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기자
urubella@naver.com 2015-10-06 (화) 13:51"민족의 얼이 깃든 불교문화재를 환지본처하겠다."
불교문화재 환수를 위한 일에 불교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대표 영담스님)과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이 손을 맞잡았다.
두 단체는 첫 공동사업으로 일본으로 반출된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두 단체의 대표 영담 스님과 혜문 은 지난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율리사지 석탑 반환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을 다녀왔다.
두 대표는 9월 17일 오전 도쿄 스미다구 간이재판소에서 열린 조선불교도연맹과 오크라 문화재단의 2차 조정에 참가했다.
이날 2차 조정에서는 조선불교도연맹 차금철 서기장이 직접 참가하려했으나 일본 외무성이 기간의 촉박함을 이유로 입국을 불허, 참석하지 못했다.
도쿄간이재판소 민사6실(재판장 오카미쓰 다미오)은 이날 "가차 조정은 열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겠다"며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은 국제관계적인 사안이어서, 정치적 해결을 할 사안에 사법부가 간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며, 따라서 도쿄간이재판소가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정을 참관한 영담 스님은 "한국과 북한, 일본의 불교계가 문화재 반환에 뜻을 함께 한다면 문화재 반환의 뜻과 함께 동북아시아 평화 정착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영담 스님은 이를 위해 전일본불교연합회와 일본 최대종단인 조동종 등 일본 불교계를 설득해 도움을 받을 생각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선불교도연맹의 변호를 맡은 김순식 변호사(재일동포)는 "법원이 왜 행정부의 업무인 외교적 문제까지 신경을 쓰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조선불교도연맹으로부터 법률적 권리를 위임 받은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1차 조정에서 율리사지 석탑을 취득한 것은 100년 전인데 조선불교도연맹은 1945년 이후 성립됐으므로 소유권 당사자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던 오쿠라 재단에서 율리사지 석탑을 돈을 받고 돌려줄 생각은 전혀 없다며 외교적으로 해결된다면 반환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한 것은 성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담 스님과 혜문 대표는 2차 조정 후 전일본불교연합회 행사에 참석해 가자마 전 외무성차관에게 평양 율리사지 반환에 협조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두 단체 공동 명의의 공문을 전달했다.
이 공문에는 지난 2002년 고이즈미 수상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일국교정상화를 위해 발표한 평양선언에는 문화재반환에 양측이 성실히 임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영담 스님은 "지난 2014년 스톡홀롬 합의 이후 북일 관계는 새로운 진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신뢰와 우호에 기반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시대를 위해, 그리고 경색된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은 커다란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쿠라재단이 평양 율리사지 석탑 소유한 배경은?
일제강점기 폐사지에 주지승 있을리 없으니 불법도굴 소유 추정
오쿠라재단 창립자는 오쿠라 기하치로(1837~1928)이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조선 진출에 앞장섰고, 무역과 군수업, 건설업 분야에서 진출이 두드러졌다. 덕수궁 석조전은 오쿠라가 세운 회사 ‘오쿠라구미’가 담당하여 준공했고,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 때 지반공사에 사용된 재료들도 오쿠라구미가 공급한 목재였다. 서울 용산의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의 설립자도 오쿠라이다.
오쿠라는 조선과 중국 등지에서 불법, 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유물을 수집했다. 그는 현재의 오쿠라 호텔 부지 앞에 1909년 오쿠라 박물관을 세웠고, 조선에서 반출해간 유물을 전시했다. 경복궁의 자선당(세자와 세자빈의 침전)을 통째로 옮겨다 ‘조선관’으로 삼아 1917년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다. 자선당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소실됐다.
바로 이 오쿠라 박물관의 정원에 남한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오층석탑이 전시돼 있었다.
2006년 이천 시민들이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수년간 반환협상을 진행했고, 오쿠라 문화재단은 1억5천만 엔(약 14억 원) 상당의 문화재와 교환하자고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
두 석탑에 대해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석탑은 8각형의 돌을 쌓아 올린 양식이라는 점에 일치하지만, 평양 석탑은 북방형, 이천 석탑은 남방형”이라며 “평양 석탑은 기단부가 연화대좌(연꽃모양의 불상 놓는 자리)와 같은 형식을 취해 희소성이 있는 만큼 보물급 유물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오쿠라 박물관 정원에 왜 두 개의 고려시대 석탑이 옮겨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총독부가 이천 석탑의 반출은 허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총독부는 오쿠라 쪽이 평양 정거장 앞에 놓여 있던 칠층석탑의 일본 반출을 요청한 것을 거절하며 대신 경복궁에 보관 중이던 이천 오층석탑을 가져가라고 권했다. 반면 평양 율리사지 석탑과 관련해서는 반출 경위 기록이 없다.
이와 관련 혜문 대표는 “오쿠라 재단의 평양 석탑 소유가 합법적이려면 주지승에게 받거나 매매했어야 하는데, 율리사지에는 사찰이 없었으므로 주지도 있을 수 없었고, 따라서 정황상 도굴꾼이 도굴한 것을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혜문 대표는 “2011년 변호사와 함께 오자키 시부야 오쿠라 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나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말했을 때, 시부야 이사장은 들고 있던 문서를 집어 던지며 ‘나라라’고 화를 냈던 것으로 보아 이 문화재의 반출 경위가 떳떳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