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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로 수행의 균형을 이루라”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 2015-04-08 (수) 14:21

칠각지에서 사띠를 빼면 여섯 가지가 남습니다. 그것을 다시 세 가지씩 묶어 둘로 나누면 한 쪽이 노력 그룹이고 다른 한 쪽이 집중 그룹으로 짝을 이룹니다. 담마위짜야(지혜), 위리아(노력), 삐띠(희열, 기쁨)가 노력 쪽이고, 빳삿디(고요함), 사마디(집중), 우뻭카(평정)가 집중 쪽입니다.
 
수행이 잘 되려면 그 요소들이 균형을 유지해야 하고 두 그룹도 서로 정확히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띠는 균형을 이룰 필요 없이 무조건 많아야 하고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것도 사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띠가 없으면 깨달음의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균형이 깨졌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이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혜가 많아지면 노력도 좋아지는데 노력이 지나치면 집중이 약해집니다. 지혜는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하지만, 아는 것을 머리로 숙지하면서 계속 돌아보는 것도 지혜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리로 생각하는 지혜가 지나치면 수행에 방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저렇게 해야 하는 거야.’ 또는 ‘아, 법문할 때 그렇게 들었으니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는 게 맞지, 아냐, 저렇게 해야 맞는 거야…….’ 이러다 보면 고요함이 깨지면서 집중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머리로 많이 그리는 지혜는 욕심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심 때문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신심과 욕심은 아주 가깝습니다. 수행이 잘 되면 신심이 좋아지는데 신심이 좋아지면 머리로 여러 가지 상태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 봐야지, 내가 포교해야지, 내가 절을 지어서 사람을 어떻게 수행시켜야지…….’ 이렇게 계속 앉아서 머리를 씁니다. 그러면 수행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심으로 시작했던 것이지만 그 신심이 생각을 일으키면 그 때부터는 신심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올바른 신심은 단순하게 불·법·승을 좋아하고 믿으면서 그 힘으로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지혜로도 생각이 많아지고, 신심으로도 생각이 많아지지만 그 둘의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지혜로 생각이 많아지면 신심이 떨어지고, 신심으로 생각이 많아지면 지혜가 떨어집니다. 아주 미묘한 관계입니다. 내가 신심이 일어나면서 생각이 점점 많아지면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면서 마음이 들뜨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가 떨어지고 잠에 빠지는 쪽으로 바뀝니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후회만 남습니다. 신심으로 시작한 것이 후회로 끝나 버리는 경우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계속 지혜가 일어나면서 끊임없이 따지고 분석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다 아는 것 같아서 수행의 필요성도 못 느끼게 되니, 수행은 조금만 하고 내내 생각만 하고 있으면서 점점 자신이 모든 걸 다 깨달은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지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신심조차 망가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특히 머리 좋은 사람이 많이 조심해야 하는데, 머리 좋은 사람은 수행을 조금 해도 이해하는 것은 많을 수 있습니다. 실천력은 조금 있는데 이해력이 많아서 그 이해력으로 자신이 다 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 그냥 일주일 만에 수다원 되더라. 나한테 와.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 줄 테니까.” 하고 다니는데 이런 사람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머리가 비상하게 좋고 말을 잘 하는 데다가 경전까지 알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더 무섭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없는 것이 신심입니다. 신심이 떨어지면 지혜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기 중에도 대단한 사기이지요. 본인이 직접 수행을 해야 깨닫는 것이지 수행을 과외 수업시켜 남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깨달음이 일주일에도 될 수 있고, 한 시간 안에도 될 수 있지만 실천수행이 없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사진=박우석

이렇게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에는 각 요소들이 항상 균형을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사띠입니다. 수행 중에 신심이 오면 그러함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이 잘 되니 신심이 좋아지고 불·법·승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는 것은 좋은데 이것이 균형을 잃으면서 갑자기 ‘아, 아버지 어머니는 이 좋은 것을 모르고 가셨구나.’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아, 우리 동생도 수행시켜야지, 남편도 알면 좋을 텐데, 내 아들딸도 수행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이 계속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면 그 마음을 빨리 관찰해야 합니다. 신심이 지나치면 그 다음은 욕심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 다음은 성냄으로 치솟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애들에게 수행하라고 하는데 왜 안 하나? 왜 이렇게 말귀가 어두워?’ 그렇게 되면 갑갑해지면서 수행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신심이 넘쳐도 안 되고 지혜가 넘쳐도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심이 넘치면서 진정한 지혜가 없다 보니 지금 내가 제대로 하는 건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가족들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아이고, 말만 하면 수행, 수행 하면서 하는 짓을 보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또 지혜만 높아져도 문제이니 이런 사람은 실천과 수행이 나란히 병행해야 되는데 실천은 조금만 하고 생각은 아주 많이 합니다. 법문을 듣고 책을 읽어 아는 게 많다 보니 ‘수행하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고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일 뿐, 그 상상이 이론적으로 틀리지 않더라도 자신의 심리에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 아, 경전에서 말하는 이것이 실천하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고 이해는 하지만 자신의 심리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수행으로 체험한 사람과의 큰 차이점입니다. 실제로 체험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심리에 변화가 옵니다. 그래야 사람이 성장합니다.

