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단체의 “장”이 ‘소통’의 시간을 갖자고 직원들을 모았다. 10시부터 시작된 모임에 20여명의 정직원들이 모였다. 12시까지 2시간 정도 회의하자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대화의 물꼬를 열었다는 형식적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약속된 2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2/3밖에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이유는 기관장이 첫 타자부터 수긍이나 이해를 하지 않고, 아니 적어도 ‘검토’라도 하겠다고 하지 않고 일단 ‘면박’을 주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정당한 반박이면 좋을 텐데 거의 ‘변명’으로 일관하든가 아니면 ‘권위’를 앞세운 ‘강요’가 섞인 억지 주장으로 모처럼의 ‘소통’의 시간은 사라지며 시간만 지연됐다. 몇 명은 ‘아부성 발언’으로 ‘눈도장’을 잘 찍고 넘어가는 듯했다.

그날에는 모처럼 오랜만에 친구가 시골에서 올라왔다. 게다가 12시는 점심시간이며, 12시 반에 회의가 끝나도 1시부터는 다시 일을 해야 한다(그래서 12시는 직장인들에게 ‘점심’을 빙자한 일에서의 ‘해방’이라는 의미도 있나 보다). 12시 1분 전 내 순서가 왔다. 머쓱하게 웃으면서 “기관장님 밥 먹고 하면 안 될까요?”라고 하니, 몇 명 안 남았으니 다하고 먹자고 했다. ‘소통’을 빙자하여 ‘점심시간’까지 뺏는 ‘짱’에게 ‘배려’는 뭐고 ‘경청’은 뭘까?

그래서 부득이(?) 바른 소리를 시작했다. “**장님, 죄송스럽지만, 저는 아무런 불만이나 의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의 의견은 **장님이 들으시고 기록을 하는 인사과 직원(서기)도 있으니 저를 포함한 발표한 직원들은 나중에 공유하면 안 될까요? 저는 정말 중요한 점심약속이 있어서 꼭 지금 먼저 나가봐야 합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짱’이 째려보는 모습을 뒤로한 채 문을 조용히 여닫고 나왔다. 말을 마치고 나오는 동안 참으로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언젠가 이런 찍히는 사건을 마치 ‘돈키호테’가 한 것처럼 버전을 바꿔서 매우 조용하고 공식적인 술자리에서 일부러 꺼내 말하기도 한다. “아니 우리 독불장군 ‘꼴통’ **장이 직원들 불만이 비등하자 소통을 빙자한 시간을 형식적으로 만들었는데 직원들이 말하는 족족 까는 거야. 그게 무슨 소통이야 독재지. 그래서 점심이 다 되어 내 차례가 되자 어차피 말해 봤자 듣지도 않을 텐데, 점심이나 먹자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고 ‘무용담’처럼 지껄여 본다.

이런 하극상적인 발언을 유머러스하게 통쾌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하면 대략난감하게도 2가지 모습이 나타난다. 물론 동조하면서 일단 받아들여주면서 같이 한바탕 웃어 넘겨주는 사람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냥 ‘정말 그랬냐?’며 튕기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면서 침묵한다. 하지만 그런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는 넘어가더라도 다음에 만나면 여지없이 ‘적대적인 대응’을 시작한다.

‘그러면 안 돼요!’ ‘선후배나 위아래가 엄연한데’ ‘그러면 남들이 싫어해요’ ‘왕따 안당해요?’ 등등의 말들을 거의 흥분을 넘어서 ‘분노’에 가깝게 쏟아낸다. 결국 환하게 ‘아 그런가요? 그러네요. 그럴 수도 있네요. 음. 그렇구나’라고 하면서 화를 내지 않고 대답하면, 자신을 ‘무시’나 한 것인 양 더 화를 낸다. ‘그러니까 안 돼요’ ‘그런 태도는 커다란 문제가 돼요’ ‘저는 괜찮지만 남들이 싫어할 듯해요’ ‘다른 동료들은 코드가 안 맞아서 말 섞기도 싫어할 겁니다.’ ‘다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에요’ 등등 끝없는 아우성에 귀가 아프다. 그래도 흥분하지 않고 넉넉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 네. 잘 알았습니다.’하고 웃으면 이 무대는 끝나지 않을 듯싶게 ‘분노의 도가니’가 되어간다.

나를 보듯이 남을 잘 들어보면 ‘남 핑계’이지만 결국 ‘자기’가 싫은 듯하다. 왜 그렇게도 부정적 반응들을 보이는 걸까? 상처인가? 겨우 지켜온 알량한 선배의 자존심이나 상사의 자리를 그들을 정말 어렵게 위태롭게 지켜왔고 또 지켜주길 바라나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다 ‘하극상’이나 ‘배신’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떻게 지켜온 자리인데…….

그리고 자기도 언젠가 과나 팀 아니면 조직의 정점에 서서 ‘장’이 되고 싶을 것이다. 결국 정점이라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의 위엄을 높이지 않아도 모두의 존중을 받고 싶었을까? 그렇게 감사받고 존중받고만 싶을까? 그때까지 참고 아부하고 올라가고 싶은 이유가 이건가?

