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ㆍ문화재 > 학술

불교사학계 ‘작은 거인’ 요절에 대한 아쉬움 여전

이학종 기자 | urubella@naver.com | 2015-08-04 (화) 11:34

떠난 지 2년 흘렀지만 그리움 식지 않아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2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를 추모하는 자리는 숙연했다. 석학의 반열에 오른데다가, 정년을 마치면서 이제 막 연구에 전념할 시점에 세상을 버리다니! 돌연한 죽음에 대한 아쉬움, 안타까움, 그리고 너무나 소탈하고 자애로웠던 작은 거인 김상현이 불교학계에, 아닌 불교계에 남긴 여운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고(故) 김상현 교수 추모 국제석학 초청 강연회가 '의상과 만해의 화엄학'을 주제 7월 28일 오후 1~6시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센터 주관으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고 김상현교수추모위원회, 동국대 사학과가 함께 마련했다. 

 

김 교수의 제자인 손성필 고전번역원 연구원의 약력보고 및 경과설명에 이어 학문적 도반이었던 정병조 추모위원회 위원장과 평생을 함께 지음의 사이로 지냈던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등이 나서 고인을 추모했다.

 

"이 분을 너무 일찍 떠나보내 한국 불교사학의 큰 맥이 끊긴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권상로, 안계현의 뒤를 이어 김상현 교수가 한국 불교사학의 맥을 이었는데, 70도 되기 전에 타계를 하시다니…."

 

학계의 선배이자 도반이었던 정병조 전 금강대 총장의 목청이 무겁게 학회장에 울려퍼졌다.

 

“이 분의 학문적 어빌리티(역량)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불교적 소양을 가진 DNA는 다솔사 최범술 스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범술스님은 학승으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필독서 중에 <원효의 반야심경소에 관한 연구>라는 짧은 논문이 있었는데, 범술스님의 논문이었지요. 원효의 반야심경소를 여러 자료를 가지고 복원한 것이었는데, 매우 주목할만한 연구였습니다. 당시에 이런 논문이 우리 불교학계에 나왔다는 자체가 놀라움이었지요. 김상현 교수는 바로 범술스님의  그 DNA를 이어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이기영 선생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김 교수는 매우 큰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내년 3주기 추모 때 4권 분량의 추모집이 나올 예정이라니 추모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기쁩니다. 작은 거인이었던 김상현 교수가 우리 곁을 떠난 지 2년이 흘렀습니다. 이 분이 꿈꾸었던 도솔의 세계, 학문의 세계가 여기 후학들에 의해 잘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스승 추모 모습 보니 김교수와 효당의 사제지정 떠올라

 

이어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생전 김 교수와 막역한 인연관계를 맺었던 김 이사장은 눈가는 이미 촉촉하게 물기가 고여 있었다. 김 교수의 돌연한 타계가 얼마나 큰 충격이었던지, 김 이사장은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수십 년째 김상현 교수와 의기투합해 진행해오던 삼성뮤지엄아카데미도 접어버렸을 정도다.

 

“오늘 이 자리에 오니까 불가의 인과법문이 참으로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그것을 입증하는 것 같습니다. 효당 최범술 선생에게 차를 배울 때, 그 후 서울에서 차선회를 할 때부터 저는 김 교수와 인연이 있었습니다. 원효, 만해에 대해 유난히 애정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 김상현 교수가 스승인 효당 선생이 친일로 분류되어 친일사전에 명단이 올랐을 때 스승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효당의 항일운동 증거를 찾아내고자 기울인 노력, 그리하여 마침내 스승의 항일 기록을 논문으로 발표하여 친일명단에서 스승의 이름을 빼내는 역할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사제의 정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고인이 그런 분이었으므로 오늘 이 자리, 손성필, 이종수 박사 등 그의 제자들이 스승을 잘 모시는 추모행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아, 인과법은 이런 것입니다.”

