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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빳사나 지혜엔 아(我)가 붙지 못한다”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 2015-04-16 (목) 17:55

9. 무아와 위빳사나

 

오늘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담고 있는 무아경, 그리고 무아경을 위빳사나 수행과 연계하여 좀 더 깊이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무아(無我)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 교단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법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삼학, 즉 계·정·혜로 축약하여 볼 경우 계율은 어느 교단에서든 나름대로 다 있습니다. 몸과 마음, 입으로 어떤 것을 하면 안 되고 또 어떤 것은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은 여느 종단에도 다 있는데, 그 계율이 완벽한 지혜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는 교단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계율은 기본이고 정(定) 즉 집중에 대한 가르침도 매우 중요하고, 지혜는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지혜의 한가운데에 바로 ‘무아’가 있습니다. 다른 모든 가르침에서 ‘아(我)’를 가르치는 것과는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무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무아의 여러 측면을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주인공인 나(자아)’가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된다고 착각하여 내가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서고 싶으면 서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내 뜻대로 된다고 보는 자아입니다.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내가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인데, 그런 걸 모르고 내 뜻대로 되고 내가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관찰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다시 뒤에서 다른 어떤 놈이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수·상·행·식 중에서 식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 앎인 식에 ‘나’를 갖다 붙여서 아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그것이 ‘나’라고 착각합니다.
 
두 번째 ‘나’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나’가 있다고 착각하는 ‘나’입니다. 무상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무아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는 ‘나’가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아상은 수·상·행·식 중에서 ‘상’과 관련이 많습니다. 상은 기억하는 것이지요. 어제를 기억하고 작년을 기억하고,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면서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몸이라는 물질과 정신은 계속 변하여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상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내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을 하는 사람’ 즉 무언가를 하는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내가 보는 것, 생각하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것, 수행하는 것조차도 내가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 등 일체를 내가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강한 ‘나’입니다. 아는 것도 내가 아는 거고, 모르는 것도 내가 모르는 것이며 모든 행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은 수·상·행·식 중에서 행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수행할 때도 ‘내가 노력하고 있다.’, ‘내가 게으르다.’, ‘아, 내게 신심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것에 ‘나’를 붙여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집중이 깊어지고 지혜가 높아지면 그렇지 않음을 보기 시작합니다. 신심은 신심일 뿐이고, 이 신심 또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행, 모든 일을 하면서 계속 ‘내가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상입니다. 수행하고 있는데 집중이 깊어져서 지혜가 좋아지면 법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 스님, 제가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데 뒤에서 한 놈이 이렇게 보고 있어요.” 이러면 수행 열심히 하고 있는 ‘놈’은 행, 뒤에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 ‘놈’은 식일 뿐 그게 ‘나’는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행이 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색·수·상·행·식을 구별하여 볼 때 법을 본다고 말합니다. 수행이 깊어져서 법을 많이 보게 되면 ‘무아’를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있어서 계속 일어나서 사라짐을 알고 있으면 거기에 아(我)가 붙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어난 것이 즉시 사라지는 것을 계속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그때그때 가지게 되는 느낌을 아(我)라고 보는 것입니다. 행복할 때 행복한 나, 괴로울 때 괴로워하는 나, 고통스러울 때 고통스러워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 자아라고 할 때에는 이 네 가지의 나(我)를 이해하고 있어야 무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단지 색·수·상·행·식인 오온일 뿐인데 이 오온에 강하게 집착함으로써 그것을 자아, 나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몸이 있고 영혼이 있으며 이 몸은 영혼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이 몸이 죽어도 영혼은 계속 다른 몸을 받아서 산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 영혼 쪽에 특히 아(我)가 매우 강합니다. 혼이라는 것이 정신이고 그것은 색·수·상·행·식 중에서 색을 제외한 수·상·행·식이지요. 수(受)는 느낌이어서 행복한 느낌, 괴로운 느낌 등을 말하는데 그 느낌에 ‘아’를 붙여서 행복한 사람, 행복한 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수행으로 깊이 관찰하면 사실은 그와 같이 행복이라는 느낌만 있을 뿐 행복한 자는 없고 괴로움의 느낌은 있어도 괴로운 자는 따로 없음을 압니다. 괴로움은 괴로움이라는 느낌일 뿐인데 괴로운 자가 있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원인에 따른 결과일 뿐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견입니다. 색·수·상·행·식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집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없어서 모를 뿐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면 그 오온이 뚜렷하게 하나 다음에 하나,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하나가 생기고……, 오직 그럴 뿐, 오직 하나뿐입니다.