내가 한 장난스러운 ‘농담’에 그들은 ‘대리불만족’을 느끼고 동감이라는 ‘전이’의 경계를 뛰어넘어 ‘기관장’에게 빙의까지 하나보다. 자존감은 없고 자존심만 남은 걸까? 왜 소통도 못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그리워하는 걸까? 왜 실제상황도 아닌데 ‘과거’의 상처나 ‘미래’에 다가올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걸까? 금권주의 하에서 왜 우리의 가치관은 이렇게 흉측하게 변해만 가는 걸까?

얼마 후 다시 만난 그들은 얼마 전 말과는 달리 얼굴을 ‘어정쩡한’ 표정으로 마치 죄지은 듯이 마주한다. 말과는 달리 그들은 남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속 시원히 털린 것이 좀 어색했나보다. 그래도 속마음을 털었으니 꽤 시원했을 것이다. 그래도 들키고 읽혀버린 것까지는 눈치 채지 못하니 내 연기가 물이 좀 오른듯하다. 그래도 그때 웃으며 ‘그런가요? 글쎄요’하며 받아주는 내가 참으로 만만하게 보였나 보다. 여전히 미소 지으며 ‘잘 지내시죠?’라는 인사에 ‘네’ 하면서 어쭙잖게 반응하며 스쳐지나간다.

무대에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 이 삶의 아픔을 공유하는 연기자 동료들이다. 하지만 같은 동료들이라도 그들의 ‘연기’와 ‘진실’을 분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많은 대화 속에 우리는 서로를 다 알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그 역시 무대 위의 연기에 불과하나 보다. 연극이 끝난 무대 뒤의 모습조차 연기로 얼룩진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 황폐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라도 해서 ‘진면목’을 보는 것이 어쩌면 ‘소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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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보현사.(사진=하도겸)

표면적인 ‘소통’이 아니라 처음으로 무의식의 아픔을 들어주는 그런 소통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불만을 듣기에 ‘그릇’이 넉넉하지 못해서 인걸까? 그것도 모른 채 어쩌면 자신도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괴물'인지도 모르고 상대만 공중에 부양하고 있는 즉 붕 떠 있는 ‘외계인’취급을 하는 것은 아닐까?

평소에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들 방에서 발견한 ‘담배’를 ‘아빠’의 것인지 생각조차 못한 채 다그치는 엄마의 모습이 이 장면에 오버랩 되는 것은 무엇일까? 직장 여사원과 거래처 호텔 로비에서 나오는 남편을 보고 뺨부터 때리는 부인의 모습은 또 무엇일까? 아주 조금뿐인데도 우리는 왜 보고 들은 게 다 진실이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할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시공간’이나 ‘관계’ 그리고 일의 흐름도 고려 안 한 채 한 가지 물건이나 사실이 주는 상징이나 의미에만 집착하여 ‘선입견’ 등의 고정관념을 키우는 걸까? 거꾸로 그렇게 ‘예쁘게 꾸민’ 이야기에 잘 현혹될까? 그걸 악용해서 아주 적은 몇 가지 사실에 근거하여 뻥튀기를 하면서 허풍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왜 '직언'이나 '진실'을 굳이 외면하려고 하지?

법당에 앉아 계신 관세음보살 불상은 참으로 대단하다. 기도와 참회 속에 숨겨진 세상의 모든 하소연을 들어준다. 소원을 다 이뤄주지는 못하지만 다 끝까지 들어는 준다. 그렇게 남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끝가지 다 들어 주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남의 마음 속 깊이 꼭꼭 숨긴 이야기를 밖으로 끄집어내기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진정한 ‘소통’이 아닐까? 난 그렇게 나와 자주 소통한다. 오직 나를 회광반조하면서 스스로의 본다. 마음으로 마음을 보면서 그 간극을 좁혀가 본다. 난 내게 하듯이 도반들에게도 같은 방법을 써본다. 하지만 너무나 아파하기에 이젠 주저되기도 한다. 그래도 내말을 들어본 이는 ‘소통’을 좀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내 희망일까?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긴 하지만, 결국 자기 치유의 과정을 겪으면 한발자국이라도 조금 성숙해져 가는 듯하다. 언행으로 서로를 맑게 하고 환하게 마주하며 점점 밝혀간다.

말없이 환한 표정으로 ‘부하’의 의견을 끊지 않고 끝까지 다 경청해주고 격려해주며 절대 보복인사 등 ‘뒤통수’를 안 때리는 그런 ‘장’이 요구되는 21세기다. 비단 직장뿐만이 아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는 어디라도 통용될 것이다. 그런데 점점 윗사람에게는 표면적으로 아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진심으로 군림하려는 사람들만 늘어가니 참으로 안타깝다 못해 애석하다. 소통이 사라진지 오래된 한 직장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장’에게 직언을 하지 않는다.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