蕭蕭落木聲  사박사박 떨어지는 낙엽 소리를
錯認爲疏雨  성근 비가 내리는 것으로 착각했네.
呼僧出門看  스님을 불러 문 밖으로 나가보라 했더니
月掛溪南樹  시내 남쪽 나뭇가지에 달이 걸렸다 하네.

-정철(鄭澈, 1536-1593)의 <산사에서 밤에 읊노라(山寺夜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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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松江) 정철은 조선 전기의 우리문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대표적인 문호다. 그는 타고난 시인이면서 때로는 비정한 정치가였고, 어수룩한 인간미도 풍기는 다면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진정한 매력은 역시 문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는 한시나 한문 문장도 능란하게 지었지만, 송강 문학의 백미는 역시 한글 작품들이다. 김만중은 정철이 남긴 가사(歌辭) 작품을 두고 ‘동방(東方)의 이소(離騷)’라 지적하면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관동별곡(關東別曲)> 같은 가사는 정말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진정 우리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언어의 연금술사라 아니할 수 없다.

정철의 문학이 가지는 또 하나의 큰 장점은 쉽고 정겨우면서도 정확한 묘사와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연작 시조인 <훈민가>의 한 작품을 잠깐 읽어보자.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도 무거울까
늙기도 서러웁거늘 짐을 조차 지실까.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우리는 늙은이를 공대해야 하는 당위적 이유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쉽고 명료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언어를 구사했기에 그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감명을 주는 것이겠다.

그가 쓴 한시에서도 일가의 이룬 대가의 풍모를 잘 느낄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불교를 소재로 쓴 작품도 더러 눈에 띤다. 산사의 정취를 노래한 작품도 있고, 선승의 시권(詩卷)에 담긴 시흥을 읊은 작품도 있으며, 교감을 나누던 스님들에게 보낸 시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 가운데 가장 감칠 맛 나고 정철의 유머러스한 심성과 선적 깨달음에 대한 자신만의 표현을 담은 작품으로 <산사에서 밤에 읊노라>만한 작품은 없을 듯하다.

고작 20자로 된 5언절구인 이 시에서 작자는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겪은 간단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밤이 깊으면 오감(五感) 가운데 가장 예민해지는 것이 청각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잠이 오지 않아 스님과 어울려 한담이나 나누면서 밤을 보내는데 문 밖에서 뭔가 사박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철은 그 소리를 성근 비가 내리는 것으로 판단했다. 산사의 밤비 구경도 놓칠 수 없는 멋이지만, 정철은 곁에 있던 스님을 불러 나가 밖을 살펴보라고 재촉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빨아 소나무 가지에 걸어둔 승복에 대한 염려나 장독대 뚜껑이라도 열어두지 않았는지 걱정해서가 아니었을까? 역시 세속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말에 스님은 선뜻 밖으로 나갔다. 산사 생활에 익숙한 스님이 그 소리가 낙엽 떨어지는 소린 줄 몰라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돌아와 하는 대답이 역시 스님답다.

“시내 남쪽 나뭇가지에 달이 걸렸던데요.”

달이 떴으니 비가 올 리 없다. 이 한 마디 말을 듣고서 정철은 자신이 지닌 미망(迷妄)에서 벗어나는 선오(禪悟)와 함께 남을 무안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일깨움을 주는 선가(禪家)의 말솜씨에 흠뻑 빠지게 된다. 선가에서 전해지는 경구에 이런 말이 있다.

“달을 보라 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구나.”

비가 내린다고 여겨 산사의 살림을 걱정하는 정철의 마음 씀씀이도 아름답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마음의 짐을 다 내려놓지 못한 아쉬움도 묻어 있다. 정철은 달보다는 손가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의 슬쩍 눙치는 말에서 정철은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정철이 그렇게 다정다감하면서 진솔하고 얼음처럼 명징한 언어를 구사하게 된 연원도 따져보면 이런 스님의 웅숭깊은 속내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가을 날 정철의 심금을 따라 산사를 찾아 하룻밤을 지새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