그 본성을 개발시켜 쓰자는 본성관으로 유교의 측은지심을 언급하였습니다. 불교의 본성관을 그동안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줄기차게 대승(선)을 비방했던 자가 어째서 이교도인 유교의 본성관은 인정하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열반해탈이라는 불사(죽지 않는)의 경지,, 운운했는데요 이는 그 동안 필자가 대승의 불생불멸,상락아정은 진리가 아니라던 입장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입니다. 대승이 불생불멸을 말하면 틀린게 되고 필자 본인이 불사(죽지않음)를 말하면 참이 되고...말이 안되잖아요.

그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문화예술 얘기를 합니까?
참나 2016-05-13 17: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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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언제 비불의 힌두성을 불교로 우겼는데요?
지금 진흙속의 연꽃이 그동안 대승불교의 힌두교식 행태를 비방하다가 오늘글에서는 힌두교식 행태에서 의미를 찾은 것 안보여요?마애불상에 하루종일 절하면서 대학붙게 해달라, 사업번창 시켜달라는 개인적 욕망을 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바로 힌두성입니다.  진흙속의 연꽃은 같은 힌두성에 대해 어제는 비방하고 오늘은 의미를 찾는 이중성을 보였고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필자의 180도 다른 이중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거라구요. 왜 자꾸 제 얘기로 논점을 돌려요? 이사람은 진짜 말귀를 못 알아드신다.
참나무상상 2016-05-14 10:4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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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아부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날마다 엄마랑 자면서...
나 보고는  여자랑 노는 일 걸리면 죽을줄 알라고 한다.

-맥락 이해가 안되는 아들편-
그러게 2016-05-14 15: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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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아버지에게 질문을 해서 해명하라고 해야죠. 질문을 막을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연꽃님이나 연꽃님 호위무사들에게도 연꽃님이 이중성을 보이는 것 같으니 왜 그런지 설명을 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거죠. 실제 이중성인지 단지 이중성처럼 보이는 것인지.
질문을 막지 마세요.
참나무상상시론섬 2016-05-14 10:44:53
답변  
울 아부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날마다 엄마랑 자면서...
나 보고는  여자랑 노는 일 걸리면 죽을줄 알라고 한다.

-맥락 이해가 안되는 아들편-
어익후 2016-05-15 19:29:57
답변  
맥락을 모르는 자로세
입은 삐뚤어져도 비유는 바로 들어야 한다.

예문) 울 아부지는 사람들에게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매일매일 훈계를 하지만 다른 사람들 몰래 이여자 저여자 만나면서 엄마 속을 썩이는 이중인격자다. 이에 대해 아들이 아버지의 2중성에 대해 따져 물었다.

그런데 참나무상상시론섬이란 좀 모자란 자가 아들의 정당한 비판의 맥락도 이해하지 못하고 바람피는 아부지에게 깊은 뜻이 있다나 뭐라나 ㅠㅠ
그렇죠 2016-05-15 19: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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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연꽃님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어익후아부지는 2016-05-15 23: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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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피우시나?

그렇쵸야!
질문 -> 다음에 대답이지???
질문도 없는데 무슨 대답을 하나???

꼬라지 글이 질문도 아니겠지만,
묻는 말이라고 다 질문이 아니다.
그런건 그냥 '헛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너희들이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알겠지!!!

다원님의 친철한 법보시다....
나는항상 2016-05-16 00: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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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이다. 이열치열....

꼬라지 글에는 시궁창으로...
파자에는 오자로...
무식에는 몽둥이로...
단문에는 칼문으로...
희론에는 겔론으로...
욕에는 족으로...

이보다 더한 정면승부가 어디 있나!!!
다워나 2016-05-16 0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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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벌 떨면서 질문도 못하게 막는 게 정멸돌파냐?
핑계좋다 2016-05-16 00: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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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막으려고 기를 쓰냐? 내가 무슨 질문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다원아 2016-05-16 14:4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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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질문 한적이 있단다.
했으면됐다 2016-05-16 15: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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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헛소리를 질문이라고 많이 생각해라
이런 2016-05-17 00: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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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아, 도망가는 거냐?
그렇구나 2016-05-18 18: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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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이는 대답을 못하는구나. 연꽃이 다원이를 원래도 싫어하지만 실력 없는 꼴을 보니 더 싫어지겠구나.
게자석 2016-05-28 00: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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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드랑이 털들...
참나 2016-05-13 17: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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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댓글을 쓰면 불사(죽지않음)를 논했던 진흙속의 연꽃은 "불교영생론"자가 됩니다. 필자를 돕자는 댓글인지 망치자는 댓글인 정도는 분별하시고 댓글쓰세요.
참나 2016-05-13 17: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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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 죽지않음=영원히 삶(영생)...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어떻게 다른지도 설명하셔야죠?
참나무상상 2016-05-14 10: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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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른지 까지 설명해야하는 주석이 아니다.
부족한 부분은 스스로가 해결해야할 몫이다. 그 능력이 안되면 글 읽을 자격이 안되는 것이고.

꽃님 글이나 타의 사족들도 모두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한 에세이 이 일뿐이라서 부분적으로만 언급한 표현을 전체적으로 책임있게 써라고는 할 수없다.
본질 2016-05-14 1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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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가 잘 모르고 썼으면? 잘 모르고 썼다는 것도 모르면?
니가모른다는것이 2016-05-14 21:4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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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이야!!!

'바담풍' 해도
'바람풍' 하는 넘이 아는 넘이고...

'바람풍' 허는데...
'풍'도 풍나름이여... 허는 넘은 '먼가 있는 척' 허지만 무식에 풀칠하는 넘이고...

니가 그레!!!
아닌건아닌거지 2016-05-14 21: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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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변호해 주고 싶냐?
아닌가긴가 2016-05-15 03: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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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모른는 너마 같은데...???

꼬라지 뎃글은 그렇게도 달고 싶냐?
다원이가 2016-05-15 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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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을 방어하려고 기를 쓰는 이유가 뭐냐?
그러게 2016-05-15 19:4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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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이는 일편단심 빠순이, 팬인 것 같네요.
하지만 애정하는 대상은 다원이에게 관심 1도 없는거 같고...이런 생각은 아마 틀렸을 것
이런 2016-05-15 19: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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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님이 다원이에게 한마디라도 관심 주는 걸 못봤는데 다원이의 노력이 연꽃님에게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거기 2016-05-16 0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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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아, 연꽃 짝사랑 하는거 지겹지도 않냐?
으째니가먼저 2016-05-16 00: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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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냐???
다워나 2016-05-16 00: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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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지겹지 않냐고. 신기하다고. 연꽃은 너하고 말한마디도 안섞어주잖아.
나는 2016-05-16 00:5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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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이처럼 연꽃을 방어해 주지 않아. 짝사랑하지도 않고. 그런데 연꽃이 너한테는 완벽해 보이냐?
다원아 2016-05-16 14: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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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없지. 니가 있고. 연꽃은 널 쳐다도 안보고.
억지로 2016-05-17 00: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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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지 말고 대답을 해라.
해줘도모른넘한테 2016-05-17 09: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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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 더하냐!!
친절이 답이고 답이 친절이다.
이것이 불교적 수행이고,
수행인의 행상이다.