 

이날 고 김상현 교수 추모 국제석학 초청 강연회에는 정병조 전 금강대 총장,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백효흠 대불련총동문회장, 박태원 울산대 교수, 고인이 봉직했던 동국대 사학과 교수들, 그리고 이날 초청된 이시이 코세이 교수(일본 고마자와대), 박노자 교수 (노르웨이 오슬로대) 등이 함께 했다. 

 



고 김상현 교수 추모 국제석학초청 강연회 모습.

 

제자 이종수 교수의 스승이 남긴 고별강연록 낭독에 장내 숙연

 

김상현 교수의 수제자 격인 이종수 순천대 교수가 김 교수가 동국대에서 정년퇴임하던 날 행했던 고별강연록 ‘불교의 역사관’을 낭독하는 것으로 제1강연이 시작됐다. 이종수 교수는 스승의 유고록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정성을 다해 읽어나갔다. 스승에 대한 애틋함이 이 교수의 목청에 진하게 배어 있었다.

 

김 교수의 생전 사진으로 편집한 비디오를 감상하고, 육성이 방송되는 동안 장내에는 작은 흐느낌도 감지됐다. 저마다 눈가가 붉어지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있었다. 김 교수와 많이 닮은 아들 영재 군이 유족을 대표하여 인사를 나눌 때는 김 교수를 만나는 듯 반가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이날의 메인 순서인 국제석학 초청강연회가 열렸다.


먼저 이시이 코세이 교수가 나서 ‘신라 화엄종에서의 악(惡)의 문제: <화엄경문답>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이시이 교수는 강연에 앞서 자신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 김상현 교수의 영향이었다는 점을 밝혔다.

 

이시이 교수, 김상현 선생과 연 화엄경문답의 의상계 문헌 확정 세미나 회고
 
<화엄경문답>이 중국 법장의 저술이 아니라 의상의 제자인 지통이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이시이 코세이 교수와 김상현 교수가 공통으로 강조한 것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들은 <화엄경문답>을 신라 의상계 문헌으로 확정짓는 의미를 가진 국제세미나를 금강대에서 가진 바 있다. 이시이 교수가 이날 강연주제로 삼은 <화엄경문답> 안에 나타난 악을 검토하는 강연은, 그러니까 이시이 교수가 고인에게 보내는 최고의 헌사에 다름 아니었다.

 


일본 고마자와대 이시이 교수의 발표 모습.

 

“지엄은 유식학 문헌에 밝았지만, 의상에게서 유식학의 영향은 적게 나타납니다. 의상은 오히려 지론종으로부터 독특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강연은 지론종과 삼계교가 의상에게 어떻게 나타났나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이시이 교수는 <화엄경문답>에서 ‘악’에 관한 논의, <화엄경문답>에 영향을 미친 <장자>의 사상, ‘대수고(代受苦)’의 문제 등을 차례로 거론하면서 논의를 펼쳐나갔다. 이시이 교수는 “<화엄경문답>은 초기 신라화엄종의 문헌이지만, 여기에는 당시의 당과 신라 불교계의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며 “이 책은 한국과 중국에서는 사라져버렸지만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전해지며 존숭되었기 때문에 <화엄경문답>을 연구하는 것은 일본의 화엄학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이시이 교수는 이어 “우리들은 <화엄경문답>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셨던 김상현 선생님의 열의를 계승하여 사상과 문장의 두 가지 방면에서 <화엄경문답> 연구를 추진해갈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추모학술강연 불구 예리하고 수준 높은 질의응답 오가

 

이어 질의응답 시간에는 많은 제안과 수준 높은 질의응답이 오갔다.

