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4일, 음력 팔월 초이틀.

오늘은 초의선사가 149년 전 일지암에서 입적하신 날이다! 말하자면 기일이다. 대흥사에서는 선맥이나 다맥을 이으신 스님들과 차인들 중심으로 다례제가 거행된다.

차살이를 하고 있는 개인으로서 일지암이 지척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더욱이 차가 나는 산지라는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철철이 차를 만들고, 차밭의 동정을 살피고, 싹에서부터 차꽃이 필 때까지의 그 일정 따라가기는 그저 선물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배롱나무 꽃이 세 번 피었다 질 즈음 가을은 온다는데….

거만한 여름의 뒤끝 가을의 초입에서 입적하신 당신의 영정에 차 한 잔을 올리기 위해 일지암으로 갔다. 새벽 6시에 올랐다. 여물지 않은 하루의 풋내가 좋았다. 한복을 입고 헌다기를 챙기고 부산하게 하기 보다는 그저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정갈한 마음만 가지고 향했다. 대흥사에서도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고무신 하나 챙겨 신고 차 우릴 다동과 찻종, 그리고 초의선사가 좋아하는 녹차 한 봉지가 담긴 바구니 하나 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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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주변의 상사화는 촉을 세우고 피어나고 있었고, 무릇도 아직은 멀쩡한 모습으로 일지암 주변을 다채롭게 수놓고 있다. 수국은 마지막 수분을 뺏기지 않으려는 듯 한창 예쁠 때의 수줍음은 간데없고 조금은 사나운 아줌마의 기질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납든 순하든 그도 일지암과 어우러지니 자연이다.

소치(小癡 意恂, 1786~1866)는 『소치실록(小癡實錄)』에서 초의선사와의 꿈같은 인연을 회고하고 기록했다. 소치(小癡)가 1835년에 초의선사와 첫 대면한 소치의 글이다. 당시 일지암의 주변 풍경과 차문화 공간 배치를 이해하는 데 소중한 기록이다.

을미년(1835)에 대둔사 한산전(寒山殿)으로 들어가 초의를 방문했다. 스님은 정성스레 나를 대접하고 침상을 내주며 머물러 묵게 하였다. 몇 해를 왕래하매 기미(氣味)가 서로 같아, 늙도록 변하지 않았다.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였다. 소나무가 빽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몇 칸 초가집을 얽어두었다.

