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炷香殘秋夜深  한 줌 향은 사위어가고 가을밤은 깊어지는데
蛩聲月色攪禪心  귀뚜라미 소리 밝은 달빛이 선정에 든 마음을 흔드네.
百年人事不可計  백 년 사는 사람살이도 헤아릴 길 없고
三世妄緣無處尋  삼세의 망령된 인연은 찾을 곳이 없구나.
庭樹正愁風露勁  뜰 앞의 나무는 매서운 바람 이슬 근심하듯 고개 숙였고
山禽似話洞雲侵  산새들은 골짜기로 구름이 몰려온다고 알리는 듯 지저귀네.
蒲團紙帳淸於水  창포로 만든 방석과 종이 장막이 물보다 더 맑으니
閑展禪經閱古今  한가롭게 불경을 펼쳐놓고 고금의 일들을 열람하노라.

                                               -김시습의 <밤에 앉아 불경을 읽으며[夜坐看經]>

세종에 의해 일찍부터 인재로 인정받아 앞날이 창창했던 소년 천재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일화는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 수양대군에 의한 불의의 왕위 찬탈이 있자 옛 주군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평생을 포의로 산 꼿꼿한 충렬의 선비로서도 그는 많이 기억된다. 뿐만 아니라 20대 젊은 나이에 삭발하고 승려가 되어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고행의 길을 자처했던 외롭고 괴로운 한 사람의 자취 또한 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는 선비와 선승의 길을 불이(不異)의 길로 여기며 산 중세의 지식인이었다.

김시습하면 떠오는 이미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역시 신동이란 말일 것이다. 그는 다섯 살 때 벌써 글을 읽고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워낙 소문이 나서 세종이 불러들여 운자(韻字)를 불러주고 삼각산(三角山)을 제목으로 절구를 짓게 했다.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칠언절구 한 편을 쏟아냈다.

束聳三峯貫大靑  세 봉우리를 묶어 세워 푸른 하늘을 꿰니
登臨可摘斗牛星  그 위에 오르면 두우성도 딸 수 있겠구나.
非徒岳岫興雲雨  멧부리에서 구름과 비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能使邦家萬世寧  능히 국가로 하여금 만세 동안 편안하게 하겠네.

세종은 그 남다른 솜씨와 마음씀씀이에 감동하여 칭찬하고 많은 물품을 상으로 내려 표창했다. 뒤에 난세를 만나 일부러 미쳐서 스님이 되었지만 또한 선서(禪律)에만 얽매이지도 않았다. 그는 성리학과 음양술서(陰陽術書), 의약, 점술(占術) 등 모든 것에 통달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문장이 호한(浩瀚)하고 방사(放肆)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세종에 대한 의리 때문에 끝내 세상을 저버리고 승려로서 방외인(方外人)으로서 일생을 산 것은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재주와 인격을 두루 갖추었던 그가 세상에 나와 학문을 하고 치자(治者)의 길로 들어섰다면 비범한 재능을 마음껏 펼쳤을 것이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환속시켜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했던 것이다.

생애의 절반을 승려의 신분으로 산 그인지라 불교와 관련한 작품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집이라 일컬어지는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담긴 불교 사상도 만만찮지만 그 감상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 이 자리에서는 불교 시문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하자.

오늘 소개하는 시는 김시습이 한밤에 등불을 밝히고 경전의 심오한 가르침 속에 침잠했던 한 시간을 잘 포착하고 있다. 승속의 갈등과 이를 극복하려는 수행의 각오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경전의 오묘한 진리에 정신없이 빠졌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가을밤도 어느새 무르익고 있었다. 향불도 다 타 버렸는데,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밝은 달빛이 자리를 감싸고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번민을 선경(禪經)을 읽으며 달래려고 했는데, 그나마 풀벌레 소리와 달빛이 깨워놓고 있다. 험한 인생살이와 아득한 인연의 고리 속에 갑자기 마음 갈피를 잃어버리고 그는 두리번거린다.

속진(俗塵)에 대한 회한이 너무나 간절했던 그였기에 주변의 물상들이 그저 범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뜰 앞에 나무도 근심스레 머리를 숙인 듯 보이고, 산새들 지저귐도 구름 몰려오니 소나기 조심하라는 넋두리로 들려온다. 승려로서의 삶에 무슨 회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보다 맑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그 생활을 그는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중년 이후 그가 환속과 출가를 거듭했던 것도 그런 번민과 이승에 대한 많은 미련들이 빚어낸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경전 속에서도 해탈의 즐거움 보다는 고금의 역사를 뒤적이며 근심의 나래를 접지 못한다.

누구보다 시대와의 불화를 겪으면서 애달픈 삶을 살았던 김시습의 쓸쓸한 자화상이 그려진 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돌았던 황량한 마음을 추스르고자, 불가에 귀의해서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이를 극복해 보려고 노력했던 그의 흔적이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