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jprj44@hanmail.net 2015-05-31 (일) 22:07하나의 주제를 두고 이토록 오랫동안 글을 쓰기는 처음이다. 부석사에 살고 있으니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부석사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나름의 시각과 자료를 바탕으로 연재를 시작하고 이제 마칠 때가 되었다.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내용들도 있고 혹은 왜곡되어 전해오던 것을 바로잡고 하면서 3계절을 보냈지만 사실을 기반으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하려 했지만 일부 필자의 성급함과 오해로 인한 오류도 있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동안 기고했던 내용들을 수정 재편집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이 또한 욕심이려니 하고 시절인연을 기다려 본다.
연재를 마치면서 그 대미를 무엇으로 장식해야 하나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이별의 아쉬움이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료로서의 가치 공유라는 생각에 필자가 부석사에 있는 동안 발견 내지는 수습한 유물들을 소개하면서 연재를 마칠까 한다.
뭐 대단한 유물들일까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필자의 눈에 발견되어 박물관 수장고로 혹은 전시 진열장 안으로 들어가면 부석사의 감춰졌던 역사들은 그렇게 하나 둘 복원되리라 생각한다.
2013년 4월부터 2015년 5월까지 경내외에서 수습한 유물을 소개한다.
①청자투각돈(靑磁透刻墩)편
청자투각돈편
-.발견 장소 : 무량수전 서쪽 취원루 자리
고려시대 제작된 청자돈은 현재 이화여재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제416호 개성 고려동 출토품이 완형으로 전하고 있다.
이 돈의 용도에 대해 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돈의 상판에 연화문이 음각되어 있고 고려사경 중 보물 제755호 《감지금니화엄경》권제 5,6(호림박물관 소장),《감지금니화엄경》권제12(리움미술관 소장)에서 유사한 기형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청자돈의 용도가 의자의 기능을 보다는 향로 받침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호림박물관 소장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권6 변상도 부분.
②토기벼루편(벼루의 다리)
토기벼루편.
-.발견 장소: 부석사 원융국사 비각 부근 절개지.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토기 벼루로 표면에 자연유가 남아 마치 녹유벼루와 같은 느낌을 준다. 사자형의 동물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뭉툭한 코와 예리하면서도 둥근 눈,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혀를 내밀고 미소를 짓는 듯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사자형 동물상 머리위로는 이중의 연주문(連珠文)이 이어져 있으며 그 위에는 구름문양이 남아 있다.
벼루의 제작기법을 알 수 있는 단서도 확인되는데 먹을 가는 부분인 硯堂을 먼저 만들어 소성(燒成)한 후 다시 胎土를 붙여 문양을 새기거나 찍어내었음을 알 수 있다.
③단청용 안료
단청용 안료.
-.발견 장소 : 부석사 선묘각 부근 경사지.
경주 안안지 등에서 건물의 단청에 사용한 안료와 그 도구들이 출토된 사례가 있지만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사찰에서 발견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선묘각 중건 공사 과정에서 부지 확장을 위해 주변 경사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출토된 안료는 두 가지로 적색과 녹색이며, 발견 당시 가로, 세로 24.5㎝, 두께 6.4㎝의 無紋塼위에 부서진 흑색 옹기(높이 33㎝, 구경 17㎝) 안에 담겨져 있었다.
안료가 담겨 있던 토기호.
2013년 무량수전에 대한 단청 기록화 사업을 실시한 공주대 문화재 보존학과에 출토 안료의 분석을 의뢰한 결과 celadonite(석록:磊綠)이 동정되어 전통 녹색안료인 녹토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적색 안료는 quartz(석영류)와 albite(장석류) 등이 동정되지만 적색을 내는 성분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무량수전에 적용된 석간주 부분의 적색이 이와 유사한 XRD패턴을 보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이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안료와 함께 출토된 무문전.
이 안료의 사용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함께 출토된 전돌과 흑색옹기의 제작시기가 등을 고려할 때 1358년 왜구의 兵火로 인해 부석사 무량수전이 소실되자 1372년 원응국사가 중건하면서 사용했던 안료로 추정된다.
④천왕(天王)명 명문와
-.발견 장소 :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 동쪽 계곡(밭).
그동안 부석사 경내와 주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명문와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는 ‘천장방(天長房)’과 같은 사용처를 알 수 없는 명문와를 비롯하여 부석사 경내에 공방시설로 추정되는 ‘와초방(瓦草坊)’과 같은 명문와들도 있지만 최근 발견된 명문와에서는 부석사 경내 천왕문의 존재여부를 알 수 있는 ‘천왕(천왕)’명 명문와편도 출토되었다.
⑤명문(銘文) 백자편
부석사 경내에서 발견된 명문와편은 20여점으로 이중 명문을 정확히 판독할 수 있는 수는 10여점에 이른다. 모두 조선시대 백자 대접, 사발, 접시 등의 저부에 묵서가 다수 이지만 일부는 朱砂와 침서(針書)로 쓴 묵서도 확인되었다.
(표) 백자 저부에 남아 있는 명문
묵서의 내용은 숫자와 法名, 단일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3, 7, 12의 경우 법명으로 보이는데 이중 7번의 普遠은 1567년 2월부터 1568년 2월까지 부석사에서 화엄경판을 판각한 경상도 울산 원적산 운흥사 출신의 刻僧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판각한 화엄경판에 남긴 묵서에 ‘普元’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⑥연화문 수막새
자인당 부근 출토 연화문 수막새(왼쪽), 조사당 부근 출토 연화문 수막새(오른쪽)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수막새 기와 중 하나가 바로 연꽃무늬가 새겨진 연화문 수막새다. 부석사 경내 및 주변에서 드물게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초창기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진의 연화문 수막새는 현재 자인당 아래 계곡과 조사당 뒤 경사지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뤄 자인당과 응진전 자리가 당시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조사당의 최초 건립 시기 또한 통일신라시대 즉 8~9세기로 비정할 수 있다.
이외에도 부석사 경내와 그 주변 건물터에서 다수의 와편과 백자, 청자편들이 확인되고 있어 향후 이 지역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 등이 이루어져 창건기 이후 전성기의 부석사 가람 규모를 밝혀내는 사업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