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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보다보면 그의 상처나 욕심이 환히 드러난다

하도겸 | dogyeom.ha@gmail.com | 2015-03-10 (화) 09:14

우리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말이 있다. 강한 자들끼리 싸우는 통에 아무 상관도 없는 약한 자가 중간에 끼어 피해를 입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한다. 정말 그런가?

 

조금 아는 사람 두 명이 많이 시끄러워진다. 내가 나도 잘 모르는데 그 둘을 잘 안다고도 할 수 없어서 조금 안다고 했다. 하지만 남들은 우리가 잘 아는 사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그런 관계가 대부분이다. 존경하는 두 선생님이나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두 선배 등 좀 아는 윗사람 두 명이 싸우기 시작하면 참으로 곤란하다. 이혼소송을 하면 그 부모의 아이가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주변의 두 사람이 마치 싸움이라도 벌일 것 같은 기세를 취한다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생각해 둬야 할 것이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유비무환이다. 불자라면 항상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고 반성하는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 그 어떤 일이 있어서 내 마음이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꼭 성성해야만 한다고 집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성성하지 않으면 이미 내가 아니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살얼음판을 걷듯이 언제나 신중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결국 조고각하다. 즉 내가 지금 바로 어디에 서 있는지를 먼저 보면 된다. 내 마음이 왜 무엇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근본 원인을 계속 살펴야 한다. 주제에 오매일여니 몽중일여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우선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가 이런 느낌이나 생각 또는 마음을 왜 먹고 있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을 얘기할 수 있다.

 

주변에 두 분이 다투려는 낌새가 보인다. 우선 정말 나와 관련된 것인지 봐야 한다. 무관하다면 피하면 좋다는 처세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어차피 다 안다. 결국 무관하든 관련이 있든 간에 그걸 싸움으로 이미 인지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봐야 한다. 아직 싸우진 않았지만 싸움으로 인식한 것은 왜인지 바라봐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 다툼, 시끄러움, 대립 등은 낱말은 대부분 긍정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는 이 낱말들을 떠 올리거나 말했다면 이미 이는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고통이 된 것이다.


 


 

고집멸도에 따른 사성제로서 고통을 해결하면 된다. 그 원인은 무명에 있으니 무명을 밝히면 된다는 사성제의 수레바퀴에 따라 해결의 첫 단추를 풀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가 되던 불행하게도 반면교사가 되던 오직 타산지석으로 삼겠다는 그런 겸허하게 신중하게 배우려는 자세를 미리 갖춰놓으면 좋다. 그렇게 무명을 바라봐야 한다. 그때서야 제대로 된 관(觀)이 시작된다. 그렇게 무명을 보면 된다. 시작이 반이다. 무명을 보면 무명은 더 이상 무명이 아니다. 어두운 방안에 갑자기 들어가면 물론 어둡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둠을 마주하고 보려고 노력하면 조금씩 보인다. 적응하면 더 잘 보인다. 하지만 보지 않고 눈을 감으면 더 어두울 따름이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무명이다.

 

어떻게 해든 밝혀야 한다. 꿩 잡는 게 매다. 밝히면 무명은 사라진다. 우선 왜 난 그걸 ‘싸움’으로 보는지 아니 받아들였는지를 봐야 한다. 싸움(부정, 고통의 원인인 무명)이 아닐 수도 있다. 그걸 싸움으로 보려고 하는 스스로의 상처나 욕심을 찾아봐야 한다. 혹시 내게 싸움에 대한 상처가 있는지 아니면 싸움이 싫고 피하려는 욕심이 있는지도 면밀하게 봐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서 있는 곳이 틀리지 않았고 실제로 싸움이 벌어진다면 다음으로 두 사람을 봐야 한다. 그 둘이 어디에 서 있는 살펴야 한다. 그들의 상처와 욕심을 봐야 한다. 실제 싸움의 잘잘못은 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두 사람의 마음을 먼저 봐야 한다. 뭘 원하는지 왜 그러는지. 그게 보이면 해결은 이미 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나와 같은 어떤 관점과 레벨, 그리고 시야(안목)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나보다 정신적 수양이 더 된 이들이 많기도 하기 때문이다. 간혹 반대도 있다.

 

이 경우 상대적으로 좀 높거나 나은 사람을 먼저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사건을 계기로, 즉 타산지석으로 삼으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고치고 바꾸려는 의지가 있고 또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욕심이 없거나 덜하거나 다른 큰 이유가 있어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사랑의 매를 드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나아가 유치원생과 진심으로 싸우는 어른다운 어른은 없기 때문이다. 안목이 큰 사람이 그러는 데에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모르는 것도 우리가 잘못 보거나 잘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고만고만한 윗사람들이 서로의 이익이나 상처 또는 욕심 때문에 싸우는 그런 것이다. 이 경우라면 그 옆에 있을 필요도 없이 당장 피하는 게 맞다. 상종할 가치나 시간이 있다면 안 가도 좋다. 두 사람을 포함한 모두가 스스로를 바꾸거나 고칠 수 있는 시절인연이 아니라면 이들과는 관계 역시 좀 멀리하는 게 좋다. 그 시간에 공부 더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사람의 말을 보는 방법은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의견, 주장의 내용이나 논리를 듣지 말고 결국 원하는 게 뭔지, 그 의도와 욕심만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된다. 처음에는 모르겠지만 보다 보면 익숙해지고 알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보다 보면 그의 상처나 욕심이 환히 드러난다. 특히 그의 말에 담긴 편협한 편견, 선입관, 고정관념, 시각, 관점, 레벨, 안목도 보이게 된다. 그걸 보면 왜 그가 이렇게 살고 있는지 그런 틀 속에 갇혀 고통스럽게 싸우는지도 알게 된다. 그걸 보게 된다면 이미 당신은 새우가 아니라 고래가 된다. 아니 바다도 될 수 있다. 그러니 새우싸움에 고래 등 터질 일은 없게 되는 이치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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