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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깨달음의 핵심은 사성제 팔정도”

김왕근 | slbu@naver.com | 2016-05-02 (월) 17:38

[김왕근 불교담론] 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⓷- 싯다르타의 깨달음
“싯다르타는 ‘브라만’을 ‘연기법’으로, ‘아트만’을 ‘무아’로 대체한 셈”

 

깨달음 논쟁에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견해를 개진했던 김왕근 붓다로살자 편집장이 '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를 주제로 자신의 담론을 펼친다. 이에 <미디어붓다>는 김왕근 편집장의 글을 게재하기로 했다. 단 김왕근 편집장의 견해가 미디어붓다의 논지 및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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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

 

1, 깨달음이란?
2. 브라만교의 깨달음
3. 싯다르타의 깨달음
4. 대승불교의 신비주의
5. 현대 불교의 깨달음

 

‘고락중도(苦樂中道)’라는 말이 있다. 붓다는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욕락(欲樂)에 빠지는 것과 고행(苦行)에 애쓰는 것 모두 불필요하며, 팔정도(八正道)에 의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설했다.
여기서 욕락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세속의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락(樂)을 버림’이란 “왕자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수도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한다고 풀이하는 것이다. 이것도 틀린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생애를 살펴볼 때, 이를 ‘선정(禪定)주의를 버림’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싯다르타는 고행을 하기에 앞서서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카 라마뿟다 등 당대의 명상 고수들에게 배워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선정에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고(苦)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결론짓고 이 방법을 버렸다. ‘도(道)’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체적 쾌락 뿐 아니라 선정에 의한 정신적 쾌락도 버려야 한다. 싯다르타의 후예들이 “붓다는 멸진정(滅盡定)에 들었다”면서 선정의 또 다른 극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싯다르타의 뜻을 왜곡한 것이다.
싯다르타는 팔정도(八正道)에 의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팔정도란 무엇인가? 현실을 똑바로 봄으로써 이기심이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수행이다. 이 수행은 어떻게 하는가? 백 개의 가마솥 경(숫타니파타 Ⅱ264)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說)했다.

“수행승들이여, 아침에 백 개의 가마솥 분량의 음식을 보시하고 점심에 백 개의 가마솥 분량의 음식을 보시하고 저녁에 백 개의 가마솥 분량의 음식을 보시하는 것보다 아침에 잠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거나 점심에 잠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거나 저녁에 잠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는 것이 보다 커다란 과보가 있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우리는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만들고 확립하고 구현시켜 훌륭하게 성취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여기서 ‘잠시’란 얼마간의 시간일까? 그것은 ‘소의 젖꼭지를 잡아당기는 데 필요한 시간’, ‘두 손가락을 튕기는 데 필요한 정도의 시간’이다.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으로 족하다.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은 이를 ‘노는 입에 염불하기’라고 표현한다. 마음은 그냥 놔두면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통제받지 않은 제멋대로의 생각은 대체로 좋지 않으므로 시간 날 때마다 마음을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게송’의 방법을 쓴다. 마음속에 ‘화’가 있을 경우,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완전하다, 나는 평화롭다”라고 생각하고, 숨을 내쉬면서 “상대를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라고 생각한다. 해탈이란 이렇게 자애의 마음을 닦아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열반이란 그렇게 해서 얻은 마음의 평화다.
선정의 방법을 버린 싯다르타는 이후 6년간 고행했다. 고행은 하루에 쌀 한 톨과 깨 한 톨을 먹으면서 버티는 극한의 수행이었다. 그러나 수행의 결과는 ‘깨달음’이 아니라 육체의 쇠약과 정신의 몽롱함뿐이었다. 싯다르타는 그래서 당시 인도 사람들 대부분이 생각해온 이 수행의 방식을 버렸다. 고행 또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이 아님을 간파한 것이다.
고행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고대 사회에서 그 불합리성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버리고 떠남’이고 ‘위대한 포기’였으며, “하늘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당시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서 간, ‘사상적 혁명’을 이룬 것이다.
혁명에는 저항과 박해가 뒤따른다. 싯다르타와 함께 고행을 하던 다섯 고행자들이 우선 손가락질을 했다. 그들은 싯다르타에게 타락했느니 사치해졌느니 하면서 경멸의 눈길을 보내왔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우유죽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 쾌적한 장소를 찾아 보리수 밑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을 위해서는 얼마가 걸렸을까? 어떤 사람은 삼칠일, 즉 3주만에 깨달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7주만에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짧은 시간일까? ‘우주의 진리’라는 어마어마한, 그 깨달음의 내용을 생각하면 짧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만약 7주가 걸렸다고 한다면, 이는 짧다고만 할 수는 없는 시간일 것이다. 싯다르타[釋迦, BC 563? ~ BC 483?]와 거의 같은 시기를 산 공자[孔子, BC 551 ~ BC 479]는 제자 안회의 성실함을 칭찬하면서 “안회는 한번 뜻을 세우면 석 달은 지속한다. 나는 겨우 한 달을 채우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인간이 뜻을 세우고 한 달 이상 이를 위하여 전력을 다할 수 있다면 이는 곧 성인(聖人)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집중적인 성찰의 방법으로 얻은 깨달음으로 ‘붓다(Buddha:佛陀)’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가 얻은 그 깨달음이란 대체 무엇이었는가? 이를 규명하는 것은 불교인에게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불교의 교조(敎祖)는 싯다르타이며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본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불교’라는 이름으로 주창되는 온갖 이론이나 법문, 혹은 수행 방법들이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아니라 브라만교의 가르침이라면 어떻겠는가? 혹은 불교가 아니라 이 땅에 고대부터 있어 온 샤머니즘이라면 또 어떻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불교도가 아니라 브라만교도일 뿐이며 혹은 원시의 샤머니즘을 믿는 족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브라만교도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샤머니즘이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서원(誓願)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 믿고 행하는 그 이론이나 수행의 체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중도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우선 ‘중도’로 표현된다.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아, 출가한 이는 두 극단에 달려가서는 안 되나니,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 무익하나니라. 또 스스로 고행을 일삼음은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하니라.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과 증지와 등각과 열반을 돕느니라.”

