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7일 오후 7시. 미붓아카데미(대표 이학종) 주최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의 두 번째 강좌가 지난 7월 10일 개강에 이어 진행됐다. 개강 당시 140여 명의 수강회원이 몰려든 열기가, 참석인원을 80명으로 제한한 두 번째 강의에도 이어지는 ‘기현상’이 다시 한 번 재현됐다. 또한 이날은 ‘황 설 중’이라는 한 걸출한 철학자의 화려한 불교계 데뷔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쯤 미붓아카데미로부터 ‘회의주의와 불교’, 즉 피론주의와 중관사상의 상호관계를 조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황설중 교수(대전대)는, 전공외 분야인 불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렵다는 중관을 전공자 수준으로 독파해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황 교수는 지난 두 달여 기간 동안 미붓아카데미 스탭진에서 제공한 ‘피론주의와 중관’ 관련 영어 논문을 20편 넘게 정독했다. 뿐만 아니라 김성철 교수 등 국내 불교학자의 중관, 공성 등의 관련 전문서적을 초인적 의지로 읽어냈다. “지난 두 달, 고3처럼 불교를 공부했다”는 그의 말마따나 용수(나가르주나)는 그의 뇌 속에, 마치 스폰지에 잉크가 번지듯 스며들었다.    

두 번째 강좌에 참석한 80여 명의 청중들이 놀란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2시간 동안 청중의 시선을 강연에 몰입하게 하는 황설중 교수의 능수능란한 강연 능력에 너나없이 혀를 내둘렀다. 두 시간 동안 모든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탁월한 내공이 놀라왔다. 이번 강연을 하기 전에는 불교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한 철학자가 미붓아카데미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순식간에 스타급 철학자로 재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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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론주의와 불교’, 황설중 교수가 이날 들고 나온 강연의 주제는 서양철학사에서 그리스 회의주의로 불리는 피로니즘과 용수의 중관의 유사성과 상관관계를 조명하는 것이었다. 피론주의가 서양철학사를 관통하여 극복해야할 주요한 ‘장애’였듯이, 불교철학에서 용수의 공(空)은 이전의 모든 불교학파의 사상과 주의주장을 융합 회통한 것이었으며, 용수 이후의 불교사상사에 반드시 극복해야할 장벽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피론(Pyrrho: B.C. 365-275)이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때 방문한 ‘인도에서 알몸의 수행자들과 동방의 사제들과 교분을 맺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후에 이 경험으로 그는 판단유보라고 하는 가장 고상한 철학을 채택하게 되었고 고향에 돌아와서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회의적 교설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집니다.”

황 교수는 당시 피론이 펼쳤던 가르침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에 있어 이것인 만큼 저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라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현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피론의 학설의 전부”라고 소개했다.
 
“플린토프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을 간파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며 독단적인 모든 주장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불교가 피론에게 미쳤을 다양한 영향들을 가늠해 보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사구논법(quadrilemma·Catuḥ koṭi)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것은 ‘피론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는 전례가 없는 사유 양식’이기 때문이지요.”

“피론과 불교의 영향사에 대한 문헌 자료는 빈약하며, 따라서 -피론이 불교에서 주요한 회의주의 교설의 핵심을 빌려온 것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하더라도- 양자의 관계는 간접적인 정황적인 증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한 황 교수는 “그러나 피론과 불교와의 직접적인 연관을 증명할 길이 막혀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거기에 관해 여러 의견이 피력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피론 이후 그의 회의적 모토를 계승하여 그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피론주의자의 논변 이론과, 용수(Nāgārjuna: 약 150-250) 에 의해 창안된 중관학(Madhyamaka)의 논리가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황 교수는 “일찍이 콘쩨는 불교와 제대로 비교될 수 있는 세 가지 유럽 철학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의 회의주의라고 평가하면서 ‘중관학과 가장 가까운 유럽 철학의 체계는 그리스의 회의론’이라고 적시한 바 있다”며 비교적 최근에 피론주의와 불교의 관계에 대한 저서를 낸 쿠즈민스키는 이 책의 서문에서 ‘피론주의는 몇몇 동양의 비독단적이고 구원론적인 전통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중관학과 그렇다.’ 다른 이들의 표현을 빌리면, 피론주의와 중관학은 ‘두드러지게 비슷하고 거의 동일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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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론주의 논변 이론을 집대성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약 2세기 후반)의 저작들은 단순히 몇몇 경쟁하는 이론들을 조준한 것이 아니라, 모든 독단론을 –말하자면 모든 진리론을- 무너뜨릴 수 있는 회의주의자들의 영원한 무기창고와도 같은 위상을 갖는다”고 밝힌 황 교수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선보인 무기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정교한 무기는 무엇보다 아이네시데모스(Aenesidemus: 약 B.C. 1세기)와 아그리파(Agrippa: 약 1세기-2세기)가 고안해 낸 논변형식들(tropen)”이라고 정리했다.