 

박태원 교수(울산대 철학과)는 “김상현 선생이 하루는 전화를 해서 아주 흥분해서 이시이 선생이 <화엄경문답>이 의상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서 <추동기>를 보았는데, 완전히 의상계라며 아주 좋아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화엄에서 악의 문제가, 언어의 지관에서 살아가는 한에서는 모든 개념은 반대적인 개념을 반드시 수반할 수밖에 없다. 반대의 개념, 예컨대 선악의 문제가 어쩔 수 없이 만나면서도 그 충돌의 문제를 불교철학에서 흥미롭게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불화(不和)를 제3의 기제를 통해 풀어나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불교학자와 철학자들이 함께 공동작업을 해봤으면 한다. <화엄경문답>을 보면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 원효를 읽다가도 법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점이다. 변격한문에 대한 탐구, 악의 문제를 철학적 시선과 합류시킨다면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이시오 코세이 교수는 박태원 교수의 제안에 대해 매우 좋은 제안이라고 화답한 후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의상의 경우 일승법계도에는 중도를 거론하지만 <화엄경문답>에서는 이상하게도 중도는 거론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의상의 경우, 장자의 영향을 받은 담천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지엄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원효의 한문 문장은 중국 사람도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한문 문장의 한국적 표현에 대해서는 이미 발표한 바 있다. 재밌는 것은 신라 혜초의 경우는 왕오천축국전은 한문 문장이 많이 이상하다. 그것은 아마도 신라에서 중국, 인도로 가서 한문이 서툴러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혜초는 중국에 오래 머물러서 만년의 문장은 아주 미문이 되었다. 저는 성덕태자의 글도 연구하는데, 그것도 도교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국제적인 연구로 천착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어 동국대 김천학 교수는 “선악의 문제에서 (이시이 교수가) 선과 악을 상대적으로 해석한 것이 약간 의문스럽다. 아마 상시(相是)를 그렇게 보신 것 같은데, (저는) 의상이 선과 악을 상즉으로 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에 상시를 상즉(相卽)의 의미로 푼다면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시이 교수의 생각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이시이 교수는 “김천학 선생이 질문한 것처럼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차약선악상시지의설(此約善惡相是之義說) 위차악비피선즉실(謂此惡非彼善卽失)에 차와 피가 나오기 때문에 상즉이 아닌 상대적 의미로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답변했다.

 

금강대 이영진 교수의 “결사를 전공하고 있어서 엔닌의 입당구법기에 나오는 적산법화원의 의례로서 정형화한 간경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견해를 묻고 싶다”는 질문에 대해서 이시이 교수는 “엔닌의 기록에 보면, 산동성 적산법화원에 대해서도 논문을 쓴 것이 있다. 이 선생이 말씀하신 주 법사가 강의를 하고 두 법사가 있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화엄경문답>은 격식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문답을 나누고 있어서 오히려 선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하나 <화엄경문답>이나 <법계도기총수록>에도 초기 선종에서 볼 수 있는 용어들이 등장한다. 또한 삼계교뿐만이 아니라 초기 선종의 근거지도 종남산에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도 <화엄경문답>은 초기 선종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적산법화원처럼 의례로서의 간경은 정형화된 형식화된 것이지만 <화엄경문답>은 아무리 봐도 격식이 없어서 선종의 영향이라고 본다”고 답변했다.

 

금강대 석길암 교수의 “‘대수고’를 이야기하면서 삼계교 이야기를 하셨는데, 즉 의상이 삼계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저는) 삼계교 영향이 아니라 화엄경의 배자체불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대수교는 화엄경 십회향의 영향이 아닐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시이 교수는 “배자체불은 원래 지론의 영향인데, 지론에서 화엄이나 삼계교에 다 영향을 준 것이므로, 그렇게 볼 수 없다고 본다”고 답변했다.

 

박노자 교수 “김상현 선생 소개로 만해 만났다”

 

이어 박노자 교수가 ‘만해불교, 그리고 화엄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박 교수 역시 강연에 앞서 김상현 교수와의 각별한 인연에 대해 소개했다.  

 

“어느 날 김상현 교수께서 제게 만해를 연구하라고 과제를 주셨다. 식민지 시대 나온 ‘님의 침묵’이라는 시의 복사판까지 주시면서 연구를 당부하셨다. 그것이 오늘날 제가 만해에 대해 연구하게 된 계기”라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식민주 초기 조선사상사에 불교의 위치를 설명해야 하는데, 조선시기 불교는 매우 위축된 시기였다. 그렇지만 개화파에서는 김옥균 등이 불교에 심취했고, 불교는 대중종교로서 영향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또 당시 대찰들이 불사 등에 지역의 토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불교가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고 조선시대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정리했다. 

