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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욱금동 일원이 추동…뾰족한 바위와 바위굴 확인

김태형 | jprj44@hanmail.net | 2015-05-13 (수) 16:40

그동안 연재해온 ‘부석사 이야기’도 어느덧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앞으로 한 두 편정도 더 정리하고 나면 3계절을 이어왔던 연재도 마무리된다.

 

이번 이야기는 부석사와는 좀 동떨어진 내용이지만 부석사를 논함에 있어 반드시 등장하는 이야기라 이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는 부석사 창건 당시 상황과 이후 부석사를 중심으로 한 화엄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자료이기에 이번에 소개한다.

 

⟪삼국유사⟫효선(孝善) 제9 ‘진정사 효선쌍미(眞定師 孝善雙美)’는 의상 스님에게 출가하여 득도(得道)한 10대 제자 중 한명인 진정 스님의 이야기로 여기에는 스님이 출가한 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의상 스님이 ⟪화엄경⟫을 강의했고, 이를 지통(智通)스님이 그 요지를 뽑아 두 권의 책으로 만든 ⟪추동기⟫가 등장한다.

 

 ⟪추동기⟫는 그동안 ⟪화엄추동기(華嚴錐洞記)⟫, ⟪추동문답(錐洞問答)⟫, ⟪추혈기(錐穴記)⟫,⟪추혈문답(錐穴問答)⟫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오고 있다가 법장 스님(法藏, 643~712)의 저서로 알려진 ⟪화엄문답(華嚴問答)⟫ 2권이 바로 의상 스님의 강의 내용을 요약한 ⟪추동기⟫임이 고 김상현 박사님 등에 의해 확인되었다.

 

한편 이 기사에서 의상 스님은 문도 3천 명을 데리고 소백산 ‘추동’에 가서 초가를 짓고 약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당시 의상 스님은 왜 부석사를 두고 소백산 추동까지 가서 ⟪화엄경⟫을 강의했는지 앞서의 연재에서 밝힌 바 있다. 즉 당시 부석사 가람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추동으로 가서 ⟪화엄경⟫을 강의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었다.

 

 

추동의 지명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뾰족한 바위와 바위굴.

 

 

추동에 대해서 그동안 지금의 비로사 인근 혹은 욱금동의 옛 영전사(靈田寺)터로 비정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추동기⟫의 또 다른 이름으로 ⟪추혈기⟫가 등장하는데, 이 책의 제목에 동(洞)과 혈(穴)은 모두 굴을 뜻하는 한자다. ‘추동’은 바로 송곳과 같이 생긴 동굴이나 골짜기를 의미하지만 송곳바위, 즉 ‘추암(錐巖)’이 있는 동굴이나 골짜기를 말하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우선 기록에 등장하는 현장을 찾고자 최근 소백산 욱금동 일원에 대한 답사를 한 적이 있다. 현재 추동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전하고 있으나 ⟪영주시사(榮州市史)⟫ 등에서는 욱금동 일원을 추동으로 보고 있다.

 

 

영전사터 곳곳에서 발견되는 통일신라시대의 기와편.

 

 

지난 봄의 답사에서 욱금동 금계저수지 동쪽의 골짜기를 답사하면서 이곳에서 다수의 통일신라시대 기와편과 토기, 조선시대 백자편 등을 확인한 바 있다.

 

또한 이곳에는 ‘추동’을 암시 할 수 있는 바위와 작은 굴도 확인되어 이곳이 의상 스님이 진정 스님을 위해 ⟪화엄경⟫을 강의한 추동 혹은 추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향후 이곳에 대한 정밀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보다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감통(感通) 제9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은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때 순안(順安, 지금의 영주시)에 사는 불자 수십 명이 서방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며 만일계를 결성하고 정진했다고 한다.

 

이때 아간 귀진(阿干 貴珍)의 집 계집종인 욱면이 그 주인을 따라 미타사에 가서 매일 절 마당에서 염불을 하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주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욱면은 절 마당에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매고는 합장을 하면서 염불을 했다. 그때 하늘에서 ‘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는 소리가 들려 스님들이 욱면을 법당에서 정진케하였다.

 

이후 얼마 안 되어 욱면은 몸을 솟구쳐 법당 대들보를 뚫고 서쪽으로 날아가 육신을 버리고 부처의 몸이 되어 연화대에 앉아 큰 광명을 보이고 사라졌다. 이때가 755년 음력 정월 21일이었다. 이 때 법당 지붕에 뚫린 구멍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에도 남아 있었고 폭우나 세찬 눈이 내려도 법당 안이 젖지 않는다고 했다.

 

욱면은 본래 전생에 계(戒)를 얻지 못해 축생도에 빠져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가 경전을 운반한 공덕으로 아간 귀진의 집 여종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노비 욱면과 부석사와는 단지 절의 소가 되어 경전을 운반했다는 것 외에는 별 연과성이 없는 듯 보이지만 이곳 욱면이 현신성불한 사찰인 미타사가 바로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추동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는 점이다.

 

 

의상 스님이 ⟪화엄경⟫을 강의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영주시 풍기읍 욱금동 계곡에는 다수의 기와와 토기편은 물론 돌로 쌓은 축대도 확인된다.

 

 

추동과 미타사(영전사)는 동서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의상 스님이 ⟪화엄경⟫을 강의한 이후에도 오랜 동안 승속이 정진해왔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의상 스님의 화엄일승의 아미타불 염불을 통한 현신성불의 실천 수행이 추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8세기 중반에는 만일계(萬日契)와 같은 신앙결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노비 욱면이 현신성불한 미타사(영전사)터의 전경. 안내판도 하나 없이 농토로 민가로 그렇게 변해 세월의 무상함이 깊게 드리워진다.

 

 

따라서 아미타불만일계 혹은 만일회의 사상적 바탕에는 의상 스님의 화엄일승사상이 그 기반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미타사는 최근까지 영전사로 불리면 그 흔적을 남겼지만 지금은 민가와 농토로 변해 간간히 확인되는 기와편들이 이곳이 현신성불이 이루어졌던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다만 이곳에서 출토된 다수의 석조물과 석불이 풍기읍내 영전사에 전하고 있다.

 

 

영전사 옛 터에 있다가 지금은 풍기읍내 영전사로 옮긴 다수의 석조물 중 하나인 석조연화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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