모범불자 친절한 다원이다.
질문 2016-05-13 17: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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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는 불교입니까?
그래서 2016-05-13 17: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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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는 불교입니까?
당신은그래서 2016-05-14 10:47:26
답변  
무상상=실론섬=참나입니까?
당연히 2016-05-14 14: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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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저는 "무상상=실론섬=참나"가 아닙니다. 그리고 무상상님과 참나님이 같은 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티벳불교는 불교입니까? 달라이 라마는 불자입니까?
당신은 2016-05-14 22: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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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연꽃
그게궁금한가 2016-05-15 03: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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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보면서도 글문이 어두운가 본데, 무상상 부류는 아니라서 응답하노니...

다원과 연꽃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무상상=실론섬과 원불사 쥔장 단현이 보증해 줄거요.

나는 세 단어만 나오면 무상상과 원불사 단현을 금방 구별하는데... 참!!
참고로 2016-05-15 03: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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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섬=무상상은 내가 내부자 고발로 원불사에서 도망쳤는지 쫓겨난 넘인지라 원수지간이고,

원불사 쥔장은 나랑 막걸리도 주거니 받거나 한 사이이나 지도법사를 까칠하게 갈군다고 강퇴를 시켜서 지금은 원수지간이요.
확실히 2016-05-15 15: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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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연꽃
확실히그렇게생각해도 2016-05-15 23: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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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니 좋다면 끌어 않고 자!!!
참나 2016-05-13 17: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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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측은지심으 자비를 남들은 표출하면 안된다 한 적이 없어요.
필자가 그동안 대승(선)불교의 본성관을 줄기차게 비방하다가 왜 오늘은 본성관을 지지하면 하필 이교도인 유교의 본성관을 가지고 부처님의 자비심을 긍정하냐 이말입니다.

본성관이 틀렸다,진리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으면 유교의 본성관도 부정해야만 일관성이 유지된다는 겁니다. 이해가 안되요?
참나 2016-05-13 17: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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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 연꽃이 본성관을 부정해 왔다가 오늘 글에서는 인정하잖아요. 이 2중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반-직관"의 썰을 강매를 언제 했습니까? 가지고 와 보세요. 왜 하지도 않은 것을 했다고 우기지?

진흙속의 연꽃의 2중성에 대해 말하고 있느데 왜 자꾸 내 얘기로 돌리지? 머리가 고장났나요?
참나무상상 2016-05-14 10: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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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적 본성관을 부정했지.
관념적으로 사용하는 본성관의 표현까지 부정한거 아니잖아!!!

너는 <참나=무상상>이라는 이중성을 해명하고 증명해봐라!!!!
혹시 2016-05-14 15: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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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다원님이세요? 누가 봐도 아닌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엮는 것이 비슷한 거 같아서요.
맞네 2016-05-14 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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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이네...

참나=무상상이 실체인지 동일인인지는 관심이 없네...
구 둘이 즐기는 아이콘이 동일하기 때문이고, 때론 이용하기 때문에 이너마들의 분신술에 환술로 대응하는 거라네...

해보니 것도 참 재미있네...

그대도 함 해보소... 순진하게 눈 멀똥 그러지 말고...
궁금해 하는 성정이 하도 착해서 응답 하네...
불성 2016-05-13 18: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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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불성'관

~ 이때의 '불성'은 추론적 '불성'인가요? 아님 체험적 '불성'인가요?
~ 다시 말해… 실체론적 '불성'인가요? 아님 수행론의 인식적 담마-법인가요?
참나 2016-05-13 19: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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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본질과 관련없는 물타기 시도한다. 그럴 줄 알았다.

유교가 불교보다 더 본성을 정형화,규격화 하여 가르친다는 거 모르나요? 대승불교보다 더 실체화 시키는게 유교인데 유교의 본성관은 인정하고 불교의 본성관은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비방하고 진흙을 비롯한 당신네들은 왜 그러는거에요?

무아로 갈거면 본성 운운하는 것은 모두 부정해야지요. 그대들의 시각으로 치자면 유교도 힌두교 못지 않은 아트만입니다.

본글에서 진흙속의 연꽃이 인간의 본성으로 주장한 측은지심(자비심)은 실체로 말한거에요? 아님 인식적 담마-로 말한거에요? 저한테 질문하기 전에 진흙에게 따져야한다는 것도 모르세요?(이해하려나 모르겠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이 일상생활에서 불쌍한 사람 보면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일때 그 본성(마음)은 실재하지도 않는 단지 인식적 담마-법입니까? 미안하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본성은 인식적 담마-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의 불성과 다를바가 없어요. 진흙이 그렇게 부정해 마지 않던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는게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해했으면 이제 진흙속의 연꽃에게 따지세요, 무아라서 아무런 실체가 없다고 하면서 왜 본성은 인정하냐고, 무아를 버린것이냐고 따지세요.
잘사세요잘자무시고요 2016-05-13 21: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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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관련이 있는 지 없는 지...
본성관이 뭔 의미인지도 모르는 이가...

곁다리 붙들고... 그저 니 편 내 편 따지기나 하고...

어느 세월에 실체와 실재를 구별할 수나 있을른지...

유교에서 말하는 본성은 인식적 담마-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의 불성과 다를바가 없어요.

측은지심이 나에게도 밀려온다...
가관이다 가관... 불쌍한 것들... 뭐가 욕인지도 모르는... ㅉㅉㅉ
졌수다레당신이먹었어 2016-05-13 21: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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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이 하는 소리가 바로...

나 힌두교라구... 그래서 어쨌다구... 하는 거라우...
참나 2016-05-13 21:5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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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본질이고, 본성관은 또 뭐지요?
본성이란 인간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본질이 있다는 관점입니다.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길 간난아이가 우물로 기어가서 빠지려는 것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즉자적으로 달려가 아이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배워서 구하는게 아니고.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자비심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업장으로 가리워져 있어서 인간의 본성을 제한적으로만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수행으로 비본질적인 업장이 다 소멸하면 거기 본질인 인간의 본성이자 진리가 현현하다는 거, 그 본성인 진리가 완전히 발현되는게 붓다의 경지라는 겁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예지가 인간 본성의 본질이고 이 본질은 태어날때 부터 천부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도 몰랐어요? 측은지심? 가관? 불쌍? ㅋㅋㅋㅋㅋㅋ 그런 감정은 본인과 진흙씨가 가져야할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까지 힌두교의 'ㅎ'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본성(아트만)같은 것은 없다면서 무아를 주장하던 진흙씨가 부처님 오신날을 즈음하여 인간의 본성으로 측은지심=자비를 거론하셨습니다. 아트만(본성)이 있다는 게 힌두교죠. 저는 진흙씨의 이율배반적 주장에 대해서만 말했는데 이 어리석은자는 거듭해서 제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십니다.

유교나 대승이 본성관이고
초기불교가 현상관이라는 초보적인 구별만 할 줄 알았어도 오늘과 같은 참담한 코미디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뭡니까 이게 모냥빠지게스리.
자칭초기불자님께 2016-05-13 22:07:22
삭제  
묻습니다. 홍창성 교수님과 진흙속의연꽃님은 불자가 맞습니까?
승리를추카혀 2016-05-13 22: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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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귀는 참 편리하게 되어 있는 친구여…

유교에서 말하는 본성은 “인식적 담마-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의 불성과 다를바가 없어요.
…………………

유교에서 말하는 본성은 “인식적 담마-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실체인> 것입니다.