 


사진=박우석

느낌(受)도 아주 뚜렷하게 하나 다음에 하나예요. 한 느낌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다른 느낌 하나, 그 하나하나가 계속 변해가기 때문에 무상하고 그것에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생겨난 모든 것은 곧바로 사라지는 것인데 관찰하는 힘이 약해서 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그것에 나라는 생각을 붙이고 집착하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느낌은 그냥 느낌일  뿐이고, 행위는 의도에 의해 일어난 행위일 뿐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으려면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야 가능합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은 수에서 항상 ‘나’를 동시에 만듭니다. ‘아, 행복하다.’ 그러면 ‘내가 행복하다.’, ‘아, 괴롭다.’ 하면 ‘내가 괴롭다.’ 이렇게 됩니다. 수에 대해 아가 생긴 것, 수에 대한 아상, 이것은 아주 미묘한 것이어서 수행을 안 하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하면 수라는 느낌에 ‘나’라는 생각을 붙여 놓고 있던 것이 계속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수는 수일 뿐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됩니다. 행복함은 있는데 ‘행복한 나’가 따로 없고 괴로움이 있는데 ‘괴로운 나’는 따로 없음을 보기 시작하면 신·수·심·법 중에서 법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수·심·법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법을 보게 되면 오온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오온이 해체되어 보이게 됩니다. 하나하나가 다 따로따로 보입니다. 행복함이 있고, 행복함을 인식함이 있고, 그 행복함을 다시 보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면 행복함이 수(느낌)이고, 그것을 보는 것이 식(의식)이고, 또 행복함을 다시 보고 있다면 그것은 상(기억, 인식)입니다. 그런데 이 상과 식은 아주 미묘합니다. 행과 수는 그 변화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가 아니라는 것을 비교적 빨리 알 수 있습니다. 느낌이 따로 있고 그것을 느끼는 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쉽게 분리가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기에서 아상을 놓기는 쉽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식과 상은 아주 미묘한 것이어서 여기에서는 아가 빨리 떨어져 나가질 않습니다. 이것은 수행을 깊이 해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상과 식은 뿌리가 워낙 깊어서 수행자들이 많이 조심해야 하는 두 친구입니다. 이 두 친구를 제대로 깊이 알아야 무아에 대한 지혜가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뿌리 깊은 아견이 다 떨어져 나가야 무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물질에서 무아를 아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수행이 되면 물질은 모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집중이 얼마만큼 되면 몸을 느끼지 못합니다. 몸은 수행 중에 쉽게 해체됩니다. 그러나 정신 쪽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아주 미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은 죽어 사라지지만 영혼은 남아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에서는 무상을 쉽게 봅니다. 그러나 혼은 무상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를 제대로 알려면 형성되고 있는 네 가지 법을 꿰뚫어 보아야 위에서 살펴본 ‘네 가지 아’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혼(魂)의 개념과 그것에 대한 일종의 해체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혼이라고 하는 아상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아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위에서 알아본 네 가지 자아와, 다음에서 설명할 네 가지로 형성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인공인 나, 계속 살고 있는 나, 모든 것을 하는 나, 모든 것을 느끼는 나, 이렇게 네 가지의 아견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공부했습니다.
 
