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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아이들 목판화로 되살리다

배희정 기자 | chammam79@hanmail.net | 2015-03-23 (월) 15:17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아이들의 얼굴이 목판화로 생생히 되살아났다. 신문에서 안타까운 사연을 가슴으로 되새김질한 목판화가 정찬민 씨가 박재동 화백(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의 희생자 캐리커처를 들여다보다 내린 결정이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억울한 아이들의 넋을 기리고 가족들에게 위안이 되기 위해서였다.

 

국민들의 뇌리에서 세월호 사건이 잊히지 않도록 박 화백의 동의를 얻은 후부터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도 뒤로 한 채 묵묵히 예리한 칼날을 세워 목판을 새겼다. 수백만 원에 달하는 재료비나 작가로서의 저작권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 땅의 역사를 기억․공유하려 한 작업이 어느덧 1년이 다 돼 간다.


 

지난해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 전시된 정찬민 씨의 작품들.


지난해 12월 31일 세월호 아이들의 얼굴을 새긴 판화를 광화문 광장에 전시한 정찬민 씨가 같은 장소에서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 면목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즐비한 목판과 조각칼 등이 세월호 목판화 작업에 매진하는 그의 일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지난해 5월 한겨레신문에서 관련 기사와 박재동 화백의 그림을 접하면서 무언가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하지만 당시에 유가족들이 마음의 정리가 안 된 상태고 예민할 때여서 기다렸어요. 그러다 9월 중순 박 화백에게 판화 제안을 한 뒤 ‘좋은 기획’이라는 화답에 그의 그림을 받아 판화 작업을 시작했어요. 지난해 연말 유가족들의 승낙을 받고 전시도 하게 됐고요.”

 

아이들의 사연을 읽고 마음 가는 대로 칼날을 세웠건만, 아직도 해야 할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그 과정에서 2학년 9반 학부모들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고 추가로 다시 만들어 나눠주기도 했다. 제작된 목판화만 총 150점 정도다. 
 
그는 “앞으로 1주기 전까지 90명 정도를 더 만들어야 한다”고 털어놨다.

 

목판화가 정찬민 씨가 자신이 만든 목판화작품을 바라보며 세월호로 희생된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목판화의 작업 과정은 깊은 사유와 엄청난 노동력, 집중력을 요구한다. 스스로 ‘손이 빠르다’고 자부하는 그도 세월호 아이들 얼굴을 새길라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달려 5~6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제가 해줄 수 있는 재능기부”라며 “꼭 이 작업을 마치고 싶다”고 말했다.

 

“기사로 사연을 읽은 다음 캐리커처를 보면 마음이 그래요. 그만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제 작품을 많이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잠시 쉬었다 가는 거죠. 이게 제게 더 큰 거예요.”

 

정 씨는 희생 아이들의 모습을 모두 목판화로 담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작업 중인 20점의 목판화도 조만간 광화문광장에 전시될 예정이다. 지난해 전시작이 그랬듯 올해 전시될 작품도 모두 안산 추모기록관에 옮겨질 예정이다. 이에 대해 그는 “전시되면 더 이상 제 작품이 아닌 유가족 것”이라면서 “저 말고 더 많은 분들이 봉사하는데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 웃음 지었다.

 

그는 유가족과 깊은 얘기는 못 나눴지만 고마워하는 마음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마음이 아파 도저히 팽목항에는 못 갔지만’, 그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유가족에게 2학년 10반까지 있는 단원고의 ‘2학년 11반’으로 통하고 있었다.

 

정찬민 씨가 세월호 희생자 고 신호성 학생이 쓴 시 '나무'와 그의 얼굴을 목판화한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정찬민 씨는 스스로 사람들에게 ‘나무를 사랑하는 바보’로 불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호가 나무목에 어리석을 치를 쓴 목치(木痴)다.

 

정 씨는 오랜 기간 동안 나무를 관찰하고 다루면서 “나무는 재가 됐을 때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다. 날카로운 칼로 무른 나무를 조각하며 새 작품으로 빚어내기까지 목판의 휘어짐과 변함을 직접 관찰하며 느낀 체험의 결과다. 그는 “나무가 불타 재로 변해도 또 다른 생명의 거름으로 윤회되는 것”을 보며 순환하는 생명에 깊이 인지하고 감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이번 사건이 너무나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이번 일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각 사회단체, 교수 집단, 정부가 모여서 면밀하게 조사하고, 안전사고 대비하는 로드맵이 확실하게 생겼으면 좋겠어요. 유가족들도 이걸 원하고 있어요.”

 

판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나무 사랑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산악인으로 이름나 있는 그였다. 정찬민 씨는 29세이던 1987년 록파티산악회에 가입하며 등반에 나섰다 록파티산악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4박5일간 울산 바위에서 침낭을 이용해 노숙하면서 바위에 설치된 낡은 볼트와 와이어를 수거하고 새 것으로 교체할 만큼 산사랑이 지극했다.

 

“군대 수계식에서 받은 제 법명이 ‘시내계 자’에 ‘뫼산 자’인 ‘계산(溪山)’이에요. 제가 젊을 적 암벽등반을 즐기는 등 산타기를 즐거워했는데 어떻게 아시고 그런 법명을 지어주셨는지 지금도 신기해요.”
 