불교의 불성<이라는 실체>와 다를바가 없어요.
…………………

유교에서 말하는 본성은 “인식적 담마-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실체인> 것입니다.

불교의 [중생으로서는 인식 불가능한] 불성<이라는 실체>와 다를바가 없어요.

~~~ 생략되어 있는 내포적인 말들을 드러낸 것이라오…
일단 2016-05-13 2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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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이 실체라고 했네요?
나는안궁금혀 2016-05-13 22: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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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꾸 나에게 묻지마...
우리는 평행-다중우주를 살고 있는 사이니까...

당신 판단은 당신이 하는 거지...
싸나이가 왜 내 눈치를 보나... 그냥 지금처럼 질러대...

그리고 님 말귀는 아주 편리한 성능이니까 그냥 귀가는 대로 살어...
확실한걸더확실히하려고 2016-05-13 22: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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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차 물은 겁니다. 불성을 자칭 초기불자님이 실체라고 했다는 점을 재차 상기시키기 위해서.
초기불자님은 2016-05-13 22: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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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양심이 없으시다. 눈치 보느라 멸진열반이라고 맘껏 말하지도 못하고 불성이 실체라고도 겨우 말씀하시는 분이 나보고 눈치 보지 말라고 하네요.
제가아니고님이그러신거예요 2016-05-13 22: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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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써 놓는 말을 못 알아 보는 지경이니...
본인을 위해서 풀이까지 3단으로 해 줘도 이해가 안 돼...

지가... "불성은 실체"라고 했다는 것을 자각시켜 주어도...
내가 했다나 어쨌다나... 정말 좋은 말귀를 가죳네요... 복이십니다.
그럼 2016-05-13 22:33:59
삭제  
불성은 실체가 아닙니까?
그리고 2016-05-13 22:43:22
삭제  
참고로 자칭 초기불자님이 내 글이라고 한 것은 내 글이 아닙니다.
어쨌든 2016-05-13 22: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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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은 실체!

~ 이게 님들의 신념이고 신앙시군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죠 2016-05-13 22: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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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을 실체라고 보아서 대승불교를 끝없이 까고 또 깠던 자칭 초기불자님의 신념으로 판단됩니다.
색즉시공 2016-05-14 22: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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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님...진흙속의연꽃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글이 틀려 집니다 !
그려려니 하시고, 대충대충 읽으시고 , 우리모두 깨달음을 향해 달려가는 불쌍한 중생아닙니까?  장점만 보시고 단점은 버리십시요.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신변에 ,비로서, 무슨일이 생기기 보다 소생의 생각으론 깨달음병이 도저서 스님들 흉내를 과도하게 내다 보니 이말도 하구 저말두 하구, 좋은게 좋으니깐 두루두루 갖다 붙였겠지요!
가만 놔두면.....또다시 제자리 돌아 옵니다!  이런경우 한두번 겪었나요?
ㅋㅋㅋ
참말로수행스럽네 2016-05-15 03: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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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상 겨드랑이털인가???

재가불자보시행복열반당 신도 낙시질 하나???
문장이 참 공리적이네... 아주 부드러워...
당신의말을복습해보세요 2016-05-13 22:29:32
답변  
유교에서 말하는 본성은 “인식적 담마-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의 불성과 다를바가 없어요.
…………………

유교에서 말하는 본성은 “인식적 담마-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실체인> 것입니다.

불교의 불성<이라는 실체>와 다를바가 없어요.
…………………

유교에서 말하는 본성은 “인식적 담마-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실체인> 것입니다.

불교의 [중생으로서는 인식 불가능한] 불성<이라는 실체>와 다를바가 없어요.

~~~ 생략되어 있는 내포적인 말들을 드러낸 것이라오…
아베마리이이이이아서어엉모님 2016-05-13 22: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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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는 사기꾼들의 합창이 위에 울려 퍼지는 듯...
지가 한 말도 안 했다 하면서...
참나가참나아니라고 2016-05-13 22: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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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나 님은 다른 참나 님이시라는군요...
.....................................
참나 2016-05-13 21:56:51

무엇이 본질이고, 본성관은 또 뭐지요?
본성이란 인간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본질이 있다는 관점입니다.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길 간난아이가 우물로 기어가서 빠지려는 것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즉자적으로 달려가 아이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배워서 구하는게 아니고.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자비심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업장으로 가리워져 있어서 인간의 본성을 제한적으로만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수행으로 비본질적인 업장이 다 소멸하면 거기 본질인 인간의 본성이자 진리가 현현하다는 거, 그 본성인 진리가 완전히 발현되는게 붓다의 경지라는 겁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예지가 인간 본성의 본질이고 이 본질은 태어날때 부터 천부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도 몰랐어요? 측은지심? 가관? 불쌍? ㅋㅋㅋㅋㅋㅋ 그런 감정은 본인과 진흙씨가 가져야할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까지 힌두교의 'ㅎ'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본성(아트만)같은 것은 없다면서 무아를 주장하던 진흙씨가 부처님 오신날을 즈음하여 인간의 본성으로 측은지심=자비를 거론하셨습니다. 아트만(본성)이 있다는 게 힌두교죠. 저는 진흙씨의 이율배반적 주장에 대해서만 말했는데 이 어리석은자는 거듭해서 제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십니다.

유교나 대승이 본성관이고
초기불교가 현상관이라는 초보적인 구별만 할 줄 알았어도 오늘과 같은 참담한 코미디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뭡니까 이게 모냥빠지게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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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 우물 파세요... 싸나이가 치사하게 이게 뭡니까...
이건앞참나 2016-05-13 22: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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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2016-05-13 19:46:30

역시나 본질과 관련없는 물타기 시도한다. 그럴 줄 알았다.

유교가 불교보다 더 본성을 정형화,규격화 하여 가르친다는 거 모르나요? 대승불교보다 더 실체화 시키는게 유교인데 유교의 본성관은 인정하고 불교의 본성관은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비방하고 진흙을 비롯한 당신네들은 왜 그러는거에요?

무아로 갈거면 본성 운운하는 것은 모두 부정해야지요. 그대들의 시각으로 치자면 유교도 힌두교 못지 않은 아트만입니다.

