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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 한국문학의 고향이었네!

이학종 기자 | urubella@naver.com | 2016-04-15 (금) 11:53

은평역사한옥박물관, 4.19.~6.19.‘한국문학 속의 은평전’
해방 전후 은평 거주 130여 작가 작품 700여권 최초 공개

 


은평구 구립 은평역사한옥박물관(관장 황평우)은 국립한국문학관 은평구 유치를 위한 일환으로 2016 기획특별전 ‘한국문학 속의 은평전’을 4월 19일부터 6월 19일까지 2개월간 전시한다.

 

이번 전시는 해방 전후 은평에 거주하던 문인들 130여명의 작품 초간본과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은평지역 거주 작가, 연관 작가들의 희귀 초간본 14종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었던 기자촌 출신 작가들과 언론인들의 문학작품 초간본도 공개된다.

 

은평구는 이번 전시와 관련하여, ‘이호철 선생의 토크콘서트’, ‘무속 콘텐츠 관련 금성당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학술대회’, ‘김훈 작가 초청 토크콘서트’도 개최할 예정이다. 

 

문의: 은평역사한옥박물관(02-351-8524,8527)

 

<해설 1> ‘한국문학 속의 은평전’의 의미
 
한 지역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거론할 때, 그 지역의 자연 지리적 환경과 인문적 환경은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서울 서북의 은평구는 천년의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삼각산(북한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통일신라시대 대문호이며 백성을 따사로이 생각했던 최치원이 증언한 대표적인 화엄사상의 10찰 ‘청담사’터가 발굴되었으며, 고려시대 창건된 이후 임진왜란 때 의병 삼천 명을 양성했던 ‘삼천사’, 조선 최고의 문화군주였던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이 독서하게 했던 ‘진관사’가 자리 잡고 있다. 글을 읽고 쓰기 좋은 명당으로 조선초기부터 각광받았던 삼각산(북한산)은 여전히 은평 문인에게 문학적 영감을 제공하는 터전으로 건재하다.

해방과 전쟁 후 우리 모두의 삶이 팍팍할 때 많은 문인과 언론인들이 은평에 있었다. 그들은 폐허 속에서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1980·90년대 한국문학의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상당수 문인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연유로 ‘은평구’는 서울의 문인촌(文人村)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7년 문학지에 실린 문인주소록을 기준으로 나온 통계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 거주했던 문학인 1428명 중 97명(서울시 22개구 평균거주 문학인 64명)이 은평구에 주소지를 둔 것으로 확인된다. 단순히 양적인 통계치를 넘어 거대 도시 서울 중에서도 은평구 한곳에 문인이 집중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곳이 지니는 ‘문학적 장소성’과 더불어 사회적 배경인 ‘가난’을 떠올릴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은평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문인들이 터를 잡고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해방이후 1980년대까지 문학은 ‘분단’과 ‘계층’이라는 현실문제에서 분리된 적이 없었고 작가들의 삶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하였다. 이들은 소시민적 삶을 은평이라는 현실공간에서 체험했으며 생활환경은 그대로 작품의 무대가 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호철의 <문>이나 정대구의 <수색동하늘>, 이유경의 <구파발 연시> 등은 문학적 장소로서의 은평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또한 은평은 이호철, 최인훈이 당시 금기시 되었던 분단과 통일의 시각으로 <남과 북>, <광장> 등의 역작을 집필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70년대 언론인 마을로 조성된 기자촌과 1980년대 결성된 문인회 ‘은평클럽’·‘은평낚시모임’은 지역 문인들을 규합하는 장이되었으며 이러한 모임은 90년대 은평문인협회의 결성으로 이어져 한국문학의 지역적 명맥을 계승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해방이전 은평에서 활동했던 작가 정지용을 필두로 숭실학당(윤동주, 김동인, 황순원) 출신 문인들의 희귀 초간본을 소개한다. 이어 80년대 은평클럽과 우리나라 분단문학의 양대 산맥이라 평가받는 이호철, 최인훈 작가의 대표작품 초간본을 모두 모아 공개한다. 또한 기자촌 조성 배경과 함께 기자출신 문인으로 김광주, 김훈의 작품세계를 돌아보고 ‘작가의 서재’ 코너에서는 신달자, 복거일, 신경숙, 김원일, 박범신, 이근배, 김지연 등 100여명의 은평문인과 은평문학의 실재인 700여종의 초간본을 국내 최초로 동시에 소개한다.

황평우 관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동시에 공개되는 14종의 희귀 초간본과 수집도서 700여종의 초간본을 만나는 즐거움을 이 봄과 함께 누리기를 기원한다”며 “오늘 우리 은평은 어머니 같은 북한산의 품을 한국 문학이 재도약하는 ‘국립한국문학관’터로 내드리고자 한국문학의 뿌리이자 고향인 은평 문인의 흔적을 모아서 자신 있게 소개한다”고 말했다.
  