중도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영어로는 ‘middle way’가 되며 우리말로는 ‘가운데 길’이 될 것이다. 고락중도란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은 ‘고(苦)’도 아니고 ‘락(樂)’도 아니며 이 양극단의 길을 버린 ‘가운데 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완성된 설명이 아니다. 그 ‘가운데 길’이 어떤 길인지를 또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행을 하는 것도 틀렸고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틀렸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 ‘중도’라고 한다면, 적당히 고행하고 적당히 즐기라는 것인가?
‘중(中)’에는 ‘가운데’라는 뜻 이외에 ‘부합하다’, ‘일치하다’, ‘해당하다’, ‘바르다’, ‘곧다’, ‘맞다’, ‘맞히다’의 뜻도 있다. 우리가 ‘적중시키다’라고 말할 때, 이는 ‘과녁, 혹은 사물의 기준(的)’에 ‘맏힘(中)’을 뜻한다. 그렇다면 ‘중도’란 ‘가운데 길’이란 뜻보다는 ‘적중된 길’, ‘표준에 맞는 길’, ‘바른 길’, ‘(현실에) 부합하는 길’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중도’처럼 ‘중(中)’자가 들어간 말로, ‘중용(中庸)’이 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이며 싯다르타보다 1세기 정도 후에 중국에 살았던 자사(子思)(기원전 492 ~ 431)가 지은 책 제목이기도 하다. 중용은 국어사전에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라고 설명돼 있다. 중국 북송 중기의 유학자 정이(程頤 1033 ~ 1107)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고 하였다.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용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중용에는 ‘보편타당’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 중용에는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 발이개중절 위지화(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라는 구절이 있다.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표현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하고 희로애락이 나타났을 때 그 감정들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라는 뜻이다. 자사는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아무 때나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며, 이를 조절하여 주변 상황이나 절도에 맞도록 하는 것을 인간이 가야 할 길이라고 여겼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정확히 ‘가운데’라는 뜻으로 썼다. “용기란 비겁과 만용의 중간이다”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렇게 산술평균의 의미로 중용을 이해한다면 이는 좀 천박하며 실생활에 적용하기도 어렵다. 예컨대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중용을 기준으로 하면 이는 용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사가 말하는 중과 화를 생각했을 때, 안중근의 행동은 중용의 길이며 용기 있는 길이 된다. 안중근은 그의 ‘분노’ 혹은 ‘동양 평화를 위하는 마음’ 등을 절도에 맞게 발(發)했다.
보편타당성, 현실에의 적실성이라는 중용의 이런 성격은 ‘중도’에도 있다. 싯다르타가 혹은 나가르주나가 ‘중도’를 말할 때, 그것은 양 극단의 길을 피했으므로 ‘현실에 맞는’ 길이 된다. 현실은 복잡한 것이어서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이를 규정할 수 없다. 현실을 “있다”고 하면 상주론(常住論)이 되고 “없다”고 하면 단멸론(斷滅論)이 되는데 이는 모두 현실을 표현하지 못한다. 만물은 “이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생기고 저것에 의해서 이것이 생기는” ‘생성’의 존재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떼어서 보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텅 비어있는 공(空)의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공의 존재에 불가피하게 이름을 붙인다. 독립적으로는 텅 비어있는 존재, 실체가 없는 존재이므로 현실에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그 현실의 객관적 본질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그 이름을 붙인 사람에게만, 혹은 그 이름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에서만, 그 이름을 붙인 맥락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가명(假名)이다. 인간의 세상에 대한 인식, 인간이 마주치는 현실은 그저 ‘거짓 이름’, 즉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환상의 존재라고 해도 그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임시적으로 이름붙인 그 의미 맥락에서 현실은 존재한다. 이것이 ‘유무중도(有無中道)’라고 할 때 ‘중도’의 의미이다.
