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타 스님이 들려주는 금강산 전설

얼마 후 표훈사에 당도했는데…

미디어붓다 | | 2016-01-06 (수) 15:19

 


금강산 내금강 장안사터.

 

 옛날에 거만하고 독살스럽고 매정하기로 이름난 려가 성을 가진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몸집이 큰 절구통만 한데 아는 것은 남을 혹사하고 빼앗아 먹는 것 뿐 이었다.

 

 어느 해 여름날 금강산유람을 떠난 그는 람여(藍輿, 뚜껑이 없고 의자와 비슷하게 생긴 작은 가마의 하나)군이야 어떻게 되든 저만 편안하고 빨리 구경을 하겠다고 철이 고개를 넘어서자 부터 길을 다그쳤다. 보통사람이면 장안사 승방에서 하루 밤 묵고 다음날 천천히 만폭동 안으로 구경 가는 것이 관례였지만 욕심 사나운 이 벼슬아치는 금강산에 도착한 그 날로 만폭동 구경을 하겠다고 서둘렀다.

 

 장안사의 람여군들은 그래도 비교적 평탄한 길을 가게 되어 있어 좀 나았지만 고생하게 된 것은 표훈사의 람여군들이었다. 그것은 표훈사의 람여군들이 맡은 삼불암에서 안무재 고개까지의 길이 제일 험하고 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람여를 메게 된 승려 두 사람은 이른 새벽부터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고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잠시도 쉬지 못한 채 두 승려는 급기야 람여를 준비해 가지고 삼불암 까지 내려가니 이미 그 벼슬아치를 태운 장안사의 람여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벼슬아치는 표훈사 남녀 군을 보자 바람으로 왜 늦었는가라고 표독스레 따져 묻더니 빨리 가지고 독촉하는 것이었다.

 

 


금강산 내금강 표훈사 능파루.


 두 사람이 그를 가마에 앉히고 떠나는데 얼마나 무거웠던지 몇 십 걸음을 못 가서 벌써 땀이 비 오듯 하였다. 얼마 후 람여는 표훈사 앞뜰에 당도하였으나 벼슬아치는 절간구경은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 빨리 만폭동으로 올라갈 것을 요구하였다.

 

 하는 수 없이 원화문(금강문)을 지나 험한 산길을 톺아오르는데 때는 한여름이라 석양이 되어온다고 하지만 날씨는 몹시 무더웠다. 게다가 무거운 람여까지 멘 그들은 숨이 턱에 닿고 목안에서는 겨불 냄새가 났다. 청룡담, 백룡담, 흑룡담, 벽하담을 지나 보덕굴이 바라보이는 분설담 밑까지 갔는데도 벼슬아치는 황홀경의 경치를 즐기며 좀 쉬어가자고 할 대신 인젠 해도 저물어 가는데 걸음을 다그쳐 오늘 안으로 팔담에 가닿아야 한다고 야단이었다.

 

 람여군 두 승려는 이제는 더 걸음을 옮길 기력조차 없었다. 이렇게 그냥 가다가는 람여에 짓눌려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인정사정없는 악독한 관리 놈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죽을 기를 쓰며 한걸음씩 올라가던 그들은 진주 담 옆 벼랑길에 들어섰다. 이때 승려 한 사람이 그만 미끄러지면서 넘어졌다. 까딱하면 람여채로 곤 두박 칠 뻔하였다. 겨우 일어선 그는 다른 승려에게 귀속 말로 속삭였다.

 

“이제 우리가 죽기는 매일반이야. 그럴 바에는 저 망할 놈의 벼슬아치와 함께 물에 떨어져 죽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른 승려가 생각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세.”

 

 모진 마음을 먹은 그들은 진주 담우 폭포가 내리는 높은 벼랑에 이르자 실수하는 체 하고 “앗” 소리를 지르며 그만 낭떠러지로 굴려 떨어져 담수 속에 빠졌다. 이리하여 심술궂은 벼슬아치 놈은 황천객이 되고 곡절 많은 두 람여군의 생애도 끝났다.

 

 이 이야기는 한입 두입 건너 금강산에 널리 펴졌다. 그 후부터 금강산을 찾는 양반 관료배들은 람여를 탈 때마다 이 일이 생각되어 절구통벼슬아치처럼 못된 행패질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회장 법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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