황 교수는 이어 “내 생각에, 피론주의와 중관학의 근친성을 언급하려면, 잡다하게 널려 있는 양자의 유사하거나 공통적인 사소한 측면들을 끄집어내는 고단한 -그러면서도 수월한- 작업보다는, 피론주의 이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아이네시데모스와 아그리파의 논변 형식들의 구성이 중관 논리의 그것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원리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좀 더 의미 있고 중요한 것 같다”며 도표를 통해 피론주의와 중관 논리의 유사성을 살폈다. 

“‘이것이 아닌 것 못지않게 저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철학적 기술(技術)을 연마한 자, 그가 바로 회의주의자”라고 소개한 황 교수는 “회의주의자는 -비록 사물의 현상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판단할 수 있어도- 사물 자체의 본성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긍정하지 않고 또한 부정하지도 않으며, 일체의 ‘판단을 유보(epochē)’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렇게 판단을 유보할 때 마침내 회의주의자들이 목표로 했던 바 ‘마음의 평정(ataraxia)’이 찾아온다고 덧붙였다.

피론주의의 핵심적 개념들을 개괄해 살핀 황 교수는 “이것만으로도 벌써 피론주의와 중관학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즉 중관학에서 말하는 사상적 중도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표현을 빌리면- 다름 아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일 것이며 이런 중도는 비유비무(非有非無), 불일불이(不一不異), 불상부단(不常不斷)과 같은 표현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상주(常住)에 대한 집착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단멸적(斷滅的) 견해이다. 그러므로 명석(明晳)한 자(者)는 존재성이나 비존재성에 의거(依據)해서는 안 된다는 용수의 중론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게서나 용수에게서나 지혜로운 자는 갈등하는 의견이나 믿음 중 어떤 것에도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전제한 황 교수는 “일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 즉 일체의 진리론에서 벗어날 때 아타락시아나 열반이라는 궁극적 경지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도 양자는 같은 눈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황 교수는 아이네시데모스의 10가지 트로펜(일종의 논변의 공식들)과 용수의 연기설을 비교하며 피론주의와 중관학의 유사성 관계를 설명했고, 피론주의자들이 당대의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회의주의 이론을 정련해 갔듯이, 용수 또한 아트만(Ātman)을 고수하는 바라문 철학이나 법유론(法有論)을 주창한 아비달마 학파의 다양한 교설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연기설을 좀 더 수미일관하게 다듬었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일체의 독단적인 진리 이론의 정초 불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피론주의자가 ‘긍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 판단유보의 태도를 취했다면, 용수도 마찬가지로 ‘이것도 아니고(非) 저것도 아니다(非)’는 중도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또 “아이네시데모스의 판단유보나 용수의 공이나 모든 것의 상호 관계성을 통해, 즉 연기를 통해 ‘이것도 아닌 만큼 저것도 아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포개지며, 판단유보나 공은 -관계항을 구별하고 고정하여 사태를 파악하고 설명하려는- 모든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립적 존재를 상정하는- 모든 실체론적 사유에 대한 파괴라고 할 수 있으며, 양자는 공히 ‘현상 배후에 은폐된 혹은 현상을 초월해서 있는 ······ [사물의] 본성 자체에 관한 주장에 저항하는’ 공동의 이론적 요새를 구축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황 교수는 또한 ‘아그리파의 5가지 트로펜’과 ‘용수의 사구(四句)비판(일상적 사고방식을 허물어뜨리기 위한 일종의 해체의 논리)’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서도 피론주의와 중관학의 유사성을 설명했다.

