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천 기자
hgcsc@hanmail.net 2015-08-10 (월) 08:53
30년 넘게 현장포교를 해온 상덕 스님. 세월을 돌아볼 때면 ‘자부심과 보람’이라는 선물을 스스로에게 주면서 미소 짓게 된다고 말했다.
누군가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준다. 성공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사진은 대부분 웃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의 여유와 자신감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읽는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 미타사 정수암 주지 상덕 스님. 그리고 서울 옥수종합사회복지관 관장 상덕 스님. 포교와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상덕 스님을 나타내는 두 개의 호칭이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언제나 환한 웃음꽃을 함빡 담아주는, 몇 해 전 회갑이 지난 64세의 비구니 스님이다.
스님의 주지 경력은 햇수로 46년째. 동진출가해 초등학교 졸업 무렵 노스님이 입적하시고 얼마 안 있어 은사이신 법성 스님마저 병환으로 입적했다. 삭발을 하고 미타 강원에서 내전을 공부한 후, 서울시내 사찰 도반스님들과 명성여중고에 다닐 때였다. 사춘기 소녀들이 갖는 고민과 꿈을 이야기하며 또래들과 어울리는 것은, 상덕스님에겐 먼 거리의 사치스러운 일들이었다. 낮에는 맏 상좌로서 정수암 주지 소임을 보아야했고 저녁에는 학교에 가는 주경야독의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열여덟의 사미니 상덕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렇게 정수암 주지가 됐다.
하지만 20대의 상덕스님은 미래 포교 사찰의 승려로서 공부를 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사숙인 재문 스님이 '절 운영을 도와 줄테니 학업을 지속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명성여고에 이어 동국대 불교대학을 원만히 졸업하게 되었고, 그 뒤에 계획한 대로 주지로서 절 운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상덕 스님은 삼보의 은혜로 대학까지 정규 학업을 마칠 수 있었으니, 정법포교로 보은하는 불제자가 되고자 원력을 세웠다. 스님은 가장 먼저 동진 출가한 미타사 사중(寺中)에 어린이법회를 개설하기로 했다.
“마침 종단에서도 어린이법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각 사찰에 어린이 법회를 독려하던 때였지요. 미타사 대중 스님들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법회 개설준비를 차근히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단국대학교 불교학생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었는데, 이 대학생들 20여 명이 지도교사를 맡기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조용하던 천년고찰 미타사에 어린이 불자들 넘쳐나 ‘활기’
1980년 4월 대학생들은 옥수동 골목골목에 어린이 법회 개설 현수막 과 안내 포스터를 붙이며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마침내 5월 10일 천년고찰 미타사에 역사적인 어린이법회 개원법회가 열렸다.
“개설 당일, 생각 이상으로 많은 300여명의 어린이들이 학부모들과 함께 모여들었습니다. 고요하던 미타사가 갑자기 어린이들의 재잘거림으로 생동감과 활기 넘치는 사찰이 되었죠. 단국대 학생들도 환희불심으로 각반 담임을 맡아 수고했습니다.”
그때, 정기법회가 열리는 매주 일요일이 되면, 어린이들은 학년과 남녀 별로 분반되어, 사찰 여기저기 공간에서 법회를 보았다. 지도법사와 교사도 각기 다르게 선임됐고, 모두 최선의 자세로 법회를 봉행했다. 법회가 끝나면 어린이들은 맛있는 간식을 먹고 즐겁게 놀이를 하는 등 미타사는 참으로 신명나는 불국토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어린이법회 개설 1년이 지나 6학년생이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니 자연히 중등법회를 창립하게 됐다. 또,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위한 고등법회도 창립했다. 그 당시 미타사 초·중·고 법회의 법문과 소식을 담은 <미타법회지>를 매주 발간했다. 이 회지는 청소년들 불심에 꽃을 피우는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린이 불자 50여명이 함께하는 <미타 어린이 합주단>도 그 무렵 창립됐다. 이들은 법회 후에 찬불가와 동요 합주 연습으로 사찰도량을 신명나게 하였고, 매년 12월 25일에는 어린이 법회 각 반과, 중·고등법회생 모두 함께 <미타 송년축제>를 열어 1년 동안의 불심과 법우의 정을 나누었다.