본글에서 진흙속의 연꽃이 인간의 본성으로 주장한 측은지심(자비심)은 실체로 말한거에요? 아님 인식적 담마-로 말한거에요? 저한테 질문하기 전에 진흙에게 따져야한다는 것도 모르세요?(이해하려나 모르겠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이 일상생활에서 불쌍한 사람 보면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일때 그 본성(마음)은 실재하지도 않는 단지 인식적 담마-법입니까? 미안하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본성은 인식적 담마-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의 불성과 다를바가 없어요. 진흙이 그렇게 부정해 마지 않던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는게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해했으면 이제 진흙속의 연꽃에게 따지세요, 무아라서 아무런 실체가 없다고 하면서 왜 본성은 인정하냐고, 무아를 버린것이냐고 따지세요.
지금 2016-05-13 22: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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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쓰신 분이 저라고 판단하셨습니까?
이건 2016-05-14 10:4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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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참나
참나 2016-05-13 23:3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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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사람한테 "참나"라고 누명씌운다
어쩜 저러도 무지막지 한지^^

대승불교에 대고 불성같은 본성은 없다며? 오직 무아라면서요?
헌데 왜 유교의 본성은 인정하냐고요?
측은지심등이 바로 유교의 아트만에 해당합니다.
유교의 측은지심을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한다면 이는 무아의 가르침을 스스로 위배하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진흙씨가 대승,선불교의 본성을 부정하고 무아를 주장하다가 오늘  타종교의 본성론을 인정하면 그간의 무아논리는 어떻게 되냐, 이걸 지적한겁니다. 진흙씨가 상반된 주장을 동시에 해서 이율배반적 상황을 초래했는데 그걸 애 참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떠들죠?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진흙씨가 길거리에 침을 뱉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다가
어느 날 길거리에 침을 뱉도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나가던 이웃 사람이 과거의 말과 오늘 말 중 어떤게 진짜 당신의 말이냐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진흙씨도 아닌자가 나타나서
되려 바른 말하는 이웃사람을 별 희안한 논리로 나무랍니다.

진흙씨도 아닌자의 무논리,어거지가 바로 당신이 지금까지 떠드는 말입니다.  진흙씨는 길거리에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뱉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모르겠으면 진흙씨에게 따져 물어요 죄없는 딴사람에게 삿대질 하질 마시고요.
나는이해가안된다 2016-05-14 1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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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아부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날마다 엄마랑 자면서...
나 보고는  여자랑 노는 일 걸리면 죽을줄 알라고 한다.

-맥락 이해가 안되는 아들편-
어익후 2016-05-15 19: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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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모르는 자로세
입은 삐뚤어져도 비유는 바로 들어야 한다.

예문) 울 아부지는 사람들에게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매일매일 훈계를 하지만 다른 사람들 몰래 이여자 저여자 만나면서 엄마 속을 썩이는 이중인격자다. 이에 대해 아들이 아버지의 2중성에 대해 따져 물었다.

그런데 참나무상상시론섬이란 좀 모자란 자가 아들의 정당한 비판의 맥락도 이해하지 못하고 바람피는 아부지에게 깊은 뜻이 있다나 뭐라나 ㅠㅠ
이거 2016-05-16 1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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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소리레????

성장환경이 별로 안좋아 보아네...
어익후 2016-05-16 12: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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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모르니 뭔 소린지 알 턱이 있남, 머리는 옵션이 아님
그머리기본이 2016-05-16 15:5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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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라는데...
무신 옵션까지 있겠어!

아부지 둘이든지, 에미가 둘이 기본인 사람이라는 고백인데... 맥락의 한계가 엄마속을 썩인다는 비유이고 보니 엄마가 둘이라는 이야기네...

힘들것다... 아부지 야기 허지 말고 굴파고 들어가 마음 좀 식혀라. 도움이 될거다. 여기 뎃글질 할 시간에...
어익후 2016-05-16 17: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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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독해문맹이군
예문의 맥락은 아버지가 한입으로 두 말하는 것,, 이다.

아비가 둘,어미가 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ㅎㅎ
우리는한입으로 2016-05-16 19: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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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말해 본적이 없어서
그런말 잘 몰라...

결손가정 반항아들의 넋두리가...
엄마가 둘,,, 아빠가 둘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알아도...

니도 그런 경험담 쓴거 아니냐!!!
글문도사의 타심술이다. 맞제?
나다 2016-05-17 00:5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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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이는 연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지금벌써 2016-05-17 09: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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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핀 넘도 있다...

친절한 다원이다.
다워나 2016-05-20 00: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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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게 당연히 없지. 밑천 다 드러났는데.
앞으로라도 얼마든지 덤벼라.
이번에 졌다고 너무 실망마라.
게자석 2016-05-28 00: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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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구니 털...
색즉시공 2016-05-15 07: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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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님!  진흙씨를 너무 절벽끝으로 몰아붙이지 마십시요! ㅎㅎㅎ
그러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깜짝이벤트로 머리깍고 , 스님이라도 되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똑딱 똑딱 목탁치고 ,승복입고 ....그러다 속세가 그리우면 , 또 훌쩍 잠적해서 여자하나 후려서 새장가를 가고 (그러면 장가를 도대체 몇번가나?)  ㅎㅎㅎㅎㅎㅎㅎ
허는꼬라지가 2016-05-16 00: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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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간넘 소리네???
욕지거리 2016-05-16 22: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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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하나?
니이름이 2016-05-17 00: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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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지거리다
소멸 2016-05-14 11: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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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수행은...

'나, 너, 자기, 타인 등'의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면서, 서로 싸우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참된 수행은...

'계'를 지키면서 절제를 하고,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혜'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열반(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다 놓아버림)을 대상으로 '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유정법 2016-05-14 12: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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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사띠빳타나 숫따 (Mah&#257;satipatth&#257;na Sutta)

알아차림의 확립에 대한 큰 경(大念處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은 꾸루족의 읍내인 깜마사담마라는 곳에서 꾸루 사람들 사이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서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라고 부르시자, 비구들은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하나이자 유일한 길로서,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며, 괴로움과 고통을 소멸시키게 하고,

​진리의 길을 얻게 하며 그리고 열반을 직접 체득하게 하는 길이다.

바로 이것이 네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四念處)이다.

그러면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비구가

 몸(身)에서 몸을 관찰하며 열심히 무상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철저한 앎과 알아차림을 지니며,

​마음과 물질의 세계에 대한 욕망과 혐오를 제거하면서 지낸다.

그는 감각(受)에서 감각을 관찰하며 열심히 무상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철저한 앎과 알아차림을 지니며,

마음과 물질의 세계에 대한 욕망과 혐오를 제거하면서 지낸다.

그는 마음(心)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열심히 무상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철저한 앎과 알아차림을 지니며,

​마음과 물질의 세계에 대한 욕망과 혐오를 제거하면서 지낸다.

그는 법(法)에서 법을 관찰하며 열심히 무상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철저한 앎과 알아차림을 지니며,

​마음과 물질의 세계에 대한 욕망과 혐오를 제거하면서 지낸다.
. . .
무유정법 2016-05-14 12:51:45
답변  
열반(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다 놓아버림)을 대상으로 '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법무아,제법이 공 하기에 수행은 열반을 얻을려는 마음,비울려는 마음도 놓고 알아차림을 하면 자연히 정에 들게 된다.
그 과정이 열심히 무상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철저한 앎과 알아차림을 지니며, 마음과 물질의 세계에 대한 욕망과 혐오를 제거하면서 지내는 것.
사회참여해서 2016-05-14 14:56:36
답변  
국회의원 되고싶어 한다면?
무유정법 2016-05-14 15:21:06
답변  
응무소주이생기심
무유정법이그렇게쓰이는군 2016-05-15 08: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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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따라서?
대통령도 하고?...........
무유정법 2016-05-14 1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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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호잔 2016-05-16 12: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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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오는 토요일(5/21) 테라와다불교의 최대 경축일인
붓다의 날(탄생, 성도 및 열반일)을 앞두고, 경축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 아침에 올린 글입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는 경주 마하보디선원에서 봉축법회를 개최합니다.
그날 경주에 오시면, 아짠 빤냐와로 삼장법사님의 최근 법문 57개(MP3)를 담은 DVD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 래-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출처 : http://blog.naver.com/hojanyun/220710702282

왜 사느냐?
이 질문은 유신견에 빠져 있는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질문일 뿐이다.
이 질문에는 자아 또는 어떤 실체가 있다는 사견이 함께 하고 있다.
유신견有身見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런 어리석은 질문이 나올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은 어떤 누구 또는 어떤 실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담마(성품)의 연기현상이기 때문이다.