‘중도’란 ‘현실적’이라는 뜻을 갖는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뒤에서 다시 설명되겠지만, 이는 ‘연기법의 진리에 입각한’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어떤 ‘개념’을 가지고 현실을 설명할 때는, 현실의 일부분만을 설명하게 된다. 예컨대 ‘만유인력의 법칙’은 “모든 질량을 가진 존재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법칙이다. 그 결과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자유낙하한다”는 것도 법칙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유낙하하지 않으며, 바람에 날려서 둥둥 떠 있는 물체도 있다. 그러므로 ‘자유낙하의 법칙’은 실제 세계를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존재가 다른 모든 존재의 원인과 결과가 되는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이런 부분적인 진리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실상을 실상대로 보는 방법이 된다.
싯다르타는 고행과 선정의 두 길을 모두 버리고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 길은 싯다르타 개인이 전통을 파괴하고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길이었다. 싯다르타가 “존자여, 당신은 누구를 따라 출가했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 가르침을 받았습니까?”라는 고행자 우파카라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일체의 승자(勝者)요, 일체의 지자(智者)라 그 무엇에도 더럽혀지지 않도다. 모든 허망한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하였도다. 스스로 깨침을 얻었는데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하랴.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대등한 자도 없으며 이 세상에 비교할 자도 없도다. 나는 최고의 각자요 스승이라. 나 홀로 깨침 이루어 적정(寂靜)하도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싯다르타는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진리 탐구의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는 이것들이 모두 미흡했다. 그래서 그 방법들을 버리고 ‘중도’를 택했다. 중도란 ‘양 극단을 버림’으로, ‘부정’의 형식을 띤 표현이다. 그런데 만약 이 ‘중도’를 ‘부정’이 아닌 ‘긍정’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부정의 방식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것을 긍정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거기에는 왜곡과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이해’를 위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이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밑에 앉아서 고요히 문제에 집중했다. 그 ‘문제’란, 싯다르타 개인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당시 인도인들이 풀려고 애쓰던 ‘브라만’과 ‘아트만’의 문제 즉 인간, 실체, 고(苦) 등의 철학적 문제였다.
그 결과 얻은 깨달음은, “아트만은 없다”는 것이었다. 고행을 하는 동안, 그는 ‘아트만’을 찾는 데에 온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전통적인 진리 탐구의 방법을 버리고, 시각을 보다 넓게 하여 인간과 세상을 보니 “아트만이란 없다”는 게 보였다. 싯다르타는 진리를 깨닫는 방법에 있어서도 브라만교의 길을 버렸고, 그래서 자기만의 방법으로 찾은 진리의 결과에 있어서도 브라만교의 교설과는 다른 결론을 내게 됐다.
싯다르타가 얻은 진리는, “아트만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우주와 인간은 그 안에 존재의 실체가 있어야 한다. 이게 당시 인도인들의 생각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그 인간은 눈 귀 코 혀 몸 등으로 느끼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종합이다. 그러나 이 감각 하나하나가 곧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각을 잃은 맹인도 사람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 안에 이들 감각들을 종합하는 주체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가 없다. 인간의 감각들을 종합하는 존재, 인간 ‘영혼’으로서의 그 존재는 브라만교의 언어로는 ‘아트만’이라 표현됐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그 ‘아트만’이 없다고 선언했다. 아트만은 인간의 실체이므로 아트만이 없다는 말은 인간에게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싯다르타는 과감하게 “인간 존재는 실체가 없다”고 선언했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도 실체가 없다고 선언했다. 인간과 우주는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다!
이는 기원전 1500년 이전부터 있어왔던 전통에의 도전이고 혁명이었다. 또한 인간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상식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그리고 우주의 모든 물체들이, 지금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그것이 “실체가 없다”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그렇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은 모두 유령과도 같은 존재란 말인가? 싯다르타는 “그렇다”고 답한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유령이라는 이런 말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싯다르타가 말한 이 제법무아의 원리는 오늘날 현대 과학과 철학, 논리학의 연구 결과와도 맥이 통하는 것이다. 싯다르타의 진리 탐구 방법은 오늘날의 ‘과학 정신’과도 같다. 그것은 인간 지성을 사용한 ‘실제’에의 탐구다. 또한 싯다르타의 발견은 당시에는 혁명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상식’이 되고 있다.

