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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으로 읽는 불교의 언어철학”

이학종 기자 | urubella@naver.com | 2015-10-08 (목) 16:47

언어의 중요성은 두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철학에서도, 종교에서도, 아니 그런 형이상학적 범주가 아니더라도 언어는 언제 어디에서든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자 대상이다. 언어의 중요성이 그렇게 지대한대도 이상하게 불교, 특히 선불교에서는 언어를 경시하거나 소외시키는 풍조가 농후하다. 언어도단이니 불립문자(문자 또한 언어의 표기이므로)이니 하면서 말을 경계한다. 심지어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을 다 그르친다(개구즉착)이라는 표현도 아주 당연하게 사용했고, 또 받아들여졌으며,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불교에서 그토록 소외시키고 있는 언어라는 주제는, 정작 20세기 서양철학의 핵심주제였다. 20세기는 언어의 세기라고 할 만큼 언어는 중요하게 인식됐다. 서양철학의 중요한 문제들, 특히 인식과 존재의 문제는 현대에 이르러 언어철학 분야에서 재편되고 있기도 하다.

 

‘강남발 불교철학 열풍’의 진원지 미붓아카데미의 강남프로젝트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 12번째 강좌는 바로 이 언어 문제를 주제로 다룬다. 윤희조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가 ‘불교의 언어철학-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으로’를 ‘한글날’이기도 한 내일(10월 9일) 오후 7시부터 방배동 소재 사찰음식전문점 ‘마지’의 2층 갤러리에서 진행한다.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에서 불교학을 가르치고 있는 윤희조 교수는 조금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서울대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양철학 분야의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연히 서양철학자의 길을 걸으리라 생각했던 그는 어느 날, 숙세의 불연으로 인해 불교학계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는 지금의 일터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에서 불교학을 전공해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양철학과 불교철학을 고루 공부한 매우 드문 젊은 학자가 윤희조 교수다.

 

서양철학을 공부한 덕에 그는 언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언어를 소외시키는 불교학계에 몸담으면서 그가 언어, 특히 불교의 언어에 주목하고 천착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윤 교수의 눈에는 불교의 언어는, 언어가 가질 수 있는 전 영역을 보여주는 동시에 불교의 궁극적 목표에 적합한 언어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의 안목에서는 불교의 언어철학이 서양의 언어철학적인 논의를 수용할 만큼의 풍부한 담론을 포함하고 있었다. 불교에서 언어에 대한 탐구는 불교를 현대철학적인 논의로 이끌어 낼 뿐만 아니라 서양철학에 대해서도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박사과정에서 중관을 전공했다. 그는 초기 중관 특히 ‘중론’은 불교적 맥락에서 언어의 발생, 언어의 한계, 역할, 기능, 효능, 표현가능성, 궁극적인 목표와의 관계, 수행과 자비의 관계 등 언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을 거의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초기, 상좌부, 유부에서 발견되는 언어의 논의는 마치 저수지처럼 초기 중관으로 수렴된 이후에 다시 이곳으로부터 발산해 나아가고 있다.

 

그는 불교(사)에서 언어는 유식과 선불교에서 극명하게 갈린다고 말한다. 유식에서 언어의 역할이 극대화된다면, 선불교에서 언어의 역할이 최소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불교 언어에 대한 관심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언어가 서양철학에서 차지하는 핵심주제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특히 언어에 대해 깊은 사색과 연구를 했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불교의 언어관과 비교해 검토하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의 강의에 나서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왼쪽)과 윤희조 교수(오른쪽)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철학적 견해는 어떤 것이었을까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인간의 몸은 인간의 영혼을 가장 잘 묘사한 그림이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등 의미 깊지만 얼핏 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와 관련한 격언들을 남겼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로서 잘 알려졌지만 공학이나 수학에도 정통한 인물이었다. 인공지능이나 컴퓨터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는 ‘인터넷상에서는 왜 대화로 인한 오해가 발생하는가?’나 ‘인공지능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숨겨져 있는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계를 뒤흔든 <논리철학 논고>를 발행한 시기는 1912년이었다. <논리철학 논고>는 역시 철학자이자 수학자이기도 한 버트런드 러셀의 논의를 계승하여 비트겐슈타인의 독자적인 이론을 펼친 것으로써 당시의 논리실증주의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논리철학 논고>는 단순한 철학서가 아니라 컴퓨터 과학이나 인공지능, 인지과학 등의 분야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논리철학 논고>는 세계와 언어의 관계를 명확히 나타내려 한 책이다. 책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엄밀히 세계를 비춘 것으로 언어와 세계는 같은 논리 형상을 가짐으로써 언어는 세계의 이미지로써 기능한다’라는 생각을 밝혔다. 즉, 언어와 사실은 정확히 대응하며 거기에는 정의(定義)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식논리적인 사고는 수십 년 동안 컴퓨터 과학자나 인지과학자들의 생각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러나 <논리철학 논고>를 발표한 후 비트겐슈타인은 철학계에서 떠나 초등학교 교사나 건축가로서 생계를 꾸리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그의 사고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즉, ‘언어는 객관적이거나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에 따라 현실 세계의 사실과 엄밀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발하는 언어는 문장이라는 배경 없이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정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개념은 그 자체를 한정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탐구>라는 저서 속에 수록되었는데 <논리철학 논고>에서 펼쳤던 ‘언어는 단일한 것을 나타낸다’라는 주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철학 연구>의 생각은 언어학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언어의 의미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정의뿐만 아니라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이나 사용되는 방법을 분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는 ‘룰’이 있다고 했는데 이 ‘룰’이 또 난해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연구한 데이비드 피어스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룰’은 재판관이 판결을 내릴 때 법률을 적용하는 것과 같아서 ‘해당하는 법률이 과거에 어떻게 사용 되었나’에 좌우됨과 동시에 미래의 재판을 좌우하는 새로운 판례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된다.

 

즉, 언어는 엄밀한 정의를 갖지 않고 시간과 함께 역사를 거듭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거나 옛 의미를 버리거나 하면서 진화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설사 사전에 실려 있는 단어라고 해도 시시각각 의미가 변화하고 있으므로 사전에 실린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언어를 연구해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우뚝 선 불교학자이자 불교철학자이면서 서양철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는 윤희조 교수가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으로 펼칠 불교의 언어철학 세계로, 불교를 홍포하기 위해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어 발표한 한글날에 푹~ 빠져 보자. 

 


*윤희조 교수는?


-약력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서양철학대학원 졸업(문학석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석사과정 졸업(불교학석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 졸업(불교학박사)/ 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조교수/ 현 불교와심리연구원 원장


-주요 논문
‘산냐(saññā)의 양가적 의미’/ ‘초기경전에 나타난 망상(papañca)에 대한 일고찰’/ ‘'중론'에서 언어의 문제- 그 모순위의 진실의 세계’/ ‘짠드라끼르띠의 이제설과 언어관’/ ‘상좌부의 빤냐띠와 중관의 시설- 상좌부와 중관의 언어관 비교’/ ‘불교에서 실재와 언어적 표현의 문제- 초기불교부터 초기중관까지의 자성과 이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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