유신견이 없다고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해탈에 이르지 못한 한, 정신적 괴로움을 야기하는 다른 해로운 담마가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고,
열반에 들지 않은 한, 육체적 괴로움을 야기할 수 있는 담마가 언제든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다.
성냄에 의한 정신적 괴로움 또는 해로운 업의 과보에 의한 육체적 괴로움이 항상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함께 하는 담마가 일어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성제가 이해되어 그를 항상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상태, 이에 따라 그 팔정도에 따라 바르게 행위하는 상태가 필요하다.

막행막식 또는 되는 대로 행위하는 상태는 사성제와 그의 팔정도를 이해한 적이 있었더라도 그를 잊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팔정도에 따른 행위가 계속되는 상태에서만, 정신적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해탈할 수도 있고, 이 해탈에 따라 결국 열반에 들 수도 있다.
이를 위한 기본이 사띠하는 생활이다.

‘왜 사느냐?’고 묻지 않고 유신견이 없는 상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 사느냐?로 묻는 상태에서는 유신견이 일어나는 상태이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도 유신견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괴로움을 야기하는 삶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유신견을 우선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유신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욕망을 줄이는 생활, 가장 우선적으로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고 줄이는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한다.
즉, 계가 우선되어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의 진전을 위해서 계를 우선 지켜야 하는 것은 명백하다.
참나 2016-05-16 13: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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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보니 참나=무상상, 이라고 망상에 쩔은 자가 있는데
진흙씨의 '연등은 왜 다는가?'글에 무상상의 댓글에 반박한 참나가 있으니 보시구 머릿속 망상을 제거해 보십시오. 무상상은 초불, 참나는 대승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3살짜리도 구분할 것입니다.

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8414
왜 연등을 다는가?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74- 등불의 의미와 연등공양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켠 등불이 더 밝고 아름답게 빛나리”
참나 2016-05-16 13:4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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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 중에서.

[......그렇다면 왜 붓다가 출현 하는 것일까? 붓다가 출현하여 다시 법을 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연기법이 변질되어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연기법은 붓다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보편적 원리로 이미 확정 되어 있는 것이다. ]

붓다가 출현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보편적 원리인 연기법은 확정되어 있다. 맞다. 그러므로 연기법자체는 변형되거나 변질될 수 없다. 따라서 연기법 '실종' '변질' 표현은 하지 않는게 좋았다.  '연기법의 전승이 끊어짐'으로 표현해야 했다. 이건 표현의 미숙함 문제니 넘어가자.

중요한 건. 연기법 전승이 끊어졌을 때 법을 굴리기 위해 붓다가 "다시" 출현한다는 것이다. 아라한 이상은 열반후 삼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초기불교는 말해 왔다. 그런데 진흙씨의 글은 마치 붓다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있고 삼계 내에서 연기법이 사라지면 다시 출현하여 법을 굴린다고 읽혀진다. 이게 초기불교의 어법에 맞나? 붓다는 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해 버려서 다시는 사바세계로 오면 안되는 것 아닌가. 열반후 다시는 사바세계로 돌아오지 않지만 연기법의 전승이 끊어졌을 때는 예외라는 것인지. 어쨌든 다시 출현하여 연기법을 굴린다는 표현은 대승적 어법에 맞다고 본다. 예를 들면 도솔천에 상주하다가 응신으로 불자들에게 나타난다거나 석가모니 붓다처럼 화신으로 태어난다거나 해서 중생의 고통을 치유해 준다는 의미. 어쨌든 불보살이 세속에 다시 출현한다는 것은 대승 보살개념에 더 가깝다. 아라한과를 얻으면 더이상 세속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초기불교의 어법과는 거리가 있지 않냐는게 내 생각이다.

초기불교가 교리적으로 완벽하게 정리하지 않은 부분인지 아니면 진흙씨 개인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연기법의 전승 여부'를 부처님이 관찰하고 있다가 사라지면 다시 세상에 출현한다는 개념은 초기불교보다는 대승불교에 어울리는 주장이 아닐까 한다.

또, 그동안 대승불교를 비판하면서 정법이 아니라 사법(거짓된 법)이라고 피력했는데 진흙씨의 글을 보면 이제 안심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정법이 망가지면  붓다가 출현해서 정법을 굴릴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중생에 대한 끊임없는 연민, 진흙씨의 표현대로 중생의 슬픔을 없애주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니 중생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시는게 분명하다. 이게 보살사상이다. 대승경전에서 개인적인 열반락에 취해 중생의 아픔을 등한시 하는 아라한들에게 중생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다. 중생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서 해탈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중생을 돌보겠다는게 바로 보살사상에서 보면, 진흙씨가 말한 부처님이 연기법의 전승이 끊어지면 다시 출현해서 연기법 굴리고 중생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발상은 전혀 어색하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거론했던 문제(마애불신앙,본성론,불사)들 보다는 사실 이부분이 가장 진흙씨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사실 이번글만 따로 놓고 보면 진흙씨는 완벽한 대승불자이지 않을까. 초기불교 입장에서 대승을 강하게 비판했던 초기불교불자가 부처님 오신날 갑자기 입장이 180도 달라져서 대승불자처럼 말을 해서 놀랍고 신기했었다고나 할까.
참나 2016-05-16 19: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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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라며??그래서 인간의 본성같은 것은 없다며? 인간의 본성을 인정해 버리면 무아라는 말이 거짓이 되니까. 그런 논리로 대승과 선불교를 부정해 오다가 유교의 본성론을 인정하면 어쩌자는 거냐고? 유교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고 본단다. 욕망과 결이 다른 인의예지라는 본체, 본성,진리라는게 있어서 그걸 개발해서 구현해야한다는게 유교다. 모든 국민이 다 개발할 필요는 없고 가장 높은 임금부터 신하들, 사대부들 같은 백성의 리더는  반드시 인간의 본성을 개발해야한다는게 유교이고 과거시험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의 본성을 아는지 테스트했던 것이란다.

기본적으로 유교의 본성론이 대승불교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글은 나올 수 없다. 인문학 소양의 부족하니까 그런 것인데 뭐 다 이런 실수를 하면서 성장한다.

어쨌든 당신의 생각도 진흙씨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그렇다면 무아는 틀렸다) 없다고 생각하는가(없다면 진흙씨가 틀린 것이다) 무턱대고 옹호하다가 자기가 어디에 서있는 줄도 모르는 사태에 빠지지 마시라.