물질과 정신을 자아로 착각하게 하는, 형성되는 네 가지 ‘나’를 알아보겠습니다. 이 아상의 첫 번째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많은 개미들이 줄지어서 가는 것을 보면 개미가 한 마리씩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까만 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한 마리 한 마리 다 떨어져 있잖아요. 모든 물질과 정신이 이렇게 하나 다음에 하나로 각각인 것이 사실인데, 우리의 지혜가 낮아서 그것을 낱낱이 보지 못합니다. 전기를 예로 든다면 지금 우리는 전구가 계속 밝게 켜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전류가 끊어짐 없이 선으로 이어져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계속 전기가 나오면서 아주 미세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불이 켜지고 꺼지고, 다시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지만 그 간격이 워낙 미세해서 어둠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계속 밝다고 알고 있다가 완전히 전기가 끊어져 불이 꺼졌을 때라야 어둠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눈이 보는 속도가 만약에 그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면 밝음과 어둠이 번갈아 바뀌는 것을 그대로 알 수 있을 것인데 인간의 눈은 빛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 우리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알면서 그것을 참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앎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도 계속 일어나 사라집니다. 물질도 과정이고 정신도 과정이어서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엄청난 속도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그것을 따라갈 수 있는 지혜는 없어서 사실을 사실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그렇게 생겼다가 사라지고, 마음도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한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것을 낱낱이 못 보는 데서 문제가 생기고 그것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면 그 지혜의 힘으로 몸과 마음이 해체되어 보이기 시작하고, 따라서 ‘몸과 마음으로 형성된 나’가 있다고 보는 견해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각각으로 보게 되어 ‘나’가 해체되면서 차츰 우리가 무상·고·무아를 깨닫는 것, 이것이 첫 번째 아상을 해체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수행을 해 보면 이 몸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물질이고, 정신도 여러 가지 정신이 섞여 있으면서 상호작용하고 있는 하나의 과정임을 보기 시작합니다. 물질은 지·수·화·풍을 비롯하여 18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을 하기 전에는 몸을 하나라고 착각하지만 계속 관찰해서 실체를 보게 되면 그것들이 낱낱이 해체되는 18가지 물질일 뿐임을 보게 됩니다. 마음도 이와 같이 하나라고 착각하고 있던 것인데 수행을 통해 관찰하는 힘이 예리해지면 마음뿐만 아니라 마음부수도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 ‘아, 하나가 아니구나. 이것을 나라고 한다면 저것은 누구인가? 만약 저것을 나라고 하면 그럼 이것이 누구인가?’ 하면서 실체를 보게 되고 그래서 마침내 무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해체해서 보지 못하고 하나라고 보는 데서 아견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 즉 식과 관련이 깊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마음부수를 하나로 봅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마음부수가 같은 대상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난다면 화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부수입니다. 마음은 이 ‘화’라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뿐입니다. 즉 화는 마음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 화라는 대상을 두고 수·상·행·식이 모두 각자 자기의 일을 할 뿐 따로 ‘나’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존재가 없습니다. 그렇게 똑같은 대상에서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동시에 다른 일을 하면서 ‘아’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음은 항상 다른 대상을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대상에 대해 인식하는 마음이 하나이고, 또 다른 대상에서 인식하는 마음이 또 다른 하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이 다를 때마다 그것을 아는 마음도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소리를 느끼는 마음과 형상을 보는 마음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대상이 다르면 그것을 아는 마음도 다르다는 것은 직접 수행을 해서 체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원래부터 있던 마음이 가만히 있다가 소리가 생기면 그것을 듣고, 어떤 이미지가 있으면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볼 때 마음 하나가 생기고, 소리가 날 때 그것을 듣는 마음 하나가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즉 대상이 다르면 마음도 다른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으로 어떤 것을 형성하고 그것을 실체라고 착각하는 것인데, 우리가 제대로 관찰할 줄 알게 되면 대상으로 형성한 그것이 사실은 계속 해체되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 대상을 우리가 확실하게 구별하면 대상에 따라 마음이 각각 달라진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대상이 어떤 실체처럼 보이던 것이 대상이 해체되면 그것을 인식하던 마음도 해체되고, 그러면 식에 대한 아가 많이 깨집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여기는 마음, 식이 해체되어 버립니다. 마음도 하나 다음에 다른 하나일 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에 따라 마음이 생기고 다시 생기고 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 세 번째 아상 해체법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대상이 달라지더라도 거기에서 수·상·행·식이 같이 일하는데 그것을 ‘아’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한 대상에서 수는 느끼는 일을 하고, 행은 여러 가지 일을 해내고, 상은 기억하는 일을 합니다. 하는 일이 각자 다르니 역시 하나가 아니지요. 예를 들어 의사는 치료를 하고, 변호사는 법원 일을 하고, 경찰은 경찰의 일을 하고 교사는 교사의 일, 스님은 스님의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일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각 일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과 마음부수가 하는 일이 다르고, 마음부수들도 각자 하는 일이 다릅니다. 사띠의 일과 상(기억)의 일이 완전히 별개로서 섞이지 않고, 사띠와 지혜도 별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자신이 관찰하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의심이 나라면 신심은 누구인가, 또는 지혜가 나라면 어리석음은 누구인가, 욕심이 나라면 무탐은 또 누구인가 묻고 들어가면, 결국은 아라고 할 것이 없고 무아임을 깨닫게 됩니다. 신·수·심·법 중에서 법 관찰이 깊어질 때 마음부수들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볼 수 있습니다. 마음부수 52가지를 일어난 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부수들이 하는 일이 서로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 아가 무너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핵심인 무아법을 공부할 때 이렇게 네 가지 형성과 네 가지 아를 알면 무아를 이론적으로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면이 있어서 수행 체험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네 가지 형성과 네 가지 아를 개념적으로 알려고 해서는 이해가 불가능하고, 내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관찰하여 이 네 가지 형성법과 네 가지 아를 정확하게 알았을 때라야 무아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아 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네 가지 ‘나(아)’란 주인공인 나, 영원한 나, 모든 것을 하는 나, 모든 것을 느끼는 나이고, 앞뒤로 연결되는 형성, 여러 가지 물질과 정신이 합쳐지는 형성, 대상으로 조직되는 형성, 일로 만들어지는 형성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과 바른 지혜로 끊임없이 관찰했을 때 그 형성된 것들이 해체됨을 볼 수 있고, 착각으로 만들어진 ‘나’가 사실은 무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네 가지 아를 버릴 수 있는 사람, 네 가지로 형성된 것을 해체할 수 있는 사람,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의 지혜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팔정도 수행을 열심히 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를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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