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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 있는 멋쟁이 도시! 청호 목포의 오거리 차회

정서경 | yugao@hanmail.net | 2016-02-05 (금) 11:42

전라도? 땅에서 살면서 타지역민들의 이입이나 그들에 의한 행세를 인정해 주지 않는, 몇 곳! 말하자면 텃새가 심한 곳이 있다.

 

악명이 높다고 해야 하나!? 본토 사람들의 결속력이 좋다고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그 지역 기득권 세력(터줏대감)들의 강한 반발이 심한 곳이 대표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포는 텃새가 없기로 유명하다.

 

악으로 따지자면 전통이 없다는 것이 되고, 선으로 보면 주인은 손해를 보면서 손님 대접만을 일삼는 양반 아닌 양반기질 때문이라고 묵은 목포 사람들은 해석한다.

 

목포 오거리는 개항 전후 무렵만 해도 남교동 중앙공설시장 근처에서 바닷물이 밀려들어왔고, 간척을 한 다음에도 수문을 만들어서 개폐를 하는 수문이 있었기에 <수문통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우리 세대들이 기억하는 것은 수문당제과점이다. 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협소했던 당시를 생각한다면 빵집은 유일한 데이트장소였기 때문이다.

 

목포시사와 더불어 원도심으로 구분되고 있는 목포의 본토는 유달산 자락과 오거리문화를 배제할 수 없다. 목포 오거리는 신도심으로 구분되는 하당과 남악에 밀려 어두운 상권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도처에 역사와 묵은 문화의 상징적 근간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필자 역시 동명동이 '안태'여서 어머니가 시장갈 때 따라 가서 죽 한 그릇을 비웠던 곳이 중앙시장이고 수문통의 제과점에서 내 학생 시절의 추억을 쌓았다. 어쩌다 생기게 되는 10원 용돈이 100원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10원짜리 열 개를 들고 달려갔던 곳은 항동시장이었다. 고래 고기 한 점에 100원, 연탄불에 기름 자글자글하게 구운 고래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기 위해 그 달콤한 학교 앞 문방구의 '톡톡이'나 '뽀빠이'도 외면한 때가 많았다.

 

고깃배들이 포구에 들어오면 목포경제가 흥청거린다 할 정도로 바닷것이 풍부했던 목포어판장과 오거리, 내 기억 속에 원도심은 어린 날 놀이와 나들이, 그리고 소풍의 기억으로 자리 잡은 동심의 별이다.

 

 

 

 

 

근 ․ 현대의 기억 목포 오거리와 차문화
  1897년 평화로웠던 목포항에 무안감리서가 설치되고, 한 달 후 개항이 되었다. 이후 약 10년 간 온금동 다순구미에서 만호진, 송도(현 동명동, 필자의 안태) 역전파출소에 이르는 해안가가 매립되어 시가지가 만들어졌다.

 

오거리는 이 때 조성된 무안통의 중앙거리이며, 새로 매립된 땅에는 일본과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20세기 초의 도시계획은 오늘날 목포의 오거리와 원도심의 토대가 되었다. 1950년대부터 목포사람들은 무안통 중앙거리를 '오거리'라 불렀다. 오거리는 목포 문화예술의 산실이자 지역문화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목포의 시내 문화군에 속한 하나의 구역이며, 목포다운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목포역과 국도 1호선, 목포항, 죽동 상점타운이 직선거리에 있고, 1960년대에서 70년대에는 다방갤러리와 주점들을 중심으로 문인, 예술가, 음악인, 사진작가 등이 활동하는 주 무대였다. 오거리는 古와 新이 늘 교체하는 곳이었다. 사람도 그랬고 문화도 그랬고 정서도 그랬다.

 

'응사'(응답하라 1994) 세대조차 상상 못할 옛 모습을 품고 있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조선내화 굴뚝 너머로 곧 스러질 집들이 시루떡처럼 쌓인 풍경까지 청호 목포를 잘 드러낸다. 예를 논하는 자리에 차가 늘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고, 출출하면 간단하게 비울 수 있는 유달콩물, 혹은 팥죽 한 그릇, 다순구미와 보리마당이 있어 넉넉하지 않은 당시를 위로했으니 텃새가 대수일리 없었다.