 

 

연기법(緣起法)


싯다르타는 인간 지성을 사용함으로써, 즉 ‘영혼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보아 ‘아트만의 부재’를 발견했다. 브라만교의 스승들은 ‘참나’의 눈으로 ‘존재’를 보라고 했지만 싯다르타는 육신의 눈과 이성의 힘으로 ‘참나가 없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아트만이 없는 우주, 브라만이 없는 우주, 실체가 없는 우주는 결국 아무것도 없는 완전 무(無)의 세계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연기법(緣起法)이었다. 싯다르타는 연기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싯다르타는 또 상윳따니까야 12:20 연(緣)이라는 제목의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구들아,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아, 생(生)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이 사실은 내가 세상에 나오든 안 나오든 법으로서 확정되어 있는 바이다. 그것은 상의성(相依性)이다. 나는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다.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기에 이를 가르치고, 선포하고, 설명하고, 나타내고, 분별하고, 명백히 하여, ‘너희는 마땅히 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싯다르타의 깨달음이란 실로 이것이었다. 이것이 2600년 전 싯다르타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것이었고 그는 “이것이 나의 깨달음이다”라고 선포했다. 그렇다면 “태어났으니 죽는 것이다”라는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이 어째서 그렇게 위대한 깨달음이란 말인가?
우선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이를 말할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은 ‘인도철학사’에서 인도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더 영적(靈的)인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게 영적인 사람들과 영적인 문화 안에서 “아트만은 없다”는 것을 정면으로 외치는 것은 매우 혁명적인 사건이다. 또한 싯다르타의 시대에 인도에서, 우주의 원리는 브라만으로 표현되고 그 브라만을 대변하는 계급은 브라만 계급이다. 그런데 “브라만은 없다”고 외치는 것은 당시의 질서에 대한 반역이다. 싯다르타는 “브라만은 출생에 의해서 브라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의해서 브라만이 된다”고 브라만의 의미를 다시 개념 정의했고 당시 계급사회에서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불가촉천민까지 자신의 공동체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발견의 진정한 의미는 철학사의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싯다르타 이전의 인간은, 그저 ‘아트만’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삶과는 다른 ‘영혼’을 찾는 노력을 해야만 하며 결국 자신의 삶의 의미는 삶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을 찾은, ‘영혼’을 깨달은 극소수의 인물들 말고는 모두 자신의 진짜 삶에서 소외되며, 이 세상은 ‘가짜’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고 만다. 반대로 우리의 삶의 이면에 따로 어떤 영혼이 없다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주인이 된다. 싯다르타의 주장은 결국 인간이 자기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는 인간 중심주의이며 휴머니즘이다.
이러한 싯다르타의 주장은 현대의 일반인들이 모두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의 정신이다. 우리가 싯다르타의 말을 들어도 그것이 왜 그렇게 충격적이고 위대한 주장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고 별로 감동받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미 우리가 싯다르타의 정신을 내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는 말은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도 들린다. “생(生)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느니라.”라는 말도 너무나 당연한 말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 때문에 진리다. “천구(天球)가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한 갈릴레오의 말은 당시에는 불순하고 위험한 말로 들렸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나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진리이며 상식이다. 싯다르타의 진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추상적 사색에 익숙지 않은 2600년 전의 인도인들에게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였으나, 오늘날에는 상식이 됐다. 수천 년 동안의 문명과 지식을 수많은 개념으로 포착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 진리, 자비, 실존, 존재, 우주, 극한, 뇌, 뉴런, 신경전달물질, 범주, 이데아, 본성(本性) 등등의 수많은 개념을 이해한 현대인들에게는 ‘연기법(緣起法)’도 크게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싯다르타 자신은 처음에 걱정했지만, 2600년 전의 인도인들 중에도 싯다르타가 열성을 갖고 설명하자 순식간에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를 깨닫고 싯다르타에게 귀의했었다.
싯다르타의 연기법은 싯다르타 자신이 무(無)에서부터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싯다르타는 브라만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이어받았다. 범아일여란, ‘우주의 숨’인 브라만이 곧 ‘인간의 영혼’인 아트만이라는 사상이다. 싯다르타는 여기서 다만 우주의 원리로서의 ‘브라만’을 ‘연기법’으로, 개인의 몸속에 있는 영혼 ‘아트만’을 ‘무아’로 대체한 셈이다. 우주의 중심 생명, 실체로서의 범(梵)이나 개인의 중심 생명, 영혼으로서의 아(我)란 없다. 그러나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진리를 부인할 수도 없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범과 아가 애초부터 없는데 어떻게 범이 곧 아이고 아가 곧 범이 되는가? 존재하지 않는 두 실체가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이런 말이 어떻게 참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가 찾아낸 진리이다. 싯다르타가