또, 연기법의 전승이 멈추면 부처가 다시 이 세상으로 출현하다는 진흙씨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시는가? 그렇다면 붓다와 아라한은 윤회하지 않는다는 초기불교의 주장은 틀렸다. 붓다와 아라한은 윤회하지 않는다 초기불교가 맞다면 진흙씨의 본글은 틀린 주장이된다. 진흙씨를 비롯한 초기불교도들은 지금까지 대승의 보살사상에 대하여, 즉, 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해 서원을 세우고 윤회를 지속한다는 발상은 사바세계에 남고 싶은 핑계라는 것, 보살사상은 '나'라는게 소멸되는게 두려워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논리에 충실해 보자면 연기법의 전승이 멈추면 다시 이 세상으로 출현하여 연기법을 굴리시는 부처님은 대승의 불보살처럼 다시 윤회의 세상으로 거듭 오시니까, 사바세계에 머무르려는 욕망이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초기불교의 논리대로 해탈하여 윤회의 세계와 작별한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무슨 미련이 있길래 다시 온다는 것인가. 자업자득이라고 중생이 고통속에서 헤매던지 말던지 이미 삼계를 떠나신 분은 돌아와선 안되지 않는가. 당신들 어법대로 붓다가 사바세계로 돌아오는 것은 '나'가 소멸되는 것이 두려워서는 아닌가,라고 물고 늘어지면 당신들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참나 2016-05-17 11:13:09
답변  
읽다가 돌은 것 일지도 모르겠다.

난 헷갈려 하지도 않았고 오락가락한 바도 없다.
내가 헷갈려 한다거나 오락가락했다고 여기는 것은 당신의 바람이겠다.

그리고 진흙씨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것은 맞지 않나. 무아의 가르침을 고수하면서 어떻게 유교의 본성론을 인정하지? 유교의 본성론이 맞다면 대승과 선불교의 본성관을 필연적으로 인정해야 하는데 그 동안 진흙씨는 대승,선불교의 본성관을 부정해 왔던게 사실이 아닌가.

본글 진흙씨의 주장에 당신이 동의 한다면 당신도 진흙씨와 마찬가지로 무아가 맞다는 것인지 본성이 맞다는 것인지 분간도 못하는 불자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붓다와 아라한은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는 게 맞나? 헌데 왜 진흙씨는 부처가 연기법의 전승이 끊어지면 다시 사바세계로 온다고 주장하는가. 그것은 달리 말해서 부처가 윤회한다는 말과 어떻게 다른가.

초기불교 교리를 따르자니 진흙씨가 틀리게 되고 옹호하자니 초기불교 교리가 틀리게 되고.........아주 쉬운질문에도 답변하지 못하고 질문과 관계도 없는 내용으로 댓글 쓰자니 괴롭고...다 이해해 준다.

기사 주제와 관련없는 물타기 시도를 난 경멸한다. 당신이나 풀으시라.
중도불성 2016-05-17 12:32:08
삭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하나님을 불교에서 가르치는 '불성'이나 '여래장'으로 해석하는 신학자가 있다면 참으로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마음 속 하나님을 마음 속의 불성, 여래장으로 해석하는 기독교 신학자는 올바른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아직도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열린 신학'을 말하는 반면, 기독교 신자임을 표방하는 분들 대부분은 지독히 배타적인 '닫힌 신학'을 주장합니다."

김성철 교수님 말씀입니다. 기독교에서 자기네 하나님 관념을 껍데기만 남기고 불교의 불성, 여래장으로 바꾼다는 것은 "배타적 기독교인"들로서는 인정할 수 없겠지만 우리 불자라면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주위의 소위 "독실"하다는 기독교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게 저 위에 하늘에 계신 우주를 주재하는 분이 아니라 너희의 불성일 뿐이라고. 너희의 본각자성이라고. 그들이 그것을 인정할 것 같습니까?

그리고 질문이 있습니다. 불성이 실체입니까? 아뢰야식이 실체입니까? 세상이 실체입니까? 오늘 먹은 아침이 실체입니까? 실체가 무엇입니까?
참나 2016-05-17 13:16:04
삭제  
본글에 분명히 유교의 본성론인 '측은지심'에 대해서 진흙씨가 거론하였고 이 측은지심이 부처가 중생을 바라보는 입장이며, 도선사 마애불의 형용할 수 없는 안쓰러움 표정도 측은지심과 결부시켰고 종내에는 연기법 전승이 끊어져서 중생이 고통스러워할때에 붓다가 다시 세상에 출현하여 연기법을 굴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측은지심이 바로 유교의 인간 본성(본체)이다.

진흙씨가 본글에서 다 거론한 것이고 댓글로 여러번 말했는데도 발뺌한다. 내말이 틀린 거면 유교의 측은지심이 본성론이 아니다,는 근거를 대면 간단하단다.

그리고 붓다가 연기법 전승이 끊어지면 다시 세상에 출연한다는 부분이 초기불교 교리(붓다와 아라한은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는 교리)에 맞냐 맞지 않냐?

글 못 읽나, 버젓이 측은지심(유교의 본성)이 부제목으로 떠억허니 있고 내용의 핵심인데도 정말 얼굴 두껍도다 두꺼워.
글쎄요 2016-05-17 13:17:08
삭제  
이상하네요. 환영해 주어야 한다는 사람이 홍익학당을 허구헌날 거론하면서 물타기 하던데요? 마치 불성, 여래장 사상을 따르는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한다는 것처럼. 전혀 사실이 아닌데 어떨 때보면 워낙 단멸론자라서 실제로 그렇게 보는 것도 같더라고요.
그리고 김성철 교수님을 그저 그런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하는 교수님으로 치부하려 하시는데 정말 환영할 만하니까 환영하신 겁니다. 단지 "뭐라 하겠어요"가 아니에요.

"불교의 궁극을 참나로… 그 참나를 실체로 둔갑시켜서…"???

어떻게 실체로 둔갑시켰는지 말해보실래요?
그렇습니까 2016-05-17 13: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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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경은 연꽃제자 자칭 초기불자에게 "매를 맞아야 하는" 건가요? 달라이 라마에게도 우리 자칭 초기불자님이 "매를" 드시는 건가요?
그럼 2016-05-17 21:38:52
답변 삭제  
어떤 해석이 칭찬받을 해석입니까? 하나님을 불성으로 칭찬받을 수 있게 해석해 보세요.
중도 2016-05-17 13:52:56
답변 삭제  
불교에서 경전과 스승을 거론하는 것이 "엄마에게 가서 계속 일를 건가?"란 차원입니까?
호잔 2016-05-17 08:18:34
답변  
마하보디선원 밴드에 올려진 질문입니다.
불교를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은 한 번 답해 보세요.
답변의 말에 대해 저는 그 사람의 불교에 대한 깊이를 판단하는 댓글을 달지는 않겠습니다.

“올해 2016년은 불기 2560년이라고 한다면,
오늘 현재는 불기 몇 년일까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질문을 왜 할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면 불교에 대한 깊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탄생과 성도 및 열반에 대한 이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목적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성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단, 좀 생각하여 답하지 않고 바로 떠올라 말하는 답을 기준으로 합니다.
좀 생각하여 말하지 않도록 ‘올해 2016년을 불기 2560년이라고 한다면,’ 이라고 한 것입니다.

