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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머리 아닌 가슴으로”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 2015-06-03 (수) 10:37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머리로 하는 교육만 받아 왔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기간이 20년이라면 그 기간 내내 머리 교육만 시킵니다. 그러니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 쓰레기통까지 다 들어 있는데 정작 자신의 마음을 아는 능력은 별로 없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많지만 그 힘이 아주 약합니다. heart education, 마음의 교육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수행하는 것이 그 마음의 교육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릴 때부터 마음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참되게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머리 교육’만 있고 ‘가슴 교육’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수행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합니다. 마음으로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를 그냥 지켜봅니다. 마음으로 대상을 직면하여 있는 그대로를 압니다. 말없이 그냥 알기만 합니다. 갈수록 내면에서 말이 없어지고 그 속말이 온전히 사라져 조용해지면 수행이 아주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완전히 속말이 없어지면 너무 조용하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가 됩니다.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조용하고 아무 말이 없지만 그것을 아는 마음은 있습니다. 집중이 아주 잘 되고 있는 것이지요. 속말이 있으면 아직 수준이 낮은 것이고, 속말이 완전히 꺼져 있을 때가 수준이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자들은 그걸 모르기 때문에 좋을 때마다 항상 스스로 망가뜨립니다. 조금 조용해지면 ‘아, 이상하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이러면서 일부러 생각을 꺼내서 일으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저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거 관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거 관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것이 틀린 방법입니다. 수행 중에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도 모르게 되고, 내가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개념들이 다 깨질 때가 진짜, 궁극적인 실제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논장을 조금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데, 이 상태가 바로 개념들이 깨져 나가고 실제를 알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개념들이 깨지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내가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수행대상에 마음이 있을 때, 그때가 되면 우리가 평생 살아오면서 알았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는 이 상태를 계속 관찰하지 못하고 그 상태에서 서둘러 나와 버립니다. 그것이 수행에서 사실 아주 좋은 상태인데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하게도 거기에서 급하게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진=행복한동행(해피투어) 제공

 

그러므로 수행 중에 그렇게 조용해지면 그것이 궁극적인 상태, 실제를 보고 있을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궁극적인 실제를 봐야 진리를 봅니다. 진리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수행처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자리, 궁극적인 실제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실제를 봤다면 수행자가 진리와 많이 가까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다시 나옵니다. 그렇게 될 때마다 다시 나오니 그것이 수행을 망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용해지면 그것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그걸 그대로 따라가십시오.
 
물질과 정신을 끊임없이 관찰함으로써 일단 계율이 깨끗해집니다. 아침부터 밤낮으로 계속 관찰하고 있으면 나쁜 말을 못하고 나쁜 행도 못합니다. 나쁜 생각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일어나는 대로 그 즉시 바로 관찰하고 또 관찰만 하니까 번뇌를 지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계율이 깨끗해져서 마음이 청정한 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와 정이 아주 논리적 합리적으로 연결됩니다.

 

