森嚴殿四壁  팔각전 네 벽의 그림이 엄숙도 한데
不知何時績  어느 시절에 그렸는지는 알지 못하지.
儼然紫摩軀  금빛으로 그린 몸체는 의젓하고 고운데
彩毫光炯碎  채색한 붓놀림은 눈부시게 빛나 흩어지네.
龍天來走趍  하늘에서 용이 느릿느릿 내려오고
幢蓋雜環佩  깃대와 일산은 어지럽게 펄럭인다.
左右護法神  법을 지키는 신령이 좌우로 벌려 서서
努眼耿相對  부릅뜬 눈으로 마주 보고 서있구나.
飛動颯精神  날아 움직이는 기운은 정신을 들뜨게 하고
淋漓露情態  넘치는 원기는 마음의 자태를 드러내네.
色昏意常新  색은 흐려도 뜻은 항상 새로우니
妙法眞可愛  오묘한 가르침이 참으로 사랑스럽구나.
皆云吳道玄  모두 오도자의 솜씨라 말하는데
來畵垂千載  와서 그린 지가 천 년이 지났다고 한다.
道玄是貴臣  오도자는 당나라의 존귀한 신하였는데
何緣遊海外  무슨 인연으로 바다 멀리 노닐었겠나.
野言不足憑  떠도는 말을 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니,
信者實聵聵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어리석은 짓일 것이지.
雖曰非道玄  비록 오도자의 솜씨가 아니라고 해도
的在新羅代  신라시대 때 그려진 것만은 틀림없어.
物古藝亦殊  그림도 오래 된 데다 예술혼도 남다르니
觀之自心快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절로 탁 트이네.
莫較吳與羅  오도자인지 신라시대인지 비교할 것 없으니
寶之毋欲壞  보배롭게 간직하여 길이 후손에 물려주어야지.

-허균의 <팔각전에서 불화를 보면서(八角殿看畵佛)>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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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1569-1618)은 조선시대 내내 인물됨과 문학 때문에 두고두고 논란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정도전(鄭道傳, 1337-1398)과 함께 조선시대 내내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폄하를 당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들에게는 최초의 한글소설이라 알려져 있는 󰡔홍길동(洪吉童傳)󰡕의 작가로 귀에 익은 인물이지만, 실제로 그는 시인이자 비평가,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허균이 쓴 불교시의 특징을 살피면 주제나 소재의 폭이 넓다는 점이 눈에 띤다. 많은 문인들이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에 입각해 승려들과의 교유시나 사찰기행에 얽힌 작품들이 많은데 비해 허균은 경우는 이런 작품들 외에도 불교 예술이나 불교사, 불교철학 등과 관련된 작품들도 적지 않다. 이것은 허균이 불교를 신앙으로써 뿐만 아니라 예술사적, 사회사적 관점에서도 주목하여 접근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어떤 면에서는 그는 전방위적인 방향에서 불교에 접근한 많지 않은 인문학자였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허균이 쓴 300여 편이 넘는 전체 한시 작품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작품만 얼추 33편이 되니, 전체 양의 10%를 차지한다. 오늘 소개하는 한시는 불교 예술에 관한 그의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느 사찰의 팔각전(八角殿)에 걸린 부처님의 그림을 보고 느낀 바를 노래한 작품이다.

부처님의 당당한 모습을 형상화한 탱화(幀畵)를 보며 허균은 큰 감동을 받았다. 색(色)을 통해 공(空)의 경지를 깨닫는 맛이 무엇인지 느껴졌다. 그것은 붓놀림만으로 그려진 작품이 아니라 신품(神品)이 느껴지는, 범접하기 힘든 세계가 저변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채색 속에 담긴 장중한 용화세계(龍華世界)에 그는 압도되지만, 한편으로 정신적 깨달음의 경지란 말보다는 색을 통해 더욱 명징해지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구나 그 색의 세계가 감각의 공간이 아니라 공의 세계를 표상한 것이라면 정신세계를 말끔히 씻어내는 청량제 구실을 할 것은 당연하다.

부드러운 색감과 적당히 바랜 채색에서 허균은 화가의 예술혼(藝術魂)을 읽어낸다. “색은 흐려도 뜻은 항상 새롭다[色昏意常新]”는 시구가 이를 대변한다. 명암의 대비가 선명하고 물감의 흔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림이라면, 기교는 생생할지 모르지만 은은한 맛은 그만큼 떨어진다. 흐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깨달음의 세계를 허균은 팔각전에 그려진 탱화를 보여 체험하게 된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서 허균은 약간 색다른 접근을 한다.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는 학자 기질을 면할 수 없었던가 보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기묘한 그림을 그린 화가를 두고 논란이 많아 당나라 때의 화가 오도자의 솜씨라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대로라면 물경 천 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다. 화필(畵筆)이 예사롭지 않기에 나온 상상이겠지만,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속필(速筆)로 이름을 날린 그가 이 땅에 와서 그림을 그렸을 리가 없다.

물론 중국에서 그려진 그림이 어쩌다가 조선의 사찰로 유입되었을 수도 있지만, 역시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도 이 구전(口傳)을 의심하면서 세상에 떠도는 말을 다 믿을 수 없다고 못 박는다. 그러나 오도자의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화풍이나 연륜을 볼 때 신라시대의 작품임을 틀림없을 것이란 진단을 내린다. 무슨 근거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허균의 문예에 대한 안목과 조예를 생각할 때 허투로 나온 판단은 아닐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 불교 예술을 접하고 가지게 된 안목에서 우러나온 평가일 것이다.

 “물건이 오래 되면 신령이 깃든다.”는 속설이 아니더라도 허균은 불화의 고아(古雅)한 풍치와 화폭에 담긴 장인 정신을 간파한다. 그림을 보면서 허균은 자신의 가슴이 활짝 열리고 탁 트이는 돈오(頓悟)의 경지를 맛보게 된다.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고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할 역량을 갖춘 작품이라면 이렇다 저렇다 비교하지 말고 소중하게 잘 보존해서, 앞으로 올 어리석은 중생들의 대오각성을 위한 보람찬 터전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