 

고생 끝에 겨우겨우 얻은 이것을
어이 또 남들에게 설해야 되랴.
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세상의 상식을 뒤엎은 그것
심심미묘하니 어찌 알리오.
격정에 매이고 무명에 덮인 사람은
이 법(法)을 깨닫기 어려우리라

 

라고 한 것은, “일반의 상식과 어긋나는 이런 진리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는 고민이었다. 그러나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아트만’을 깨닫는 것과 비교하면 싯다르타의 ‘연기법(緣起法)’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쉽다. 왜? 스승의 발밑에서 비밀스러이 깨달아야 하는 신령스러운 브라만교의 영적(靈的) 진리에 비하면 ‘연기법’은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나 들어서 알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중국 선종(禪宗)의 3대 조사(祖師) 승찬(僧璨, ?~606)은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고 했다. “지극한 진리는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도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지극한 도다.

 

싯다르타 깨달음의 성격; 열린 지식으로서의 ‘과학 정신’


싯다르타는 연기법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최초 설법, 즉 ‘초전법륜(初傳法輪)’에서 설한 것은 사성제와 팔정도였다. 이는 싯다르타가 연구를 하고 깨달은 후에, 실제 ‘강의’에서는 핵심 내용을 그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학생들이 알기 쉽도록 풀어서 말했음을 뜻한다. 그 설법의 성격은 경전에 규명되어 있다.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나이다. 즉 이 법은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성질의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열반에 잘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며,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설한 법의 성격은 다섯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 그 법은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이다. 이는 브라만교에서 설하는 ‘아트만’에의 깨달음이 현실적인 경험의 세계와는 다른 성격의 것임과 대비된다. 아트만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아트만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반면에 초전법륜으로 깨달음을 얻은 다섯 비구들을 비롯해서 싯다르타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모두 싯다르타의 설법을 듣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믿음을 얻었으며 그 다음에 싯다르타에게 귀의했다. 설법을 듣기 전에는, ‘믿음’은커녕 경멸의 눈길을 보내왔다. 타락했느니 사치해졌느니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그런 사람들이 싯다르타가 설명을 하자 마음이 돌아섰고 결국 싯다르타에게 귀의했다.
둘째,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싯다르타의 설법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아, 내 마음 속에 화가 있구나, 미움이 있구나, 집착이 있구나” 혹은 “미움이나 화가 사그라들고 있구나”라고 알게 된다. 이는 마음을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스님들이 수십년간 참선을 하고서도 “나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다”라고 할 때의 그 깨달음은, 싯다르타가 보리수 밑에서 얻은 그 깨달음이 아니다. 
셋째,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설한 법의 내용은 만인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을 쓸 때의 그 ‘열린’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즉,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지식이라는 뜻이다. 싯다르타의 깨달음, 싯다르타의 지식은 과학적인 깨달음이요 지식이다. 거기에는 어떤 신비적인 요소도 없다. 이는 브라만교의 깨달음이 혹은 일부 선불교의 깨달음이, 스승 옆에서 내밀하게 지도를 받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전수되는 것과 정반대다.
넷째, 열반에 잘 인도하는 것이다. 열반이란 마음속에서 타고 있는 격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갈애(渴愛), 탐진치(貪瞋癡)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의 평화가 곧 열반이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깨달음이다.
다섯째, 지혜 있는 사람이면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가르친 방법에 따라 번뇌를, 마음의 방해물을 없앤다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구나 자각할 수 있다.