미묘하고 신비로운 것이 하나도 없고 이해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하는 대로 되고, 하는 만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속에서 했던 일반적인 삶과 지금 하고 있는 수행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매 순간 닦고 닦으면 몸으로 짓는 업이 줄어들고, 입으로 짓는 업도 줄어들고, 마음으로 짓는 업도 줄어듭니다. 또 강하고 크게 일어나는 번뇌들이 사라져서 몸과 입이 청정해지니까 마음도 따라 청정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이 집중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니까 힘이 생기고, 그렇게 생기는 힘으로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집중의 힘이 있어서 있는 사실을 그대로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고, 그 사실이 곧 무상·고·무아입니다. 있는 사실이 무상인데 우리가 모르고 영원하다고 사견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사실이 매 순간 일어나 사라지기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운데 우리는 그것이 행복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있는 사실이 무아인데 우리는 나다 너다, 남자다 여자다 하면서 상을 만들고 그것을 진실하다고 착각합니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것이 집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정해야 집중이 되고, 집중이 되면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그 사실이 무상·고·무아이니 그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처음에는 물질 정신의 두 가지 특징을 알게 됩니다. 수행을 계속 해 나가면 우리의 마음에 생길 수 있는 45가지 마음을 다 보게 되고 52가지 마음부수도 다 보게 되고 18가지 물질을 번갈아서 다 보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보아 나가면 못 보는 것이 별로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차츰차츰 물질 정신 두 가지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사견이 많이 사라지고, 사견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개념이 사라지고, 내가 남자다 여자다 나누는 마음이 사라지고, 내가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되고, 그런 개념이 다 깨지면서 궁극적인 실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실제를 계속 파악하고 있으면 ‘이것 때문에 이것이 있고, 저것 때문에 저것 있는 거구나.’라고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기고, 의심들이 많이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일 뿐 우연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계속 보고, 보고, 또 보면서 세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지혜만 있어도 사람이 얼마나 착해지는지를 체험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사람에게 심리변화가 오면서 업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오는 모든 것들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없어지면서 진정으로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어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 사람이 나한테 말한 것이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모든 것이 이해가 가니 사람이 지극히 선량해집니다. 그러니까 따로 용서가 필요 없습니다. 이해가 되면 용서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입장을 바꾸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살인하는 사람까지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 내 안에 그 마음과 그 생각이 들어오면 나 역시 그렇게 살인을 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되면서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안 보이고 모든 이들을 다 좋은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뭔가를 잘못하는 사람은 있지만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두 번째 지혜만 깨달아도 사람의 심리 변화가 엄청나게 대단합니다. 심리가 완전히 변화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도 그와 유사한 마음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죽기 직전이 되면 사람들이 다 착해져서 잘못 살아온 것을 후회하게 되어 ‘아, 내가 왜 그때는 그런 말을 했나, 왜 내가 이렇게 살아왔나, 이런 것을 왜 내가 좋다고 생각했나, 이런 것 다 무시하고 살아도 되었던 것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병이 들어 많이 아플 때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아플 때, 죽을 만큼 아플 때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때 내가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렇게 연연해했을까, 왜 그렇게 아기같이 굴었을까, 다 나으면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나으면 얼른 그 사람에게 사과해야지…….’ 그렇지만 병이 다 나으면 그 순간에 몽땅 잊어버립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은 심하게 아파 봐야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지혜만 해도 신심이 일어나는 게 대단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지혜가 한 시간 안에 생겼다가 한 시간 안에 날아가는 사람이 있고, 한 달 두 달 있는 사람이 있는데 당연히 오래갈수록 좋습니다. 어떤 지혜이든 아주 강력하게 오래가면 쉽게 안 잊어버릴 수 있어서 그것이 진짜 내 것이 됩니다. 잠깐 있다가 금방 끝나 버리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자주 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수행을 자주 하면 지혜가 지속적으로 향상됩니다. 수행 잘하는 사람은 똑같이 다시 밑의 단계에서 시작해도 발전하는 속도가 다릅니다. 처음에는 1단계에서 20분 걸리던 것이 다음에는 2단계에서 2분 만에 3단계로 올라갈 수도 있고 3단계에서 1시간 하던 사람이 2분, 3분 있다가 바로 4단계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행할 때마다 이 지혜를 자꾸 반복하게 됩니다.

 

지혜가 오르내리는 것이 수다원이 되어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어도 수행은 4단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수다원이 된 다음에 수행하더라도 일어남 사라짐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처음 1·2·3 단계는 건너뛰고 하지 않지만 4단계부터는 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수행이 좋았던 적이 있어도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시작해야 됩니다. 가장 잘 되었던 그 자리가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단계를 자꾸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그 지혜가 익어지면서 실생활에서도 그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별것 아닌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이 깊어지면서 아주 성숙해지고 착해져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를 잘하고 그렇게 사람이 성장합니다. 적개심이 사라지고 관대해지고 평화로워집니다.

 

그러면 누가 행복합니까? 우선 본인이 행복합니다. 마음이 그렇게 커질수록 자신이 행복해지고, 마음이 작고 약할수록 자신이 괴로운 것입니다. 마음의 폭이 넓은 만큼, 그릇이 큰 만큼 그 사람이 세상에서 흔들림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삶의 흐름을 잘 타고 가게 됩니다. 그것이 두 번째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데서 오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업과 과보를 많이 이해하니까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집니다. 또한 그렇게 되니 수행이 더 좋아지게 되고 이렇게 앞뒤가 연결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위빳사나 지혜의 세 번째 단계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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