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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만 챙기면…"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 2015-05-18 (월) 13:36

이 물질과 정신을 아는 지혜가 계속 지속되면 그 다음 단계에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물질과 정신 두 가지만 구별해서 알아차립니다. 그런 상태에서 계속 깊이 집중하여 관찰하다 보면 뭔가를 알기 전에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걷고 있으면서 그 걸음걸음을 관찰해 보면 걷기 전에 걷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새소리가 들려오면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이 거의 동시에 생겨납니다. 그 소리를 들으려는 마음이 기다리고 있다가 소리가 다가오면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날 때 바로 듣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소리 때문에 듣는 마음이 생기는구나.’ 이렇게 압니다.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조금 불편해집니다. 그러면 몸을 살짝 움직여 자세를 바꿉니다. 불편하기 때문에 움직이고 싶고, 움직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어딘가가 가려우면, 그 가려움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싫은 마음 때문에 가려운 것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러면 손이 움직이면서 가려운 곳을 긁습니다.

 

그렇게 어떤 결과가 있으면 그 앞에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뭔가가 앞섭니다. 단독적으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이것이 있고, 저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생겨납니다. 걸어갈 때도 걸으려고 하는 의도 다음에 걷게 됩니다. 눈 깜박 하는 것조차도 깜박 하려고 했다가 깜박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과정 하나하나를 다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계속 관찰해 나가다 보면 깜박거리고 싶은 마음, 깜박 하려고 하는 마음, 눈을 깜박 하는 움직임을 세밀히 다 알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이렇게 원인을 챙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경행할 때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벽 쪽으로 다 가서 끝에 도달하면 서야겠다는 마음이 먼저 일어나고, 벽에 부딪히기 전에 걸음을 멈춥니다. 서 있는데 돌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돌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계속 서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돌고 싶다, 걷고 싶다 하는 마음이 생기면 몸이 삭 돌아섭니다. ‘아, 가려고 하니까 가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물질에 시키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따라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선명해집니다. 원인을 챙긴다는 게 그런 의미입니다.

 

‘이래서 이렇구나, 저래서 저렇구나.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는 거구나…….’ 이것이 인과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단순한 것을 알지만 다음에는 복잡한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 그거야 당연한 거지. 아무것도 아니네. 그렇게 어렵지 않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일어나고 싶은 마음 따라 일어나는 것, 걷고 싶은 마음 따라 걷는 것, 목이 좀 불편했다가 침을 삼키는 것…….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다 보면 흔히 대단하다고 여기는 12연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12연기를 이해하는 지혜로 업과 과보를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과정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이 처음에는 억울하다고 생각되던 것도 그 원인을 알게 되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업과 과보, 12연기가 바로 이 ‘원인과 결과를 보는 지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심들이 많이 사라집니다. 정말로 선업 불선업이 있을까, 선업의 과보 불선업의 과보가 있을까, 전생이나 다음 생이 있을까……, 이런 의심이 다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의 첫째 지혜가 생기면 사견이 많이 사라지고, 두 번째 지혜만 있어도 의심이 많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 두 번째 지혜가 있으면 작은 수다원이라고 말합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수행 도중에 원인 결과를 아는 지혜가 있을 때는 사견과 의심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물질과 정신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물질과 정신만 있을 뿐임을 깨닫게 되면 너·나·남자·여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등 일체 상이 다 착각임을 깨닫게 됩니다. ‘물질 정신 두 가지만 있을 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깨달음 때문에 사견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위빳사나의 아주 기본적인 지혜만 있어도 사견이 많이 사라집니다.