더욱이 미타어린이 합주단은, 종단에서 봉행하는 부처님오신날 봉축 연등행렬에 출연했다.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의 긴 거리를 행렬 맨 앞에서 연주하며 걸었다. 길가 참관인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고, 종단에서도 여러 차례 상을 주어 미타 어린이 합주단을 칭송했다.
미타 대학생법회 역시 고등법회 출신들을 중심으로 창립이 되었다. 대학 졸업생과 직장생활을 하는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미타 청년법회도 1984년 창립됐다. 이때, 어린이·중·고등법회의 지도간사는 자연히 미타 어린이·중·고등법회 출신인 대학생법회 학생들이 맡았다. 선후배라는 끈끈한 정과 인연으로 성실히 지도하는 바람직한 구도가 형성됐다.
돌이켜보면, 스님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의 10여 년간을 매주 일요일 한 번의 거름도 없이 설법을 하며 청년법회를 운영해왔다. 포교에 대한 남다른 사명감이 스님의 열정을 견인한 것이다.
1993년 미타사 사중 회의는 도심 전통사찰로서 미래 새싹들의 불심을 키울 수 있는 보육 전당으로 미타유치원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상덕 스님은 유치원 개원 준비를 맡아 실행 하던 중, 본인이 암주로 있는 정수암 신도들의 청에 의해 정수암 증축불사에 나서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스님이 창립하고 선도해 온 미타사 사중(寺中)의 공동 법회 운영을 사중 법사단에게 위임하고, 유치원 개원 준비도 사중으로 넘겼다.
1995년 현대식 2층 건물로 지어진 미타사 정수암 건물. 공간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법회를 개설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상덕 스님이 상주하며 주지소임을 보고 있는 정수암의 건물이 협소해 스님과 대중 스님들이 기거할 방사가 여의치 않았다. 또한 신도포교를 할 수 있는 법당이 적어 신도들이 늘 불편함을 호소했다. 정수암에는 천년 역사를 지닌 사찰로서 대물린 인연의 신도가 많았었고, 그 신도들이 앞장서서 정수암 건물 증축불사의 화주자들이 되었다.
원래 3층을 짓고자 결정했으나, 사중스님들의 뜻에 따라 2층으로 줄여짓게 된 일, 불사비가 부족해 힘들던 일 등 여러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지만, 마침내 1995년에 증축 불사를 완성하였다. 넓은 공간을 확보한 정수암은 신도들을 위한 새로운 법회를 속속 개설했다. 인등법회, 지장법회, 가족법회, 교양대학 등의 정기법회와, 불교 5대 기념일법회, 그리고 절기에 따라 시행 되는 기도법회 등을 각 법회 전개 방식에 따라 매뉴얼화했다. 매월 6회 이상 진행되는 모든 설법, 인사말과 설법내용, 발원문까지 늘 새롭게 작성해 진행했다. 스님은 그 내용들을 지금까지 자료로 보관해 오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법회를 개설하고, 신명나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정수암 대중의 공덕 때문이었다. 사중의 법회는 회의를 거듭하며 중론에 의해 운영해야 해 의사결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곤 했다. 이에 반해 정수암 신도들은 무조건 한 마음이 되어 스님의 포교 원력을 신뢰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아,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법회 창립과 안착을 이룰 수 있었다.
체계 있는 법회운영과 현실의 고통을 구제하는 힘을 주고자 하는데 포인트를 맞춘 설법 내용은, 정수암 신도로서의 긍지와 애정을 갖게 하였고, 가족, 친지들이 함께 참석하게 하는 좋은 동기가 됐다.