버들은 드리워 처마에 하늘대고 가녀린 꽃들이 섬돌에 가득하여 서로 어우러져 가려 비추었다. 뜰 가운데 아래위로 못을 파고,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茶절구통을 놓아두었다. 스스로 지은 시에, “못을 파서 허공 달빛 해맑게 깃들이고, 대통 이어 구름 샘을 저 멀리서 끌어왔네. [鑿沼明涵空界月, 連竿遙取濕雲泉]”라 하였고, 또 “시야 막는 꽃가지를 잘라내어 없애니, 석양 하늘 멋진 산이 또렷이 눈에 드네. [礙眼花枝剗}却了, 好山仍在夕陽天]”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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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구절이 몹시 많았는데, 淸高하고 담박해서 불 때서 밥 지어 먹는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매양 눈 온 새벽이나 달 뜬 저녁이면 가만히 읊조려 흥취를 가라앉혔다. 향을 막 피우면 차는 반쯤 마셨는데[香初茶半], 소요함이 취미에 꼭 맞았다. 적막한 난간에서 새 소리를 들으며 마주 하고, 깊숙한 굽은 길은 손님이 올까 염려하여 감춰두었다. 방 가득한 책시렁에 놓은 푸른 책들은 모두 불경(佛經)이었다. 상자에 가득한 두루마리는 법서(法書)와 명화 아닌 것이 없었다. 내가 그림과 글씨를 공부하고 시를 읊고 경전을 읽은 것이 장소를 얻은 셈이었다. 하물며 날마다의 대화는 모두 속세를 떠난 높은 뜻이어서 내가 비록 속된 사람이라 해도 어찌 그 빛에 감화되어 함께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乙未年入大屯寺之寒山殿, 訪草衣. 欵曲仍借榻留寓. 往來數載, 氣味相同, 至老不改. 其住處則乃頭輪絶頂之下也. 松深竹茂處, 縛箇數楹草室. 垂柳拂簷, 玆花滿砌, 掩映交錯. 庭中鑿上下池, 榮下設大小槽. 自詩云: ‘鑿沼明涵空界月, 連竿遙取濕雲泉.’ 又曰: ‘碍眼花枝剗}却了, 好山多在夕陽天.’ 此等句語甚多. 而淸高澹雅, 非烟火口氣也. 每雪晨月夕, 沈吟耐興, 香初茶半, 逍遙適趣. 寂寂小欄, 聽啼鳥而相對, 深深曲徑, 怕客來而潛韜. 連架綠袠, 盡是蓮花貝葉. 滿箱玉軸, 罔非法書名畵. 我乃工畵學筆, 吟詩解經, 得其所哉. 況日日對話, 都是物外高情, 我雖凡胎濁骨, 安得不和其光, 而同其塵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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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도 가을이 업고 온 한기에 안간힘을 내고 있는 일지암! 초의선사의 정신과 소치의 문기(文氣)가 서려 기운마저 야무지다. 어찌 일지암의 기운이 이 분들 뿐이겠는가? 소치가 오르고 180년 동안 숱한 차꾼들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지암 복원이 있기까지 애쓰신 이 나라의 굵직한 차인들에게 유천과 물과 차 한 잔 올리고 그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다례제를 마치면 또 행촌선생님과 우록선생님 풀집도 들려야지, 이런 문화 속에서 살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법당과 일지암을 청소하고 유천의 물을 떠 차를 우린다. 먼저 유천수 첫술 떠서 올리고 자우홍련암에서 차를 낸다. 초의선사께서 좋아하셨던 녹차, 두륜산에서 나는 대흥사 녹아차 한 잔! 올려 드렸다. 초의선사가 앉아 두륜산 고계봉을 바라보았을 그 자리에도 차 한 잔 올려 드렸다.

선사가 41세 때 일지암을 결암하고 스스로 만족해했던 노래가 그대로 그림이 되었다.

연기도 안개처럼 가로눕는 이곳에 오랜 인연 있어
병발(甁鉢)의 어슬픈 세간살이, 서까래 몇 개로 떠 받쳤네
돌 털고 흙 파낸 곳에 물 고여 하늘 생기고 달 잠기니
속 빈 나무 길게 이어 백운천을 끌었네

이제, 향보에 새로 올릴 영약(靈藥) 찾으면서
때로 원기(圓機: 敎法)에 연하고
묘련(妙蓮: 부처님 설교)도 펴려하네
눈 앞 가리는 꽃가지들 조심조심 자르니
모습 드러내는 산봉우리들, 저녁노을에 아름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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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의 맛은 참 좋다. 아마도 선사께서도 오랜만에 유천 맛본다 하셨을 거 같다. 자연의 혜택 속에서 살고 있는 시간 시간 감사하다는 의미로 여물지 않은 새벽에 올라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태양감사다례도 올렸다. 지․덕을 겸비하고 시(詩), 서(書), 화(畵), 차(茶)에 능한 스님의 그 정신을 이 시대에 이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누구나 친근할 수 있는 군더더기를 걸치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은 차에 통달하고 시에 입신(入神)한 까닭이었다고 평하는 것처럼… 그렇게 담백하게….

혼자 분주했다. 대흥사에서는 다례제가 행해졌지만 이른 시간 올리고 내려가 참여하고 하루가 소소하게 흘렀다. 그 정신 높이 받들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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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경 박사는 고전민속학을 전공했다. 차고전과 차시(茶詩)를 통하여 우리 차문화사의 미결의 문제를 고민하고 전승의 주체와 기능에 주목하고 있다. 차문화를 향유해 온 주체 연구는 집단이든 개인이든 그들에 의해 생산되고, 공유하고 향유와 확산을 통한 문화 전반의 패러다임이고 밑그림이다. 기록을 훑고 기억을 찾아가고, 차문화의 현장이 그녀의 연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