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천 기자
hgcsc@hanmail.net 2015-07-02 (목) 21:46
6월 27일 열린 제5회 종교포럼에서 화쟁아카데미 대표 조성택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있다.
“보살의 정치적 각성, 이것이 바로 수연불변(隨緣不變)하는 불교적 정신의 현대적 실천이요, 수처작주(隨處作主)하는 불교적 삶의 방식이다. ‘시민보살’에는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없다. 불교는 ‘시민보살’을 양성하는 ‘학교’의 역할을 해야 한다.”
화쟁문화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종교포럼 다섯 번째 마당에서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 조성택 교수(고려대)가 한 말이다.
6월 27일 종로구 사간동의 화쟁문화아카데미 강의실에서 열린 이번 포럼의 주제는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불교’였다.
발제에 나선 조성택 교수는 먼저 고(苦)의 해석과 관련해 불교전통이 가지고 있는 명백한 한계 세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고통과 고통에 대한 해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고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소위 깨달음 지상주의의 문제로서 행위를 결한 지혜의 완성에만 몰두하게 되는, 그릇된 수행문화를 정당화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고의 문제를 사고팔고(四苦八苦) 등과같이 관념적인 문제로 한정함으로써 현실적 고통의 문제를 외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어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면서 “출가승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엘리트 집단이 전승해온 경전만으로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재구성하는 보수적 소극성을 탈피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오늘날 우리의 문제의식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혜와 자비 없는 깨달음은 일종의 신비체험일 뿐
조 교수는 또 “부처님의 깨달음은 실천수행적인 것”이라면서 “행위가 배제되거나 행위를 결한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지혜와 자비가 함께 동반되지 않는 깨달음은 일종의 신비체험일 뿐 부처님이 보여주신 본래적인 불교적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한국불교가 실천적 불교로 거듭나기 위해서 변해야 할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수행에 있어 감성의 복권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불교 수행의 주체로서 보살의 ‘정치적 각성’이다.
조 교수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수행문화에서 ‘불교’가 지나치게 교리화 혹은 일종의 원리화 되어 있어 일상적 삶의 가르침이 되지 못함을 지적했다.
“교리를 아무리 공부하고 경전을 외우고 선사들의 문답과 오도송을 줄줄이 외운다고 해도 인격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요, 불교를 진정으로 믿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조 교수는 “교리 이해를 수행의 척도로 여기는 불교인들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법문은 ‘저 분’의 높은 경지를 증명하는 것이고 내가 아직 수행이 덜 된 탓으로 여긴다. ‘깨달음’은 말로 표현 되는 것이 아니니 설사 표현된다고 해도 범인들로서는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법문과 선문답을 주고받으면서 불교인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한국불교의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이어서 “이러니 불교가 일상적 삶의 양식이 되지 못하고 불교를 ‘믿으면 믿을수록’ 절에 다닌 햇수가 길면 길수록 오만과 고집만 늘어갈 뿐이다. 입으로만 보살, 머리로만 부처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개탄했다.
조 교수는 대승불교에서 등장하는 보살을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 설명했다. 하나는 부처님과 함께 언급되는 소위 불보살(佛菩薩)급의 보살마하살들이다.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깨달음을 미루어 두고 있는 ‘위대한 존재들’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등 신앙과 구복의 대상이 되는 보살들이다.
또 하나는 말 그대로 보통의, 평범한 존재인 ‘범부보살’이다. 이 어리석은 중생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보살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역사적 주체인 범부보살이다.
범부보살이 정치적으로 각성하면 '시민보살'
조 교수는 이날 ‘시민보살’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 주목을 받았다. 범부보살의 실천적 자비심에 ‘정치적’ 각성이 부여된 상태를 ‘시민보살’이라고 칭했다. 보살정신이 수행과 구원이라는 종교적 차원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주체적 시민의식의 차원으로 까지 그 의미의 외연을 넓혀가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조 교수는 발제를 마치면서 오늘날 한국 불교계가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 갖고 있는 일정한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 종교의 사회참여의 범위와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를테면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운동에 참여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종교의 사회적 역할인가?
둘째, 시민사회의 공동선과 종교적 선은 합치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요컨대 종교적 가치와 신앙적 신념, 공공선의 차이는 극복될 수 있는가? 이를테면 80-90년대 미국 미주리주에서 극렬하게 벌여졌던 기독교인들의 낙태 반대 운동과 같은 것이다.
셋째, 모든 종교는 동일한 내용과 방식으로 참여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않다면 불교의 참여 방식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이어진 토론에서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편집인은 “종교의 사회적 참여의 경험이 아직 적다. 그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며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더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 방식의 참여를 실천해야 한다.”고 평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은 “교리화에 대응하는 방식으로서 감성을 대두시키는 것은 공감하지만, 감성은 비판과 성찰 또한 고갈시킬 수 있다. 감성의 복권 뿐 아니라 비평과 성찰의 복권도 담아져야 한다.”고 평했다. 또한 시민보살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도덕적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배제된 민중을 공공선과 같은 시민적 가치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려 할 때는 시민과 민중 간의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불교적 가치관에서 바라보는 사회문제는 그리스도교와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다원주의적 세계관에 기반한다.”며 “사회과학이나 시민사회가 하지 못하는 종교만의 기능이 있고, 불교 또한 그 안에서 구분되는 역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러한 불교의 방식은 민중과 시민,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에 있음을 강조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어서는 '공감' 가능할까
이날 토론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어서는 공감’이라는 측면에 집중됐다. 그것이 이상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오히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를 변호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지 않겠냐는 우려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것은 당연하나 그 편에 서 있으면서 가해자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그 행동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 사전에 나도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이 깔려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라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이어 “‘옳음’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며 “하나의 옳음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옳음에 대한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의 옳음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자는 이야기이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