꼭 선문답 같다고 할 지 모르지만,
‘뜰 앞의 잣나무’나 ‘똥 막대기’와 같은 답변은 테라와다 불자의 답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테라와다 불교의 가르침은 애매한 말장난이 아니라 명확한 의미의 말에 의한 가르침입니다.
변하지 않고 전승되는 근본 삼장에 따른 명확한 가르침입니다.”
그쪽에선 2016-05-17 10:28:48
답변 삭제  
그런줄,
이미 잘 알구 있어요...
무유정법 2016-05-17 13:33:02
답변  
불사는 영원히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아라 하든 참나라 하든 바른 의미를 알면 된다.
청정하다고 하는 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일체법이 공하므로 조건을 잘 살펴 대통령이 되고 싶으면 그에 맞는 노력을 하면 된다.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는 일을 성취할 수 없다.
바부 2016-05-17 16:36:27
답변  
불사의 바른 의미는 뭐죠?
불사(不死): 죽지 않음(이게 영원히 산다는 뜻이 아니면 뭐죠?)
호잔 2016-05-17 18:03:11
답변  
열반은 죽음 또는 단멸이 아니라는 말을 이해해 보세요.
다음 글을 통해 열반 또는 불생불멸을 명확하게 이해해 보세요.

-다 음-

단멸(죽음)과 열반(불생불멸)
주소 : http://blog.naver.com/hojanyun/220654204336

열반은 죽음 또는 단멸이 아니고, 태어남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불생불멸이라고 한다.
열반이 불생불멸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간단히 말하면 열반은 윤회하는 중생들의 죽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열반은 12연기에서 생(자띠) 단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앞 포스트 http://blog.naver.com/hojanyun/220653535180 -사성제에서 의미하는 고(둑카)와 고의 소멸-에서 열반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으며 태어나지 않는 유여열반 또는 무여열반이라고 했다.

죽음은 윤회하는 중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며, 열반에 이른 아라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없으며 더 이상 태어남이 없다.
열반이 불생불멸이라는 의미는 윤회하는 중생들이 의미하는 죽음이나 태어남이 아니라는 말이다.
열반은 탐진치가 뿌리까지 소멸된 상태이며, 이 상태에 따라 윤회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아라한의 생활은 그 자체로 흔적(업)을 남기지 않는(쌓지 않는) 끼리야 담마에 의한 행으로 열반 상태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생들은 선업(꾸살라 담마에 의한 행)이든 불선업(아꾸살라 담마에 의한 행)이든 업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열반은 형이상학적인 상태가 아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열반은 단지 탐진치가 뿌리까지 뽑힌 청정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 청정한 마음의 상태가 되면 윤회하는 중생들이 말하는 죽음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즉, 아라한의 무여열반은 범부 중생들의 관점에서만 죽음이며 단멸로 보일 뿐이다.
범부 중생들은 열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범부 중생들에게 불생불멸은 형이상학적 말이나 말장난으로 보일 뿐이다.

이에 따라 범부 중생들은 열반에 대해 온갖 말장난을 할 수 밖에 없다.
열반이 범부 중생에게는 말장난으로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성제의 멸성제를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멸성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성제를 듣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애의 노예로 생활할 수 밖에 없다.
갈애의 노예로 생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감각적 욕망과 존재 욕망 및 비존재(단멸) 욕망에 따라 생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성제를 듣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불생불멸의 상태, 즉 열반의 상태가 있다는 말에 비웃기만 할 뿐이다.
죽으면 끝난다고 할 뿐이다.
또는 윤회하는 중생들이 말하는 죽음은 없다고 말하며, 열반과는 다른 영원함이 있다고 말하거나 연기가 곧 열반이라고 하기도 한다.
윤회하는 범부 중생들이 말하는 영원함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상카라 담마의 상태일 뿐이다.
윤회하는 범부 중생들은 아꾸살라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아상카라 담마의 상태(유여열반)나, 모든 상카라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아상카라 담마의 상태(무여열반)인 불생불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살아가고만 있다.

사성제를 이해하게 되면 도성제(팔정도)에 따라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팔정도에 따라 수행할 수 없는 중생들은 사성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사성제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수행에서 멀어지고 있다.
세상의 온갖 잡다한 지식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에 묶이게 된다.

사성제의 중요성은 붓다 가르침의 핵심으로 그리고 정견으로 붓다께서 초전법륜경부터 너무나 강조하셨다.
사성제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불생불멸의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사성제에 대한 실천 수행은 간단히 대념처경에서 불생불멸의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성제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우선 대념처경에 따라 실천하여 이해하고, 실천으로 계속 나아가라는 의미에서 대념처경이 불생불멸의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대념처경은 팔정도를 포함하는 의미에서 불생불멸의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이다.
바부 2016-05-17 18:16:02
답변  
지금한 설명이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대승의 열반인 상락아정과 어떻게 다른가. 미디어 붓다의 초기경 불자들은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상락아정에 대해서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말이라도 대승에서 하면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초기불교에서 말하면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호잔 2016-05-18 09:15:28
답변  
반야심경에서는 법까지 공 또는 무라고 하고 이 공 또는 무를 연기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과 무는 근본경에서 정의된 것과 다릅니다.
상과 무상, 락과 고, 아와 무아, 정과 부정은 그 의미가 다르게 바르게 쓰여져야 합니다.
연기와 공과 열반은 그 의미가 명확해야 합니다.
연기가 공이고 열반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상은 상이고, 무상은 무상이며, 락은 락이고, 고는 고이고, 아는 아이고, 무아는 무아이고, 정은 정이고, 부정은 부정입니다.
연기는 연기이고, 공은 공이고, 열반은 열반입니다.
색은 색이고, 공은 공입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고 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혼란하게만 하는 것입니다.
바부 2016-05-18 11: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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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설명이 됐다고 생각하세요?
본글 불사(죽지않음)의 의미가 불생불멸이라고 하였죠? 불생불멸인 그 열반은 상이에요 무상이에요? 무상이라면 불생불멸이 될수 없습니다. 불생불멸인 열반은 고입니까 고가 아닙니까. 고라면 고의 소멸인 열반이 아니므로 고가 아니겠죠. 고가 아니므로 락(이 락은 중생의 락이 아닙니다). 불생불멸인 열반자리는 불사(죽지않음)입니다. 이 열반자리는 연기적으로 형성된 무엇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생들의 형성되고 연기된 자아와 달리 열반자리는 아가 있어요. 아가 없다면 불사(죽지않음)이란 단어를 쓸 까닭이 없습니다. 이 열반자리는 고요합니다. 그래서 정입니다. 불생불멸이라는 말이 곧 상락아정과 의미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대승에서 열반을 상락아정으로 표현하는 것을 무아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왜곡해 왔습니다. 무상 고 무아인 세계를 벗어난 열반의 세계는 무상.고.무아가 될 수 없어요. 상락아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색(법)은 색으로 실체가 있어요? 그럼 무아가 아니네요?
색,수,상,행,식 각각의 법들이 무아가 아니라 유아라고 주장하신다면 할말없네요. 대승에서는 색도 자성이 없어서 공입니다. 그래서 법공입니다. 당신은 법유를 주장하시므로 무아의 가르침을 위배하고 있습니다.