 

단지 들숨 날숨과 그 들숨 날숨을 아는 마음에 온전하게 집중할 때 ‘나’라는 것을 잊게 되고,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이런 생각도 모두 사라져버립니다. 거리에 가면 좋은 집들이 많고 좋은 차들도 많습니다. 그런 것에 ‘이건 내 차, 이건 내 집…….’이라고 말해 보세요.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사람 정신이 나갔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짓이 바로 그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물질과 정신을 보면서 ‘이게 나이다, 내 몸이다, 내 마음이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은 직접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고『금강경』을 평생 읽어 보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읽어도 아상은 절대로 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정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는 지혜가 있는 순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곧바로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노력이 줄어들어 사띠가 약해지면 사마디가 약해지고, 그러면 지혜도 약해집니다. 그러면 바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아, 내가 지금 앉아 있다. 몇 시 됐나? 15분 지났구나.’ 이렇게 됩니다. 관찰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아상이 사라진 그 상태를 얼마나 유지시킬 수 있는가가 여러분들이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의 유무를 말해 줍니다. 그 상태에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이렇게 되면 위빳사나의 두 번째 지혜가 일어납니다. ‘빳짜야 빠릭가하 냐나’ 즉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이래서 이렇구나. 저래서 저렇구나. 이것 때문에 이렇구나.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구나.’ 이렇게 되는 마음이 생기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 인과 외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견이 사라지고 의심도 사라지고 또 창조자에 대한 생각이 다 없어집니다. 창조자가 있나 없나 하는 의심이 사라지고, 오직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깊은 신심이 일어납니다. 이 두 가지 지혜는 아주 기초적인 것이어서 위빳사나의 기본에 해당됩니다. 학교로 치면 아직까지 유치원, 어린이집이에요. 그런데 이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지, 그 지혜를 가지고 죽으면 그 사람은 두 번째 생까지는 사악처로 안 갑니다. 그래서 그것을 ‘쭐라소따빤나’, 작은 수다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깨버리면서 가는 마음을 내가 어느 정도 유지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지혜 계발, 심리 변화, 인간 성장의 길이 정해집니다.

 


사진=장명확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며 팔정도수행을 합니다. 중단 없이 계속 노력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신심입니다. 신심이 생기려면 불·법·승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즉 신심을 위해서 지식이나 지혜, 이해나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법문을 많이 들어야 되고, 경전 공부를 많이 해야 되고, 직접 수행하여 체험도 많이 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신심이 있으면 노력이 좋아집니다. 바른 노력이 좋아지면, 바른 사띠, 대상을 놓치지 않고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 대상에 붙으면서 집중이 됩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가 수행자들이 해야 하는 일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가 있으면 그 다음 것들은 저절로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은 집중과 지혜입니다. 노력과 사띠에 신경을 써야 되는데 집중과 지혜에만 신경이 쏠리니 계속 생각 속에 빠지게 됩니다. ‘아, 그날은 정말 집중이 잘 되었는데 지금은 왜 이러지? 그 집중이 어떻게 해야 다시 생길 수 있을까?’ 이렇게 계속 머리로 생각을 굴립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 노력과 사띠인데 그것은 하지 않고 계속 머리만 굴리니 집중이 될 리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수행자가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만 챙기면 바른 집중이 되게끔 되어 있고, 집중이 되면 지혜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집중이 되어 꿰뚫어 보는 것만 되면 물질과 정신을 꿰뚫어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항상 노력과 사띠에 관심을 두고 그것에만 힘을 쏟으십시오. 자신이 지금 올바른 노력을 하고 있는지, 그 노력이 약한지 강한지, 어떤 마음 상태로 수행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피면서 치우치지 않는 적당한 노력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이런 식으로 아침에 깰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아주 적당한 양의 노력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합니다.

