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기자
urubella@naver.com 2015-08-31 (월) 10:07근대기 한국불교계는 왜 원효에 주목했을까? 신라의 고승이, 그것도 환속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승단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원효가 1000년이 넘는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 재인식되고 부각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불교사에서, 아니 나아가 한국철학사에서 가장 우뚝한 원효가 근대기를 맞아 재등장하게 된 이유와 배경을 일목요연하게 살핀 글이 <불교평론> 가을호(2015)에 발표돼 주목을 끌고 있다.
이 글을 발표한 이는 손지혜 박사로, 현재 일본 오타니대학 역사학과 조교로 있으며, 간사이 대학 동아시아문화연구과에서 문화교섭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다. 이 글은 <근대기의 원효 재발견자들.(<일본사상> 제28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5)과 <근대일한불교의 교섭과 원효론>이라는 간사이대학 박사논문을 토대로 요약, 수정한 원고다.
손 박사는 먼저 원효의 동아시아 3국 불교에 대한 폭넓은 영향력을 일별하고, 고려 중기 숙종에 의해 화쟁국사로 추증되는 등의 기록을 살핀 후, 그럼에도 원효가 문도를 형성하는 등의 조직적 사상운동을 전개하지 못했고, 저서 대부분이 산실되었으며, 그의 교학도 후학들에 의해 전승되기 어려웠으며, 특히 조선 500년의 긴 기간 동안 숭유억불의 분위기에서 잊혀졌다는 점을 살폈다.
손 박사는 이처럼 명찰의 창건설화 속 인물이나 신비한 도승으로서 이미지화되어 있는 원효가 근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갑자기 재평가되는 배경에 주목했다.
억불로부터의 해방, 일본불교계와의 교섭, 서양종교와 경쟁 등의 배경 속에서 원효가 재부각된 것은 불교교리나 신앙적 측면보다는 일본이 식민 지배하에서의 국가존립, 민족 주체성 문제와 결부된 측면이 크다는 데 필자는 주목했다. 즉 원효는 시대적 요청에 의해 역사로부터 불려나와 당시의 사회와 불교계의 정세에 맞춰 해석됐는데, 그 양상은 전근대의 원효 인식과는 상당히 다른 '민족의 영웅' '개혁적 모델' '통불교의 완성자' '호국승' '선교융합의 이념적 종조' 등 다양한 표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손 박사는 이런 양상에 대해 원효가 근대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적 인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불교의 진리를 체득한 고승에서 '민족사상과 문화 자부심의 상징'으로 재등장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즉 원효의 재조명은 일본불교와 서양종교 등 새롭게 등장한 타자를 통한 자기인식이 생겨난 이유가 크다는 분석이다.
당시 많은 지식인과 불교도들 사이에서 조선불교 정체성의 문제가 강하게 의식되었으며, 원효가 가진 다양한 면모도 이런 인식 위에서 부각된 측면이 크며, 더욱이 사회진화론의 유행과 불교개혁론의 대두, 1930년 후반부터 격화된 전쟁 등, 이전에 겪지 못했던 변화를 단기간에 경험하게 된 불교도들은 적극 세속으로 뛰어들어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손 박사는 보았다.
손 박사는 원효 부상의 또 하나의 이유로 원효에 관한 신자료의 발견과 집성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꼽았다. 1910년대부터 한일 양국 학자들에 의해 원효의 유저 목록이 정리되어 이전까지 40여 부 정도로만 알려졌던 원효의 저술이 90여 부까지 집계되었고,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 <이장의> <십문화쟁론> 등이 주목받는 기회도 얻게 되었으며,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소실된 원효 저술의 필사본이 일본에서 진중하게 전승되었고 특히 타국인이 존숭하는 원효를 본국인인 우리들이 무관심해서야 되겠는가는 반성의 흐름이 일게 되었다는 것이다.
손 박사는 근대기 새롭게 읽힌 원효 이해의 배경에는 식민통치국가인 일본에 대한 저항감, 그렇지만 선진불교국으로 부상하던 일본불교계에 대한 동경, 조선불교는 중국불교의 아류라는 설에 대한 반발, 불교의 과거 위상의 회복 등 복잡한 배경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배경 하에 원효는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하였으며, 불교계 개혁의 모델로 자리잡았고,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이해되는 통불교의 실현자로, 나아가 호국의 승려로, 선교통합의 종조상으로까지 존숭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효의 위상은 일본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일본에서 원효는 한국에서와 같은 민족영웅, 개혁자, 통불교론자로 표상화되지는 않았지만 의상과 함께 조선 화엄의 양대산맥으로 인정하면서도 의상보다는 좀더 비중있게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 손 박사의 설명이다. 손 박사는 한국화엄사의 방계로 취급되었던 원효가 중국화엄과는 다른 독자의 화엄학을 세운 인물로 일본 불교학계에서 각광을 받았으며, 원효의 실천성도 의상의 우위를 점하는 특징으로 부각되었다고 덧붙였다.
손 박사는 그러나 원효가 호국승군단을 창설하던 유신정권기에 의해 이용된 측면도 있다는 점을 적시했다. 예컨대 원효가 화랑의 지도자였다는 근거가 희박한 언급이나, 효창공원에 세워진 원효동상을 올려다보며 왜 유신정권기에 저 동상이 세워졌을까를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손 박사는 결론적으로 “원효는 시대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읽히고 재창출되어 왔다”며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다시 ‘우리에게 원효는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