 

 

목포 최초의 차회, 청호차회
  삼호현대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인천이나 울산에서 유입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하당신도시가 생기게 되었다. 이 후 전남도청이 목포인근으로 이전되면서 남악과 오룡 지역이 새로 신설되어 도시가 삼분화되었지만 하당신도시가 개발되는 1990년대까지 '예향목포'는 오거리에서 꽃피웠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에서 80년대 선술집과 다방갤러리에서 문학, 예술, 철학, 그리고 삶을 논하였던 목포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인물들의 교유가 활발한 곳으로 유달산 자락과 목포 오거리, 갓바위 문화의 거리 등을 연결하면 차문화 유적 탐방 인물(차인)들의 인연이 연결고리가 된다.

 

예와 멋을 아는 도시, 호가 있는 도시, 청호 목포는 곳곳에서 청호를 찾을 수 있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모르지만 민요처럼 서민감정의 압축일 수도 있다. 푸른 바다가 아니라 다도해를 푸른 호수로 형용할 수 있는 멋을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고 있다. 유달산을 산수병풍처럼 치고 영산강을 바라보고 앉아 사는 풍류기질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오거리 중심에서 청호차회가 목포에서 최초로 만들어진다.

 





1970년대 이후 목포 차문화의 보급과 확산
 청호차회에 주 멤버는 차재석, 박종길, 최태수, 일우 박윤서 교수였다. 그런데 일우 선생은 바깥 활동이 많아서 참석이 저조했다는 후문이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석범 박종길 선생(사진)을 만났다.

 

 


 

 

"70년대 초에 차생활을 하면서 차재석, 최태수 선생과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지암을 복원하면서 용운 스님이 일지암 암주로 계시게 되면서 일지암을 아주 자주 가게 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교통이 몹시 불편했기 때문에 허덕거리고 올라가면 그 일지암 유천의 물맛이 그렇게 달았습니다. 그렇게 물맛이 좋을 수가 없었지요. 꿀맛이었습니다. 힘들게 올라가서 갈증이 나니까 유천의 물부터 한 사발 떠 마시면 달지 않을 수 없었지요. 늘 감로수 같았습니다.

 

그래서 유천입니다. 원래 물맛도 좋았지만 그 이유로 유천의 물맛이 더 좋았던 것입니다. 차재석 선생과 석범이 행다를 하면 다법을 찾을 것도 없고 그 당시에는 그냥 생활차였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차를 내려고 준비하면 "어야 내 차는 조금 짭짤하게 빼주게" 하시곤 했습니다. 그만큼 진하게 우려 달라는 주문이었지요."

 




 

 차재석 선생의 수필집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차재석과 이 세상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은 사람은 석범이다. 점심 후 조금 있다가 쓰러졌다. 그 책이 차재석 선생 수필집『삼학도로 가는 길』이다. 용운 스님의 글도 있고 박종길 선생의 글도 있다. 희한하게 쓰레기통에 있어서 누가 버린 책이지 하고 봤는데 본인의 글이 실린 책자여서 챙겨두었다고 한다. 표지 그림은 김암기 선생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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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좋은 향기 2016-02-05 19:5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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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오거리일대의 세종다방에 친정아버지 따라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그래서 저도 문학소녀가 되고 차를 좋아하게 되었나봐요.
선생님의 맛깔난 글 항상 감사해요~
백유 2016-02-05 19: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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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감사해요.
공감하는 부분이 많겠어요.
그때의 오거리 오히려 그 문화정서만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더 좋았을뻔 했어요.
여천 2016-02-05 21:4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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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목포의 역사와 차문화가 전해오는 내용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백유 2016-02-07 13:37:54
답변 삭제  
네 고맙습니다.
최초의 차회와 더불어 초창기에 차문화 보급을 위해 노력하신 3분을 인터뷰 했습니다.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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