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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은 불교다”

이학종 기자 | urubella@naver.com | 2016-02-19 (금) 13:10

아나키즘과 불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아나키즘의 불교적 해석을 '국내 아나키즘 전문가 1호' 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가 시도했다.

 

방 교수는 2월 18일 열린 불교평론과 경희대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하는 열린논단에서 발제를 통해 불교 교리로 아나키즘을 살폈다. 이번 발제가 '아나키즘과 불교를 비교하는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교 과정에서 불교정치철학의 방향과 체계화에 어떤 시사점을 얻는데 있다"고 전제한 방 교수는 "소박한 신도였던 내 자신이 불교평론 열린논단과 인연을 맺으면서 불교와 아나키즘이 매유 유사하다는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비교함으로써 불교의 정치철학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며 이번 발제의 배경을 밝혔다.

 

방 교수는 “아나키즘이 실제로 불교와 매우 가까운 정치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불교와 아나키즘을 연계한 연구 성과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면서 “일본의 스님들이 1900년대 초반에 아나키즘에 매료된 경향이 있었으며, 일본의 스님들이 아나키즘에 경도된 배경에는 불교와 아나키즘의 유사성이 있다”고 부연했다.

 

2월 18일 열린 열린논단에서 '아나키즘의 불교적 해석'을 발표하고 있는 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

그렇다면 불교와 아나키즘을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아나키즘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제우스의 경호신 프로테우스와 씨름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나키즘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라고 전제한 방 교수는 “이런 특성은 다양한 사상과 철학, 사유의 방식을 허용한 불교와 상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하다 하더라도 복합적인 사유의 갈래에는 공통된 원형이 있다고 강조한 방 교수는 불교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법성(法性)이라는 일관된 흐름이라는 원형이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직까지 붓다의 정치철학을 제대로 적용했던 경험은 아직 없다-설사 아쇼카왕이라고 하더라도-고 상황을 규정한 방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세 가지 구성요소, 즉 ‘상황규정’, ‘지향가치’, 그리고 ‘실천방안’이라는 막스의 이론을 적용해 아나키즘과 불교의 연관성을 점검해나갔다.

 

“종교도 믿음의 마술에 빠뜨려 믿게 만들게 하는 것에서 이데올로기의 구조와 종교의 구조는 똑 같다”고 밝힌 방 교수는 “그러나 종교 가운데 이런 '믿음의 마술' 구조에서 벗어난 유일한 종교가 불교라는 점에 천착했다”고 강조했다.

 

상황규정, 즉 우주관과 세계관을 비교한다면, 아나키스트가 주장하는 자연관과 연기론을, 상호부조론과 자비정신을 매치시킬 수 있다고 밝힌 방 교수는 “오늘날 불교와 자연과학을 비교하는 것, 특히 복합체계이론자들이 불교와 과학을 비교하는 것의 근본은 거의 연기론적 세계관”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의 소의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부조론은 연기론적 세계관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한 방 교수는 “인류의 생존은 바로 상호부조 내지 상호 협력에 절대적으로 힘입은 바 크고, 따라서 갈등보다는 협조가 역사 과정이나 그 전개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에서 불교와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방 교수는 평소의 지론인 ‘자비 없는 깨달음은 없다’는 불교관을 거듭 강조하면서, 이는 상호부조론과 상통하는 것이며, 자비의 가치를 물씬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나키즘 이데올로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지향가치’를 비교하는 틀로 ‘자주적 개인과 대자유인’, 그리고 ‘공동체 구현과 평등 사회’를 제시한 방 교수는 개인의 자율과 자주는 아나키즘의 핵심 지향가치라면서, 대자유인은 불교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해탈을 지향하는 사람을 지칭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방 교수는 대자유인을 불가에서는 해탈이라는 초월적 용어로 설명하지만, 이를 땅으로 끌어내려 정치적 삶에서 대자유인이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나키즘이 갖는 지향가치의 두 번째 주제인 ‘공동체 구현’에 대해 ‘공유된 가치와 신념’, ‘직접적이며 다면적인 관계’, ‘호혜성의 실천’의 세 가지 요소를 거론한 방 교수는 “붓다의 평등지향성, 승가공동체 정신, 카스트제도 부정, 신분을 떠난 평등 출가 구현 등 불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가치”라고 설명했다.

 

아나키즘 이데올로기 구성요소의 세 번째인 ‘실천방법’의 비교에 대해서도 방 교수는 ‘자기조직화와 중도’, ‘아나키즘 윤리와 공업의 윤리’를 제시했다.


아나키즘의 특성 중 하나가 대안과 실천 방안의 다양성이라고 전제한 방 교수는 “자기조직화(셀프 오가니제이션) 이론과 중도를 짝으로 비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중도가 독선과 독단을 거부하고 권위적인 방법에 저항하면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정(中正)의 길로 가는 것이라면, 자기조직화 이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방 교수는 아나키즘 윤리와 불교의 공업 윤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에 대해서도 살폈다. “공업은 사회윤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한 방 교수는 “사회의 비윤리성에 책임을 지는 공업사상은 불교의 사회참여에 있어 윤리적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아나키즘 윤리와 공업의 윤리는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의존적 상호 관계로 보는 ‘상호윤리’이며, 상호윤리는 타자에 대한 나의 무한한 책임을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와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을 강조하는 ‘배려윤리’ 등의 내용을 다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 교수는 상호윤리는 현대사회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적 틀이라고 결론지었다.

 

방 교수는 아나키즘과 불교를 비교하는 틀을 학술적으로 본격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오늘의 이 발제가 세계에서 처음일 것이라면서, 그러나 이러한 아직은 성근 이번의 시도가 불교정치철학의 체계화에 어떤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밝혔다.