지역포교로 눈길…성동경찰서 법당 짓고 경불회 창립
미타사와 정수암 사내 법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자 스님은 시선을 절 바깥으로 돌렸다. 지역포교에 나서면서 인연되는 외부법회 지원에도 열정을 다했다. 조계종은 1986년 경승제도를 도입했다. 경승교육을 실시 한 후 1경찰서 4인 경승 배치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경승 교육을 받은 상덕 스님은 미타사가 소재한 성동경찰서 경승으로 배치 받았다. 올해로 경승 활동이 28년째다. 그동안 경찰서 안에 법당을 건립해 경찰들의 귀의처가 되게 했고, 경불회를 창립해 매월 법회를 진행했다. 부처님오신날 등에는 성동경찰서 소속 전 경찰을 대상으로 하는 큰 법회와 문화 행사를 다채롭고 체계적으로 운영해 타 경찰서의 모범이 되고 있다.
교도소 법회는 올해로 25년째다. 선배스님의 인도로 1990년 영등포교도소에 인연이 됐다. 3년 전 까지 매월 법회 진행과 위문공연, 위문품 전달 등을 해왔다. 스님은 지금도 맨 처음 법회를 하며 놀랐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고 했다.
“100% 남자만 300여명 모인 강당에서 설법을 하는 것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실내 공기에 어지러움증도 느꼈었고, 교도소라는 특수 환경에서 길고 짧은 형을 살고 계신 분들께 어떤 주제와 내용의 설법을 해야 할까 무지 고심했던 생각도 납니다. 하지만 다른 법회와는 다르게 재소자들은 온 마음, 온 정신을 집중해 진지하게 설법을 경청합니다. 그리고 감동으로 이어져 자신의 삶의 변화에 지침으로 삼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등포교도소 서울구치소 재소자법회서 설법…성동구청에 바라밀회 결성
스님이 법회를 하고 돌아온 며칠 뒤면 어김없이 편지들이 여러 통 오곤 했다. 마치 녹음한 것처럼 법문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있는가 하면, 설법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반조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 진심으로 참회하고 새 삶을 살겠다는 다짐과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정성껏 써서 보내온 편지도 많았다. 편지를 읽으며, 사회를 맑히는 일에 일조를 한다는 자부심이 들기도 했고, 재소자들의 간절한 심정을 이해하게도 됐다. 이 편지들이야말로 힘든 사중의 여건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스님이 오랜 기간 교화설법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때, 교도소 종사자들의 불자모임 법회인 불심회의 청으로 매월 설법을 하러 법회에 참석했다. 영등포교도소와 담장을 사이로 둔 영등포 구치소에서도 연락이 왔다. 직원으로 일하는 불자들이 구치소 교화위원으로도 활동해주기를 강권해 구치소에서도 월1회 법회를 봉행했다. 결국 한 번 갈 때, 교도소와 구치소의 법회를 이어서 함께 봉행하며 오후 한 나절을 모두 보내고 저녁에서야 힘들게 절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구치소의 직원 불자들이 법회 창립을 희망해 사홍회라는 이름의 불자회 창립을 도왔다. 그리고 지도법사로서 매월 정수암에서 퇴근 후 저녁 시간에 법회를 보도록 배려하고 설법을 해주며 저녁공양을 정성껏 대접했다.
정수암 경내에 있는 게시판. 상덕 스님이 주관하는 곳곳의 법회 일정이 기록돼 있다.
스님은 성동구청 불자모임인 바라밀회를 1991년도에 창립했다. 당시 구청장의 의지를 바탕으로 불자회를 창립을 원하는 불자들과 인연이 됐다. 지금까지 지도법사로서 법회 운영과 설법을 매월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공공단체 불교 법회에 참여하면서 불심으로 업무를 보는 불자들이 더욱 모범적으로 신명나게 일하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불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고양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보람이었다. 스님은 공공단체와 지역단체에 불자회를 창립하고, 정기법회를 주도 하는 한편으로, 여기저기 설법 청이 있으면 마다 않고 인연에 감사하며 성실히 찾아가 설법을 해왔다. 한국전력과 한국은행 불자회 그리고 각 신행 단체 등에 정기, 비정기적으로 불연의 탑을 쌓았다.