 


박노자 교수의 발표모습.

 

이어 박 교수는 “개신유교파들, 즉 박은식, 장지연 등은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을 통해 유교를 근대화시켜서 민족의 종교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다. 중국의 양계초 같은 사람은 유교보다 불교를 중국의 국교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물론 개신유림들도 불교를 자주 언급하기는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교주의였다. 또한 당시 급진적인 개신교도들은 유교를 받아들이면서도 불교를 배척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승만, 윤치호 등 급진파 개신교도들은 불교를 배척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반도 남반부는 미국의 영향으로 개신교와 천주교가 중심파로 부상하게 되었다. 불교는 개신유림과 기독교 사이에서 불안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정리했다. 

 

박노자 교수 “만해는 이광수, 최남선과 다른 길 걸어”

 

“그 당시 불교도 중에서 시대에 눈을 뜬 사람은 있었다. 만해 한용운, 소설가 이광수, 최남선 등이다. 그러나 만해는 최남선, 이광수와는 그들의 친일 문제로 결별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일본에서는 불교가 엄청나게 대접을 받고 있었고, 기독교와 ‘맞짱’을 뜰 수 있는 철학으로서 불교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근대 불교사에서 최남선은 꼭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한국불교사의 상당부분이 최남선이 만든 틀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최남선은 조선불교는 통불교라는 최종적 결론으로 불교의 틀을 규정했다. 이런 과정에서 최남선은 원효야말로 화엄을 중심으로 불교를 통합했다고 하는 주장을 펼쳤고, <삼국유사>를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사에 중요한 책으로 자리매김시키는 역할을 했다. 불교와 국가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거린 것이다. 최남선은 20년대에 민족의 개념에서 뒤로 갈수록 국가로 개념의 이전을 했다. 그의 불교관도 당연히 민족불교에서 국가불교로 전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광수는 애당초에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들이 죽고 <법화경>을 읽으면서 불교에 귀의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역시 불교보다는 국가에 복무하는 논리를 개발했다. 보살행은 조건 없는 충성이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최남선, 이광수 모두 원효를 중심으로 불교를 생각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광수는 소설 <원효대사>에서 원효를 대사이자 애국자로 표현하고 있다. 최남선과 이광수의 불교 논리를 살펴보면 오늘날 불교 논리의 통념의 틀을 그들이 제공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노자 교수의 독특한 불교사 정리에 청중들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만해는 출발점은 최남선, 이광수와 비슷했지만 귀결점은 아주 달랐다. 만해 한용운도 개화승으로 활동을 했고, 사회진화론의 논리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불교유신론>을 보면 사회진화론이 배경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문명을 야만적 문명이라고 규정하면서 불교를 대안적 문명으로 제시한 것이다. 자유주의, 세계주의, 보편주의 등이 그런 것이고, 이런 개념은 불교의 근대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만해는 선불교의 해탈을 자유로 해석했고, 불교의 보편적인 논리를 근대적인 개념으로 해석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오역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창조적 오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최남선에게는 불교가 기독교에 맞설 수 있는 철학적 대안이었듯이, 만해에게도 불교는 비서구적, 탈서구적 대안이었다.”