“피론주의와 불교를 논하는 데 있어 양자의 놀랄 만한 유사성을 찾아 밝혀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지만 양자가 이렇게 흡사한데도 불구하고 이후의 철학사에서 왜 다른 길을 걸어가야 했는가를 조망하는 일이 더욱 흥미로운 과제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황 교수는 “피론주의자들은 다양하면서도 체계적인 회의적 논변형식들에 의해 우리 인간이 지식을 정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었고, 이로부터 당연하게 나오는 귀결은 인간의 이성을 거부하고,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좀 더 나은 인도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인간 자신에 의해서는 지복(至福)에 이를 수 없다는 인간의 절대적인 무능력’에 대한 처절한 자각이 피론주의자들에 행해짐으로써 고대로부터 중세로의 이행의 다리가 놓아졌고, 마침내 ‘고대 철학에 대해 기독교의 승리’가 구가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즉 믿음과 은총과 계시의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이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노고를 아끼지 않은 셈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후 3세기와 13세기에 걸친 천 년은 중세의 신앙의 시대였다.

“14세기 르네상스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세계의 주인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고, 자연을 지배하고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주체도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으며 인간은 지식을 갖고 있고, 또 갖고 있어야 했다”고 전제한 황 교수는 “그런데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저 고대의 피론주의는 시대의 적(敵)으로 떠올랐다”고 밝혔다. ‘인간의 지식이 곧 힘’인 시대에 피론주의자들은 ‘인간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논변을 통해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서양 근대 시기에 피론주의는 철학적 거리를 떠도는 유령에 다름 아니었다. 이 회의주의의 유령 앞에서의 불안, 회의주의에 빠지면 인간의 삶은 혼돈과 암흑에 빠지고 마침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철학적 강박증, 이런 것이 근대 철학자들의 정신 안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 흄(D. Hume: 1711-1776), 칸트 등을 포함하여, 피론주의는 적어도 서양에서는 19세기에 근대에 마감될 때까지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좀 더 날것으로 말한다면, 색출해서 남김없이 박멸해야 할 해충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소개한 황 교수는 “근대의 주류 철학자들의 과제는 바로 -근대에 만연한- 피론주의를 물리치는 것이었으며, 피론주의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로 서양에서는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 적대와 저주의 대상이었다”고 분석했다.

“중관학이 인도의 주석학과 티베트의 계보학, 동아시아의 삼론학으로 용수의 사상을 변주하면서 점차 심화시킨 길을 걸어갔다면, 피론주의는 생존하기 급급한 -비록 어떤 경우 생존을 허용받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에 한정되는- 연명의 길을 걸어갔다고 볼 수 있다”고 전제한 황 교수는 “최소한 피론주의 이후 근대까지의 서양 철학사를 거시적으로 조감하면, 아타락시아를 목표로 한 회의적 논변 이론의 전통은 점차 소실되어 갔다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은 곧 중관학과 만날 수 있는 서양의 자양분이 근대의 이성중심주의에 의해 쓸려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중관학이 피론주의와 거의 흡사하고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면, 내 생각에, 이런 소실의 과정은 곧 위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서양 철학에서는 -전략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 심층적인 의미에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화두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날 강연을 마무리했다.

90분에 걸친 황 교수의 강연이 끝나자 청중 속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피론주의에서 말하는 아타락시아(마음의 평정)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가?”, “단지 등치의 개념으로 기존의 것을 무력화시키는 피론주의와 4성제와 12연기 등 불교의 방대한 교리, 그리고 매우 정밀한 수행체계를 가진 기존의 불교를 다 알고 공(空)을 주창한 용수의 논리를 비슷하다고 해서 서로 같거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느냐?” 등의 매우 예리하면서도 수준을 갖춘 것이었다. 이에 대해 황 교수는 피론주의 아타락시아로 가는 과정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불교에서는 열반으로 가는 다양한 이론과 실천수행법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의미는 비슷하지만 같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며 추가 연구를 약속했다. 중관학에 대한 수준 높은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관학자인 김성철 교수의 다음 주 강좌(7월 24일) 강좌에서 해결하라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