그 노력의 힘으로 대상을 확실하게, 분명하게 놓치지 않고 기억하게 됩니다. 기억하기만 하면 대상을 놓치지 않는 것이고, 대상을 놓치지 않으면 집중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집중 뒤를 따릅니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이것저것 관찰했다가 다음에 힘이 좀 붙으면 대상이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강제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그것이 다른 데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위빳사나는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즉 이 대상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합니다. 숨을 들이쉴 때 들숨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어떤 대상을 관심 있게 보고 있으면 마음이 쉽게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이 대상에서 달아나지 않도록 통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관심 있게, 주의 깊게, 조심스럽게, 잊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그냥 지켜보는 것, 그렇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마타도 관심 있게 보면 좋은데 관심 있게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른 데로 나가려고 하면 무조건 막는 것이 사마타입니다. 대상을 놓치면 무조건 제자리로 다시 끌고 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마타는 독재형이고 위빳사나는 민주형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위빳사나의 경우 대상에 관심을 두면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데 마음이 딴 데로 나가면 그것을 통제하지 않고 함께 따라 나가 줍니다. 호흡을 관심 있게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딴 데로 가고 있습니다. 호흡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무조건 호흡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딴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관찰하거나 생각하고 있는 그 자체를 봅니다. 초보자일 경우 ‘생각, 생각…….’ 하고 있으면 조금 있다가 그 생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호흡을 보면 됩니다. 그런데 조금 수행의 기술이 익으면 생각을 아는 순간 생각이 멈춥니다. 멈춘다고 끝났다, 하고 바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그 멈춘 자리에서 가만히 있습니다. 그 곳이 마음의 자리, 마음의 토대입니다. 그것은 물질입니다. 그 물질을 아는 것이 신·수·심·법 중 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음 토대,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하는 것을 아는 순간 생각이 없어지면서 순간적으로 텅 비어 있는 자리 같은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마음을 가만히 대어 놓고 있으면 마음 토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쉽지는 않고 초보자는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수행을 얼마만큼 하여 집중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한 마음을 보고 있는데 그 마음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면 사라져 없는 그 자리에 관찰하는 마음을 놓고 가만히 있어 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어떤 생각이 하나 일어납니다. 그것을 아는 순간 즉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어떤 구멍에서 머리가 쏙 나왔다가 도로 쏙 들어가는 그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토대를 느끼는 방법입니다. 생각 하나 나올 때 딱 보면 없어지고, 또 보면 없어지고……. 그렇게 되고 있으면 신·수·심·법 중에 심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는 수행은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마음을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초보자는 어쩔 수 없이 ‘생각하네.’ 하고 알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수행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때 수행의 기술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어, 생각하네.’ 하고 아는 순간 생각이 사라진 그 자리에 마음을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정신 즉 마음이나 마음부수를 관찰할 때와 물질을 관찰할 때가 조금 다릅니다. 물질은 확실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찰이 쉽습니다. 분명한 물질적 대상에 대한 느낌 역시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마음과 마음부수를 관찰할 때는 항상 ‘내가 관찰하고 있는 건가? 관찰 대상을 놓친 게 아닌가?’ 이렇게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헷갈리는 그 마음을 봐야 합니다. 다른 생각은 없고 그 의심하는 마음, 헷갈리는 마음이 가만히 있으면 그 헷갈리는 마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생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내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뭔가를 생각하고 있으면 이미 사띠가 사라진 것입니다. 사띠가 있으면 생각이 없습니다. 꿰뚫어보는 지혜가 있으면 생각이 없고, 생각이 있으면 꿰뚫어 보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보고 있는데 마음이 없어졌고 생각하는 마음도 멈춰 버렸습니다. 멈춰 버린 자리를 오로지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볼 때 ‘내가 호흡을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배를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지금 내가 관찰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고 있다면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각 자체가 또 하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다시 조용해집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아, 이것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러면 그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을 다시 봅니다. 그럼 또 다시 조용해집니다. 그 자리가 바로 마음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볼 줄 알면 마음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생각이 있으면 꿰뚫어 보는 것이 없는 것이고, 꿰뚫어 보고 있으면 생각이 없는 것인데, 생각은 머리로 하고 수행은 마음으로 합니다. 그래서 hand education, head education, heart education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hand education은 솜씨, 스킬, 기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head education은 머리 교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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