그렇게 산을 오르내리며 나무를 사랑했던 평범했던 회사원이 어떻게 목판화가로 살게 됐을까.

 

그는 “목판은 인생”이라고 운을 뗐다. 어릴 때부터 유독 만들기를 좋아했고, 군대에서도 깎기를 잘한다고 인정받았을 뿐이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고건축에 관심이 많다보니  1993년부터 3년간 관련 강좌를 듣고 문화답사를 다니며 전통 건축 양식에 눈뜨기 시작했다. 벽암록, 삼국유사 강의 등을 이론 공부도 섭렵하게 됐다.

 

평범한 회사원이었기에 1988년 서울 서대문 굴레방다리 근처에서 열린 판화강좌를 들으며 업이 될 것이라고는 짐작치 못했다. 회사를 명예 퇴직하던 2004년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의 각자반(刻字班)에서 고 철제 오옥진 선생(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기능보유자)을 만나면서부터 서각을 배웠고, 이때 목판에 눈을 돌린 것이 ‘제2의 인생’이 됐다. 3년차인 전문반을 수료하고도 계속 전문반을 신청해 수업을 들으며 톱질부터 대패질, 색칠, 구성까지 전반을 공부했다. 2005년 취득한 산림기능사 자격증도 그에게 나무를 생명으로 바라보는 원천이 됐다.

 

 

정찬민 씨는 세월호 희생자 신승희 양이 사고 전 '아픔에 우리의 눈물이 비가 되어 잔잔한 바다외 뒤섞인다. 우리는 잔잔한 바다를 영원히 함께 항해하리'란 내용의 '항해'란 시를 썼다면서 이 내용도 목판화할 계획이다.


 

판화에 몰두한 지 10여 년이지만, 목판에는 그의 인생 여정이 새겨지고 있었다. 산을 40년 가까이 다녔기에 한때 목판 위에 인수봉을 새기며 ‘산(山) 목각’의 선구자를 꿈꾸기도 했다. 이후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노 대통령의 모습과 그의 친필 어록을 새겨 전시하고 일상 속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담기고 하고, 시비(詩碑)를 탁본해 판화를 만들기도 했다. 불교미술대전에서 최우수상인 문화재청상,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의 ‘원주 전통판화공모전’에서 강원도도지상과 문화재청장상인 대상을 받는 등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그였다. 따라서 그에게 ‘새긴다’의 의미는 “면밀하게 집중해서 혼을 다하는 과정, 즉 마음의 알아차림과 같다”고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제 작품을 못했네요. 공모전 외에는 세월호 작품에 올인했습니다. 누구와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1주기까지는 희생된 아이들과 그 부모를 위해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는 현재 작업 중인 세월호 작품을 마치면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 같은 불경 작업에 매진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우리나라 인쇄문화가 불교에서 나온 만큼 한국미술은 불교미술이나 다름없다”면서 청량리 청량사와 삼각산 도선사를 다닌 외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불교가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자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절에 많이 다녔는데 그 가운데 겨울철 대원사 요사채 앞 맑은 도랑과 봄날 개심사의 한적한 오솔길의 풍광, 부석사, 선암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은 조계사, 도선사를 자주 다닌다면서 “불교적 내용을 바탕으로 한 목판화를 만드는 작업이 마음 편하다”고 말했다.


 

'먹고 잘 때'만 빼고 목판화 작업에 임한다는 정 씨는 요즘 개인적 작품활동도 마다한 채 세월호 관련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소위 먹고 잘 때 빼고는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이건만, 후원자가 없고 작품 판매도 원만치 않은 현실적 여건은 고충일 터다. 그는 육체적으로 고되고, ‘돈도 안 된다’지만 “혼을 담은 성과물을 남길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산을 타며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을 생활화했더니 극적인 어려움도 없었고, 잠시 어려울 뿐 지나가더라고 털어놨다. 그는 전통 방식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응용해 새로운 기법으로 의외의 결과가 나올 때 다른 사람의 칭찬보다도 더 큰 기쁨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후배에게 “목판화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무형의 아름다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있는 성취감 있는 공부”라면서 “목표 설정은 짧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혼이 담기는 작품을 내려면 관련 공부도 많이 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1931년에 발간된 최남선의 ‘백두산 등보기’ 영인본부터 산과 관련된 책을 비롯, 한옥, 문화재 관련 책 등 2천여 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간 틈틈이 찍은 사진도 수천 컷에 달한다. 자료 축적이 많이 된 그이건만 소재 발굴이나, 창작활동에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일주일에 한두 번 미술관을 반드시 관람하고 있다.
 
그는 많은 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불경 한 권을 완판으로 작업하고 싶은 것은 물론, 방송통신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싶어했다. 글쓰기 훈련에 매진해 그간의 인생과 자기 성찰, 관심사, 그의 작업 내용을 수록한 책을 펴내고 싶은 바람도 전했다. 
 
“동일한 작품을 여러 장을 찍고 공유할 수 있는 판화란 제게 인생입니다. 제 작품을 많이 찍어 세월호 유가족 등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그 분은 제 작품을 통해 잊지 않고 마음에 담지 않습니까. 돈을 떠나 제 작품을 고마워하는 그 마음에 저는 작품 활동을 계속 해나갈 겁니다.”


 

정찬민 씨가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 '대방광불화엄경권제삼십사'와 '반야심경' 앞에서 밝게 미소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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