 

방 교수는 “제시한 세 가지 사유의 특징들 중 가장 핵심적인 공동요소는 ‘자기 조직화’라고 본다”면서 “자기 조직화는 '요동'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며, 프리고진이 창안한 비평형계열역학에서 보면 불안정한 비평형 상태에서의 작은 요동이 큰 파동으로 변환되어 거시적인 안정적 구조가 나타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자기 조직화”라고 설명했다.

 

방 교수는 이어 “지금 한국 불교와 불교도는 어떤 모습의 요동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고 불교의 정치철학은 한 마디로 ‘중정주의’로 작명하고 싶다고 결론지었다.   

 


 

다음은 방 교수와 참석한 패널들의 일문일답

 

-불교의 정치철학 대상은 누구인가? 대자유인인가? 일반인인가? 

 
“정치철학은 하화중생에 해당하는 개념이니, 일반인들이 대상이다.”


-공업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공업이라는 단어는 아비달마불교에서 나온다. 초기불교에서도 공업은 나오지 않고, 뒤에 대승에서도 공업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이 글은 불자, 구도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하화중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글이다. 공업은 업의 사회적 확장이 아닐까.”


-방 교수는 발제 중에 한 번도 불교정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참여불교에서, 또 불교사회주의(부디스트소셜리즘)에서 불교정치가 있었다고 본다. 상호부조론적 구조가 첨단 진화론적 구조와 오히려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기조직화를 실천의 문제로 보는 것은 다소 어색해보인다. 오히려 요동에 해당하는 것은 아나키즘은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불교운동에서는 불교정치적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왕이, 통치자가 붓다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한 사례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화론은 적자생존이 아니라 자연선택의 문제로 보는 현대적 흐름에 대해서는 공부를 더 해보겠다. 사실 나는 요즘 자기 조직화라는 언어에 빠져 있다. 그러다보니까 그 용어를 이곳저곳에 써먹고 있다. 그러다보니까 장자 사상과 비슷한, 렛잇비 즉 ‘내비둬’라는 것을 요즘 들어 자주 써먹고 있다. (웃음)"


-방 교수가 주장하는 중정주의의 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인가?


“학술적으로 깊이 정리된 것은 아니고 언뜻 생각한 것이다. 중도를 설명하는 사전적 의미에서 중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까. 하화중생으로 중(中)은 개인윤리적 입장에서, 정(正)은 정의, 바른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중은 옳은 개인, 정은 바른 사회라는 의미를 언뜻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나키즘에서 말하는 자연이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자연을 한 교실이라고 볼 때, 일진과 왕따가 있는 교실이 자연인가? 아니면 일진과 왕따가 없는 교실이 자연인가?


“아주 아나키즘적 질문이다. 자연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주 매우 중요한 테제다. 아나키즘의 자연론은 좋은 것에 어깨동무하는 자연론이다. 그런데 여기에 통치자가 생기고, 종교적 도그마가 생기고, 그런 것들이 다 비자연론적인 것이 된다. 아나키스트는 성선설과 성악설로 볼 때 성선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아나키즘은 과학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아나키즘이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합체계이론과 매우 비슷하다고 보는 것이지 꼭 과학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아나키즘을 어떻게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려운 문제다. 아나키스트들은 선장도, 장수도 없는 어떻게 보면 무질서한 것이다. 그래서 무질서주의가 아나키즘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유해방주의 따위의 여러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나키즘을 풀어 ‘자유공동체주의’라고 정의했다. 이 배경에는 우당 이회영 선생이 자유공동체 운동을 했다는 것이 있다. 그래서 자유공동체라고 썼는데, 아무튼 현재 수도권 아나키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용어를 대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이름 말고, 그냥 ‘아나키즘’으로 부르는 경향이 가장 많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라는 공동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것이 참 고민이다.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리산에서 대안학교 하는 분들도 있고, 그렇다. 그들은 국가나 종교 등에서 흔히 보는 독단적 구조 같은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무조건적 거부가 아니라 국가를 자유공동체로 만들어보려는 노력을 한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솔직히 대의제도에도 허점이 많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주사위로 대표자를 뽑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국가를 어떻게 자유공동체로 만들 것인가. 요동치는 것. 브로큰 허트. 진동이 강해지고 진폭이 점점 커지면서 국가도 자유공동체 성격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교육의 문제에 불교사상이 어떤 역할을 해서 교육을 바로잡을 수 없는가?


“사실 나는 불교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아나키즘에서도 교육은 제일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얼마나 엉터리 교육인가, 현대 아나키스트들이 가장 관심사로 교육을 드는 이유이다. 현재의 교육은 권위에 복종하라는 식이다. 종속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구조적 시스템이 현재 교육의 큰 문제다. 이것을 불교에 가면 해탈교육, 대자유인의 교육으로 가야한다고 본다. 구체적인 방안은 불교학자들이 마련해야할 것이다. 아나키즘 교육을 잘 실현한 학교가 영국에 유명한 ‘썸머힐’이라는 학교가 있다. 여기는 수업시간도 따로 없다. 아주 매우 좋은 학교였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학교가 있는데 돈벌이로 학교를 한다.”


-혹시 방 교수가 이 발제를 통해서, 아니면 이후 불교와 아나키즘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면서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불교와 아나키즘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사실 내가 연구를 통해 최종적으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나키즘은 불교다’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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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아니키즘은불교가아니다 2016-02-20 1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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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도 불교 아니고,
유심론도 불교 아니다.

이런건,
인간의 삶과 탐진치에 대한, 사유만 해봐도 알 수 있는,
간단한 건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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