 

오슬로 대학의 외국인 교수가 어쩌면 저렇게 한국불교 근현대사에 정통할 수 있는지, 한국어가 유창할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상즉상입은 일체중생의 보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와 칸트를 단순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서구에 대한 문명적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시도 자체가 상당히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해는 민족, 사회진화론으로 시작을 한 것인데, 그 견해는 최남선이나 이광수와는 달랐다. 이들은 민족에서 국가로 갔지만 만해는 달랐다. 만해는 삼일운동 주역이었고, 감옥에서 쓴 <조선독립의 서>에서 식민지를 거부하고 세계 만국의 평화공존이라든가, 침략에 대한 반대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삼일운동에서는 민중의 힘을 확인한 후에는 더 이상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급진적인 논리인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민중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실천적 자세를 갖게 되었고, 만해는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적극적인 주장을 펼쳤다. 석가가 사회주의자라고 하거나, 석가의 카스트 반대를 근대적인 탈계급으로 해석을 해서, 일본의 불교사회주의, 스리랑카의 불교사회주의와 견줄 수 있는 조선의 불교사회주의를 정립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박창환 교수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만해의 불교관에 대한 박 교수의 해석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만해의 불교관은 선불교 이외에도 다른 불교이론도 총체적을 거론한다. 천태와 화엄의 논리를 개화기부터 관심을 보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에도 김상현 선생을 비롯하여 몇몇 학자들의 관련 논문이 있다. 근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화엄은 매우 중시되었다. 일본은 화엄의 총체성을 천황주의로 해석하면서 제국주의와 결합을 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화엄을 철학적 논리로 대중화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용성의 경전번역 중에 <조선글 화엄경>도 있다. 박한영 스님은 전통화엄학 연구의 길을 연 분이기도 하다. 이광수이 친척인 이운허도 화엄주의자였고, 탄허스님도 화엄주의자였다. 다만 만해는 화엄학을 좀 더 시대적으로 해석한 것 같다. 만해는 <불교대전>에서 집중적으로 화엄을 거론하고 있다. 일본의 불교성전이 <불교대전>의 저본이다. 기독교의 바이블에 대항할 수 있는 경전이었다. 만해는 본인의 방식으로 <불교대전>을 엮은 것이다. <불교대전>에서 인용한 화엄의 내용은 500여개 구가 된다. 불교의 총체성, 우주성을 강조하고 완전한 상대주의가 평등으로 나아가고, 자유 등의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불교의 근대화를 기한 저술이기도 하다. 만해는 선불교의 덜 발달한 철학적의 부분을 선불교와 연결된 화엄을 통해 보총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근대불교에서 만해와 자주 비교되는 분이 중국의 태허이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 차이라면 정치적 포지션이나 급진성에서 약간 차이가 난다. 태허도 처음에는 급진적이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타협주의적인 입장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에서 만해만큼 급진적인 불교사회주의자는 없었다. 그만큼 불교의 현실이 급박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후에까지 만해가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몽양 여운형과 함께 했을 가능성이 크다.”

 

청산유수처럼 만해와 화엄학을 설명한 박노자 교수의 강연이 끝나자 청중들은 큰 박수로 그의 노고를 격려했다.

 

김상현 교수의 제자인 이종수 순천대 교수가 첫 질문에 나섰다.

 

“20세기 초 이능화 등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승려의 7, 8할이 화엄승이고 20~30%만 선승이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당시 불교계에서 화엄이 주요 교재였다. 만해가 <불교대전>에 인용한 화엄 요소가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달라.”

 

이에 대해 박노자 교수는 “만해는 아무래도 선의 전통을 이었고, 선불교 이외에는 화엄, 천태, 유식 등에 관심을 가졌다”고 간단히 답변했다.   

  

이원섭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는 만해와 아나키즘의 관계가 가설로 구체화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좀 더 나아가 불교와 아니키즘을 연결시킬 가능성이 있는지? 사회주의적 경향성도 아나코코뮤니즘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보는데, 박 교수의 견해는 어떠한가를 물었다.

 

박노자 교수는 “만해가 급진적이기는 한데, 아나키즘과의 관계를 추론하기는 어렵다”고 답변했다.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김상현 교수의 장년 김선재 양은 “박 교수는 만해시에 나타난 코드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를 물었고, 박 교수는 “만해의 시 안에는 키워드가 있는데, 그것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시 속에 국가의 억압체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고 답변했다.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전   다음
Comments
비밀글

이름 패스워드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