<해설 2> 언론인의 영원한 고향 기자촌 
 
'기자촌(村)' 은 은평구 진관외동 175번지 일대에 있던 마을로, 기자들의 집단거주 마을인 데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1960년대는 발전과 도약의 시기라고는 하나, 당시 기자들의 월급으로는 최저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자들이 거주지는 서울과 멀지 않으나 또한 가깝지도 않은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현재 기자촌 터를 제시했고, 독립유공자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기자촌 아래쪽에는 광복촌을 조성하였다. 1969년 11월 첫 입주를 시작하여 1974년 3월 분양이 완료되었는데, 입주 초기에는 모두 420여 가구였다.
  
기자촌은 북한산 바로 아래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름 장마에는 비가 들이치고 겨울에는 난방시설의 문제로 사람이 살기에 어려웠다. 외딴섬 상태의 기자촌, 초창기 기자촌은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하루에 한 번씩 트럭으로 물을 실어오고, 대중교통 수단이 전무해 20여 분간 논길을 걸어 구파발로 나가야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당시 직장에서 퇴근하면 집에 돌아와 우물을 파야 했고, 큰 비가 내리면 축대가 무너질까봐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언론인들은 기자촌을 새로운 도약의 터전으로 삼고, 그 환경 속에서 소박한 즐거움을 찾고자 하였다. 퇴근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경쟁 언론사 동료들과 기자촌 주변의 대포집에서 주고받던 탁주 한 사발, 마당 한켠에 심었던 장미 덩굴이 온 집안을 휘감던 화사한 봄날. 아이들에게 동네는 천혜의 놀이터였으며, 어른들은 북한산 사계를 벗 삼아 소일했다. 총각 기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인생의 황금기를 그렇게 꽃 피웠다. 살맛나는 새로운 터전으로 탈바꿈하자! 는 의식이 공동체가 되는데 일조한 것이다. 그들은 입주자 협의회에서 더 규모를 키운 단체를 조직하면서 함께 시대를 토론하곤 하였다. 그들은 입주자 협의회에서 더 규모를 키운 단체를 조직하면서 함께 시대를 토론하곤 하였다.
  
60-70년대 기자촌의 언론인들은 서민의식으로 다져진 천혜의 터전을 기반으로 70년대의 언론탄압에 저항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기자촌은 불이 꺼지는 날이 없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대의식이 있었다. 당대 내놓으라하는 언론인들이 이곳을 거쳤다. 천상기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오전식 전 경향신문 정치부장, 이종윤 전 경향신문 기자, 한영탁 전 세계일보 논설위원, 정용쇠 전 현대경제신문기자, 조성하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 고흥길 전 중앙일보 기자, 이청수 전 KBS보도국장, 강승훈 은성 익스프레스 회장, 신현구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 이경재 전 방송통신위원장, 조덕일 전 동아일보 기자, 함정훈 당시 기자촌 보상위원장, 황대연 전 일본경제신문 서울지국 국장, 이학주 한국경제신문 사회부장, 송복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70년대부터 언론인이 정착한 터전인 기자촌에서 싹튼 주민들의 이웃의식과 문학정신은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권태웅(전 연합신문사 차장, 대표작 <자유의 가교>), 김시철(전 자유문학 편집장, 대표작<조용한 무제>, 김지향(전 세대 편집부 기자, 대표작 <사랑 그 낡지 않는 이름에게>), 박기원(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대표작 <귀향>), 박범신(전 한국방송공사 이사, 대표작 <은교>), 박성룡(전 한국일보 기자, 대표작 <풀잎>), 박연희(전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대표작 <삼팔선>), 박용숙(전 자유문학 편집장, 대표작 <대미록>), 서기원(전 KBS사장, 전 서울신문 사장, 대표작 <암사지도>), 성춘복(전 삼성출판사 편집국장, 대표작 <공원파고다>), 안도섭(전 대한일보사 기자, 대표작 <불모지>), 윤남경(전 동아방송 프로듀서, 코리아타임즈기자, 대표작 <5급 공무원>), 이유경(전 조선일보 기자, 대표작 <밀알들의 영가>), 이진섭(전 코리아헤럴드 편집위원, 대표작 <장미빛 인생>), 이흥우(전 경인일보 문화부 차장, 대표작 <한국의 마음>), 장용학(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대표작 <원형의 전설>), 전영경(전 동아일보 문화부장, 대표작 <김산월 여사>), 정규웅(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대표작 <한국문학과 노벨문학상 그 함수관계>), 하유상(전 중앙일보 기자, 대표작 <하유상 시나리오선집>), 한승헌(전 법률신문 논설위원, 대표작 시집 <인간귀향>)이다.
  
그러나 점차 입주민이 감소하였고, 1990년대 후반 퇴직 언론인들이 중심을 이루다가 2000년대가 되어서는 44가구 정도만 남게 되었다. 2000년대 뉴타운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기자촌은 그린벨트지역이라 제외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정비구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개발 이익을 기대한 주민들이 기자촌을 뉴타운지역에 포함시켜달라며 서울시에 민원을 제기했고, 결국 뉴타운으로 바뀌었다. 기자촌이라는 공간은 사라졌지만 정신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기자촌은 전 세계 유래 없는 언론인들의 집단촌에서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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