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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화, 그대로 고수할 이유 있을까?”

박호석법사 | phoseok@hanmail.net | 2015-06-16 (화) 10:31

부처님이나, 보살, 성문, 또는 불법을 보호하는 신중(神衆)들을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거는 그림을 탱(幀), 또는 탱화(幀畵)라고 합니다. 티베트의 탕카(tanka)에서 유래된 말로, 주로 종이나 천에 그려서 말아 올릴 수 있도록 하는 족자 형식이 일반적이지만, 액자로 만들어 걸기도 합니다. 탱의 원래 뜻은 '틀에 그림을 붙이는 것', '걸개', '서화를 세는 단위' 등을 뜻하지만, ‘거는 그림’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보통 탱화는 사찰이나 가정집의 불단(佛壇)에 걸기도 하고, 부처님을 모시지 못한 곳에서 부처님을 대신하기도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하는데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탱화는 10세기경에 티베트에서 만다라와 같이 명상 수행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현존하는 탱화의 대부분은 고려시대 이후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불화가 그려졌다고 하지만, 부처님 뒤에 거는 후불탱화는 훨씬 뒤에 생겼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처음 탱화를 접하면서, ‘왜 부처님 뒤에 같은 부처님을 그림으로 모시는지’, ‘왜 그림의 색은 정색만 써서 눈을 산란하게 하는지’, 그리고 ‘왜 그림이 사실적인 구도가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림 하나하나가 모두 뜻이 있고, 법도에 맞게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너무 가식적이고 의례적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에는 좋은 그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에 있는 성불사 대웅전에는 십대제자와 함께 경전을 실은 달구지와 호미를 들고 밭을 매는 농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후불탱화가 있습니다. 또, 파주의 육군 제2기갑여단 법당 탱화에는 부처님께 거수경례를 하는 군인이 다른 성중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우락부락한 모습의 인물들이 부처님을 둘러싸고 있는 종전의 탱화보다는 훨씬 정감이 있고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탱화도 우리가 명화를 감상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느낄 수 없습니다.

 


이 사진은 박호석 칼럼의 특정 내용과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군 법당을 지으면서 마음대로 장엄할 수가 있었던 제3군수지원사령부 안국사는, 아미타부처님을 연화장 세계에 모신다는 뜻으로, 전통 한지에 연꽃을 수묵으로 그린 대형 그림을 후불탱화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백마사단 수색대대 영축사는 석가모니 부처님 뒤에 보리수나무를 한그루를 그려 선정 중이신 부처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제1보병사단 12연대 석불사는 반야심경을 병풍처럼 둘러 탱화 대신 모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환희심을 내고 탄복하기도 합니다. 이상하다거나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특히 장병들은 평소에 무섭고 혼란스럽던 전통 탱화가 아닌 모습에 너무 좋아합니다. 게다가 안국사는 법당을 부대의 교육장으로 써야 해서 부처님 앞에 가림막을 설치해 주었는데도 이를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나가는 장병들조차도 부처님이 거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봉건왕조시대의 풍속을 지금까지 그대로 고수하는 것은 다분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출처가 불분명한 관습이나 제도에 의하여 그리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벗어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예를 들어 어간(御間)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御)라는 것이 임금을 뜻하는 말인데 이를 절에서 쓴다는 것이 합당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정면에 삼문을 두고도 옆으로 낸 작은 문으로만 신도를 출입하게 한다든지, 부처님 정면의 자리를 앉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의 뜻이 아닐 듯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잘 듣게 하려면 앞에 앉으라 하셨겠지 옆에서 들으라고 하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중국에서 유래된 봉건왕조의 권위주위를 평등을 강조하는 불가에서 지금까지 고집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법회를 초하루 보름으로 고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음력을 쓰던 시절에야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지만, 음력이 절기(節氣)에 맞지도 않고, 또 비합리적이라서, 물때를 살펴야하는 어부들 말고는 거의 쓰지 않는 역법(曆法)인데, 양력을 공식적으로 채택한지가 1백 년이 넘었는데도 유독 절에서는 이(음력)를 고집하고 있으니 과연 불교가 합리적인 종교, 과학적인 종교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스님들이 한문으로 의식(儀式)을 하고 독경을 하며, 그것을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신도들이 한문을 배우고자함이 아니거늘, 쉬운 우리말 놓아두고 자기가 그렇게 배웠다고 한문경전을 움켜쥐고 놓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딱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혹시 그래야만 불교가, 아니 스님이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금강경(金剛經)>의 가르침인 무상(無相)을 법회마다 그렇게 강조하면서, 고정관념은 고사하고 쓸데없는 습관하나 내려놓지 못해 자라나는 세대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이런 스님들의 모습들을 보면, 어떻게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 빨리 고쳐야 합니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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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조계종은 무당종 2015-06-16 12: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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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절대 못 버립니다. 버리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무당짓으로 돈벌이를 우아하게 해왔는데 합리적 불교를 어찌 한단 말입니까? 다수는 못배워서, 참 불교를 몰라서 그런 같지만  사실인 즉 알고도 못 버립니다. 우리불교는 이렇게 우아한 무당짓과 전통의 찌꺼기를 우려먹고 살다가 흐지부지 망할 겁니다. 큰 중들은 큰 무당짓으로 절만 크게 짓고 있고, 작은 중들은 무당짓으로 온갖 호사부리고 왕자병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문화다양성 2015-06-17 1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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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탱화부분은 좀 동의 하기 어렵네요. 일반인들은 단청도 보기 싫다고 하고 향냄새도 싫어서 절에 오기가 싫다고 합니다. 다 없애야 할까요? 일본이 한국문화 말살정책을 펼치면서 낡고 미신같다, 현대적지이 못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었죠. 가요만 접한 사람은 가곡이 낯설죠.

불자지만 단청의 아름다움을 아는데 오래 걸렸고 탱화도 그렇습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고 잘 모르면 나에게 의미 없죠. 익숙해지고 잘 알게되면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사랑스럽게 됩니다.

선방에 가면 불상도 탱화도 없습니다.예불을 해도 죽비 세번치면 합장 반배하고 예불이 끝납니다. 매우 불경스럽죠. 예불이라고 했지만 예불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쪽에선 전통 그대로 다른 한쪽에선 파격적인 모습, 양면이 다 존재하는게 불교가 아닐까요.

낡은 문화와 풍습을 버리지 못해 고수하는 고리타분함도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불교가 문화와 풍습을 버리지 않아서 다행인 측면도 있어요.
나의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수의 대중이 호감을 갖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무시하고 편리와 효율만을 쫓으면.....남을만 한게 얼마나 될까요
불교사전 2015-06-18 00: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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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추천합니다--종교불문--

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불교 용어사전 추천합니다-종교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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