 

그런데 수행은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지식과 지혜가 좋아서 말 잘하고 강의도 잘하지만, 인간적인 성장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제일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염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조심해야 하고, 자신의 수행 중에 그런 상태가 오는 것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지혜와 노력, 희열이 한 편이고, 고요함과 집중, 평정이 다른 한 편입니다. 지혜가 커지면 노력도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수행에 의한 올바른 지혜가 아니라 계속 머리로 하는 이해에 의한 지혜일 경우에는 노력하는 만큼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만큼 집중이 안 온다면 틀림없이 머리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실천하는 것보다 머리를 많이 쓰고 있으면 집중이 안 오고, 제대로 수행하여 노력하고 있다면 집중이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수행이 잘 되고 있으면 차츰 몸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만약 계속 몸과 마음이 불편하다면 자신의 수행 상태나 마음 상태를 점검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집중이 안 온다면 알게 모르게 신심이 넘치거나, 지혜가 넘치거나, 노력이 넘치는 등의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에는 삐띠가 수행을 도와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삐띠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좋은 사람은 지혜로 생각하면서 바르게 이해해도 삐띠가 올 수 있고 틀리게 이해해도 삐띠가 올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만심과 함께 하는 삐띠도 있으니 삐띠를 100%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욕심의 삐띠도 있어서 좋아하며 먹을 때도 삐띠가 있고 영화 볼 때, 노래 부를 때, 남자 여자가 좋아할 때도 삐띠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삐띠가 있다고 하여 그것을 다 좋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자만과 욕심으로 되는 삐띠도 있어서 ‘내가 잘한다, 내가 잘한다.’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으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로 수행이 잘 된다면 자만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삐띠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노력이 집중으로 가는 노력이 아니고 많이 생각하는 노력입니다. 그러면 욕심을 부리는 쪽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에도 희열이 조금 있을 수는 있지만 이것은 욕심과 관계 있는 희열입니다.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타고난 체질 자체가 욕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거나, 수행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어서 수행과 관련된 생각이 많지 않은 사람으로, 그런 경우에는 빨리 집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중이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집중이 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아주 고요하고 평온하다가 조금 있으면 잠에 빠져 버립니다. 집중이 되면 대상이 미세해지는데 마음이 이 미세한 대상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중이 너무 강해지면 마음이 무거워졌다가 그 다음에는 작동을 안 합니다. 관찰하는 것을 멈춰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강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띠입니다. ‘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구나.’ 하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면서 노력을 강화시켜 확실한 관찰력으로 그 상태를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숨을 들이쉬면서 들이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희미해지면 들숨, 날숨 하고 명칭을 붙이면서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고, 명칭을 안 붙여도 마음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강하게 사띠하면서 조심스럽고도 확실하게 알면 노력과 지혜와 희열이 다시 올라오게 됩니다. 적절히 노력해서 대상을 확실하게만 관찰해 주면 지혜로 현재의 대상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사띠는 수행의 매 순간 항상 챙겨야 하는 수행의 필수요건입니다. 수행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노력과 지혜, 희열 쪽에 문제가 많습니다. 노력이 넘치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이완시키면서 우뻬카를 올려 줍니다. 초심자의 경우 집중이 넘쳐 몽롱해지고 관찰이 무뎌지면 노력 쪽에 좀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렇게 현재 자신의 수행 상태가 어떤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사띠는 항상 필요하며 사띠의 힘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수행 초보자는 집중에서 멈추면서 수행이 깨지고, 수행 경험자는 욕심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수행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걸 아시고 사띠를 연결시켜서 깨달음의 요소 여섯 가지가 균형을 이루도록 할 때 수행이 고르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칠각지 내용을 바르게 알아 마음에 새기고, 열심히 팔정도 수행을 하여 모든 고통 벗어난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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