연기법의 전승이 끊어지면 다시 사바세계로 부처님이 오셔서 연기법을 굴린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한 견해는 어떠십니까. 지난 번에 대승은 자아가 소멸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윤회를 떠다는 것을 거부하여 보살사상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 거라는 식으로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초기불교는 자아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윤회와 완전히 결별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연기법이 끊어지면이라는 전제를 깔고 다시 부처가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대승에 적용했던 논리 그대로 돌려드리면, 부처는 윤회세계에 오고싶어서 연기법 전승이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는 거 아니냐고, 부처가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와 연기법을 굴린다는 것은 자아를 다시 가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자아소멸이 두려워 자아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놓이게 되지 않겠습니까.

붓다와 아라한은 윤회를 벗어나서 해탈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초기불교는 말해왔는데 왜 다시 윤회세계로 돌아 온다는 것인지요, 그것은 교리가 잘 못된 것입니까 아니면 본글 필자의 개인적 생각입니까. 이 문제를 교리적으로 정리해 주십시오.
호잔 2016-05-18 12:16:41
삭제  
법(담마)의 구분부터 바르게 하고 적으시기 바랍니다.
지적할 것이 너무나 많아서 그만 두겠습니다.
한가지만, 유여열반은 해로운 담마가 그 뿌리까지 뽑힌 상태를 지칭하는 용어이지, 열반이라는 아상카라 담마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카라 담마와 아상카라 담마부터 바르게 구분하고 글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그 각 법(담마)이 어떻게 정의되는지 부터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열반 2016-05-18 13:24:01
삭제  
해탈知見은 어떻게 생겨납니까?
열반이 心體까지 멸한게 아니라니까요.
非心體滅 2016-05-18 13: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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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승불자님은 "我"라는 단어에 대한 반감이 너무 심해 언어로 가르키는 방향을 볼 수 없는 것 같으니 "我"라는 말을 빼고 心體만 가지고 사유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소승불자이시기에 그래도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그러면 저에게 달라이 라마가 불자인지 대답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시 질문드리겠습니다.
첨언하지만 2016-05-18 13: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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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초기불자님, 상카라 담마와 아상카라 담마와의 구분하고는 관계 없는 거라는 걸 아셨으면 합니다.
질문 2016-05-18 13: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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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야식은 유아입니까 무아입니까?
다른 말로 실체입니까 비실체입니까?

다시 아뢰야식은 실체입니까 실재입니까?

말에, 손가락에 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부 2016-05-18 14: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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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잔이 답변을 거부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아공법유라는 발상이고 언제가 진흙속의 연꽃은 초기불교도 아공법공이라고 했습니다. 호잔과 진흙속의 연꽃의 초기불교 견해가 다르군요.

색.수.상.행.식이라는 각각의 '법'들이 연기한 '자아'는 무상.고.무아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색.수.상.행.식 오온을 버리고 떠나라 하셨습니다. 오온을 버리고 떠나면 거기가 열반입니다. 그 열반은 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이라서 무상.고.무아가 아닙니다. 열반은 불사의 자리로서 상(무상이 아니라서)이고, 락(고가 소멸했으므로)이고, 아(진리 당체로서의 아, 변화하고 실체가 없는 개별 자아가 아님)이고, 오염되지 않고 청정한 정입니다.

사바세계에 연기법이 전승되지 않을 때 부처님이 다시 사바세계로 온다는 부분은 얼마든지 답변가능할텐데 회피하십니다. 아라한과를 얻으면 다시는 사바세계로 오지 않는다면서 대승보살사상은 자아소멸이 두려워하는 자들, 계속해서 윤회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만든 소설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이 연기법 전승이 끊어졌다는 핑계로 다시 사바세계로 오는게 가능하다면 아라한과을 얻어 해탈하면 다시는 사바세계로 올 수 없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고, 부처가 사바세계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해탈도 아니며, 님의 견해대로 윤회하고 싶고 자아소멸이 두려워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님의 주장에도 반하고 초기불교의 교리에도 반하는 주장을 진흙속의 연꽃이 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말이 정법입니까. 회피한다고 해서 이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죠.

무조건 대승비불로 우기고 초기불교를 고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초기불교에 반하고 대승불교를 지지하는 글들을 쓰시다가 문제를 지적당하니까 갈피를 못잡고 적확하게 답변도 못하는 군요.

진흙속의 연꽃이나 호잔은 초기불교라도 제대로 하십시오. 본인들 스스로가 대승불교의 논리를 펼치는 줄도 모르고 말하다가 괜히 지적당하시지들 말고요.
저기 2016-05-18 17:15:26
삭제  
자칭 초기불자님, 그러면 원효성사의 非心體滅은 무아도 모르는 수준인 건가요?
그리고우리 자칭 초기불자님은 원효성사나 달라이 라마 존자님을 훌쩍 뛰어넘고 남방 아라한조차도 발 아래에 두시는 至尊無上의 경지이신 건가요?
이거 한국 초기불교계의 경사 아닌가요? 일단 김열권 법사님부터 우리 자칭 초기불자님에게 귀의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법무아 2016-05-18 17:27:11
삭제  
"제-심체-불멸? No!
제-심체-멸… 제-심체-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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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우리 자칭 초기불자님의 무아관인가요? 원효보살과 우리 연꽃제자님은 무아관이 같아요 달라요?
대승불자 2016-05-18 18:16:05
삭제  
그러고 보니… 참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쓰신 말들에 대한 반감이 너무 심한가 보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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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참나님은 아니지만 같은 대승불자로서 무아에 대해서는 반감이 전혀 없습니다. 中士道를 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조삼모사 2016-05-18 18: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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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색즉시공이 틀리고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라면 아공법유인데 초기불자들이 색은 색이라면 옳다 하고 아공법유라고 하면 틀렸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삼모사입니까?
그럼 2016-05-19 12:34:18
삭제  
자칭 초기불자님, 교묘한 척 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대승불교의 색즉시공이 틀렸다기 보다는 님의 색즉시공이 황당한 거지요"

호잔님이 '내' 색즉시공을 말했습니까? '대승불교'의 색즉시공을 말했습니까? 대승불교의 색즉시공을 말했죠? 색이란 법이 공이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혼란하게만 하는 것"이란 호잔님의 말이 색이란 법을 공(색즉시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저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럼 2016-05-19 18:08:34
삭제  
심체불멸을 외도설인가요?
달라이 라마와 원효는 외도인가요?
바부 2016-05-18 14:38:11
답변 삭제  
정말 돌머리군요.
위에 호잔이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다,라는 말 했어요  안했어요?
대승에서 법공을 말하지만 초기불교는 법공이 아니라잖아요.

그 말이 색.수.상.행.식은 자성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무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호잔의 말은 아공법유를 말하는 겁니다.
색법에는 색으로서의 아가 있어서 색은 색이고 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머지 수법에도 수로서의 아가 있어서 수는 수이고 절대 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머지 상.행.식도 마찬가지.

허나 대승에서는 아(我)만 공한게 아니라 색수상행식 각각의 법들도 공하다는 겁니다. 색이 공이 될 수 없다면 색은 독립적이고 연기적 존재라는 것입니까? 색이 공(무자성)이 될 수 없다면 색이라는 존재는 뭐죠? 제법무아라는 불교 상식에 호잔이 맞지 않는 소리를 해서 내가 한 말인데 호잔한테 안따지고 나한테 따지는 당신의 어리석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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