돌이켜보면 상덕 스님은 30대와 40대 시절을 온전히 포교의 시간으로 채우며, 바쁘게 지나왔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은사스님이 계시지 않은 여건의 암자에서 정기적인 법회들을 창립 운영하며 30여 년을 이어왔다. 부처님 은혜에 보은하고자 하는 원력과 천년 역사의 도심 전통사찰의 승려로서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이었다. 스님은 세월을 돌아볼 때면 ‘자부심과 보람’이라는 선물을 스스로에게 주면서 미소 짓게 된다고 말했다.
열심히 다양한 포교에 매진한 공로로 받은, 법무부 장관상, 서울경찰청장상, 포교대상 등 30여 종의 상패와 상장들은 바쁘게 뛰었던 노고를 증빙해 주고 있다.
매월 6~10회 설법…자료 준비에 밤새우기 일쑤
정수암의 여러 법회 설법과, 외부지역 단체법회들의 설법에는 각각의 자료가 준비돼야 했다. 각 대상자들에게 맞는 설법을 하기 위해, 스님은 매일 많은 서적을 주위에 쌓아놓고 인터넷을 찾으며, 매일 밤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잠자고 먹으며 살아가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 외에는 설법 준비와 법회, 평가, 또 다시 법회 준비, 시행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2005년도부터는 파워포인트 법회를 진행하여, 설법내용에 맞는 동영상과 사진, 음악까지 첨부하며, 오감만족의 법회를 운영하고 있다, 날이갈수록 설법과 법회준비에 더욱 많은 노력과 시간이 투여되고는 상황이다.
스님은 현재까지, 매월 6회~10회 정도의 법회 설법을 해오고 있다. 살펴보면, 살아가기에 필요 한 최소한의 시간 외에는 설법 준비와 법회 진행, 사후평가와 자료 정리, 또 다시 법회 준비, 시행의 연속인 셈이 된다.
더욱이 스님은, 부처님 진리를 전함에 있어, 현대인들의 삶에 빛과 행복이 되고 불심으로 자기생을 온전히 살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매일 저녁이면, 학교에 가서 다양한 과정을 이수하며 내용 있는 설법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동국대학교에만 7개의 졸업장을 지니고 있다.
“20대 후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30대부터 부처님 은혜에 보은하는 승려가 되고자 포교 원력을 세운지 3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20여개의 이르는 법회를 개설해 꾸준히 시행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결과에 대한 만족보다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던 법열의 과정들에 더욱 깊은 의미의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건강한 심신으로 부처님 정법 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몸을 아끼지 않고 절일을 해온 사제인 정수암 총무스님과 상좌들, 그리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포교 대열에 동참해준 정수암 보살님들과 마야합창단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포교에 나서려는 후배 스님들에 대한 상덕 스님의 조언
포교 30년의 경험으로 볼 때 우리국민들 마음속에는 불교적 감성이 내재 되어 있고, 잠재된 불자들은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승려의 두 가지 사명인 수행정진과 전법포교를 시행할 원력을 굳건히 세우면 뜻한 바대로 포교 인연이 맺어지고 성취의 법열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급변하는 사회 현상을 잘 읽으며, 사회인들의 종교적 욕구도 파악해야 합니다. 현재 각자 스님들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포교 원력과 승려의 사명을 중심축으로 삼고, 상주하는 절 부터 정기법회를 개설해 활성화 시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 사찰 주변 지역 으로 눈을 돌려, 가까운 인연 공동체들에 관심으로 다가가 포교 인연의 터를 만들어 나 가야 할 것입니다.
포교에 나서려면 먼저 교리에 대한 확실한 인지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사람을 다루는 인문학과 유모어, 유행어들도 살피며, 지루하지 않은 설득력 있는 설법, 경청 자들의 현실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설법내용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자마다의 애로점 등 상황을 잘 파악해 최대한 해소해주려는 노력과 성의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맞춤형, 찾아가는 형, 상생형의 설법을 통해 불국 정토를 이룩해가는 부루나의 후예들이 요구되는 시대라 하겠습니다.
젊은 후배 스님들에게 용기와 노력이라는 깃발을 들고 정법포교의 길을 꿋꿋하게 가기를 권합니다. 이 길만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의 불교가 되는 길이고, 미래에도 불교가 존립 하는 최선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