 

사성제와 팔정도


이런 성격을 갖고 있는 싯다르타 깨달음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성제와 팔정도다.
사성제(四聖諦)란 ‘네 가지 성스러운 단언적 명제’라는 뜻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한다. 이는 “이것은 고다”, “이것은 고의 발생이다”, “이것은 고의 멸진(滅盡)이다”, “이것은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형식의 말이다.
첫째 “이것은 고다”라고 말할 때 그 고(苦)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한다. 즉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모두 고통이다. 또 미운 사람을 만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 등이 모두 고통이다.
둘째 “이것은 고의 발생이다”라고 말할 때 이는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말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앞서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함으로 해서 저것이 멸한다”는 연기법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고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발생한 원인을 소멸시키면 된다. 그 원인은 갈애(渴愛)다. 이는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듯이 사납게 타오르는 욕망을 말한다.
셋째, “이것이 고의 멸진이다”라고 말할 때 그 방법은 갈애를 남김없이 뿌리 뽑고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고의 발생의 원인을 알았으므로, 이를 소멸시키는 방법은 그 원인을 없애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넷째,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할 때 이는 갈애를 뿌리 뽑기 위한 구체적인 길을 의미한다. 그것은 팔정도(八正道), 즉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다. 이것은 여덟 개의 길, 혹은 여덟 갈래로 벋은 길이 아니라 여덟 개의 구부러짐이 있는 하나의 길이다. 팔정도란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으로, 바르게 관찰하고(正見) 바르게 행위하며(正思·正語·正業) 바르게 생활하고(正命) 바르게 수행함(正精進·正念·正定)을 뜻한다. 이 여덟 중에서 기초가 되는 것은 정견, 즉 ‘바르게 보기’이다. 병든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단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처럼,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도 그 실상을 바르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탐진치(貪瞋癡)를 버려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 탐욕으로 어지러워진다든지 노여움으로 이글이글 타오른다든지 혹은 어리석음으로 덮여 있다면 사물을 바로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마음은, “세상 만물이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네가 곧 나”라는 진리를 외면하며 “세상과 분리된 내가 있으며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타자와 싸워야 한다”는 망상(妄想)을 갖게 한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할지 말지를 고민하면서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격정에 매이고 무명에 덮인 사람은 이 법을 깨닫기 어려우리라”라며 걱정했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탐진치, 갈애를 없앰은 불교적 삶, 즉 올바른 인간관계를 위한 전제이고 방법이며 또한 불교적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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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길동무 2016-05-03 06: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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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가지 지적할 것과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란 서양에서 황금의 중용(the golden mean)이라고도 불리며 결코 산술적 평균(arithmetic mean)이 아닙니다. 상황과 경우에 따라 그 중도의 내용이 다르게 결정되어야 하며, 모든 맥락에 통용되는 어떤 확고한 기준을 설정하기가 불가능해서 '현자의 직관'에 의존한다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유학의 중용의 개념과 다를 바 없습니다. (2) 질문: 위에서 "그러나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진리를 부인할 수도 없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분명치 않습니다. 브라만과 아뜨만을 불교 안에서 문제가 없도록 임의로 해석해서 '범아일여'가 뜻이 통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불교도 힌두교도 모두 아닌 이상한 주장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름일뿐 2016-05-03 09:31:04
답변  
중도
제법무아
연기법은  중생제도를 위해 설하신 방편으로
이름일뿐 입니다..

중도  제법무아  연기법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이것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합니다.
손가락만 쳐다보고 손가락이 밎다 틀리다 혹은 손가락이 이렇다 저렇다하는건 옳바른 공부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중도 제법무아  연기법을 따로 따로 볼것이 아니라..
중도가 제법무아 이고 연기볍이 중도이고
제법무아가 연기법이고  중도가 연기법 입니다.

중도 =  제법무아 = 연기법  이렇게 봐야

중도나
제법무아나  연기법이나 다 같은말 다른 이름일뿐...

예시
"책상"
===>> 요거이 중도이고 제법무아이고  연기법입니다.

이렇게 보는것이 정견아니겟습니까??
()
길동무 2016-05-03 10:38:09
답변 삭제  
예, 그리 보는 것이 정견이라고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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