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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고개 근처 성북점자도서관을 찾았다. 강태봉 한국시각장애인불자회장(53, 사진)을 만나기 위해서다.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부설기관인 이곳에 들어서니 출판실에서 기계음이 요란했다. 한문이 점자로 빼곡히 새겨지는 소리였다. 그곳에서 한자 한자를 손으로 만지는 강태봉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입력한 한자를 교정 보고 있어요. 이 과정이 끝나면 제본을 거쳐 점자책이 나오죠.”

이어 강 씨는 녹음실에 들러 자원봉사자가 녹음한 소리도 검수했다. 시각장애인이 들을 소리도서였다. 스캔리더 프로그램이 읽어주는 컴퓨터의 워드를 치며 도서관 사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기실 강 회장을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앞서 인터뷰는 이미 진행했으나 그가 하는 일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첫 인터뷰 진행 장소가 다름 아닌, 미아리고개의 철학관 간판이 붙어 있는 모처에서 진행됐기 때문이었다.

“올해로 12년째 근무 중이에요. 2004년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직업재활팀에서 근무를 시작해 현재 도서관에서 사무장을 맡고 있죠.”

자신을 당당하게 사무장이라고 소개한 그가 왜 미아리고개의 한 철학관 간판이 붙어진 모처에서 기자를 만난 걸까?

“도서관 출퇴근이 용이하면서도 시세가 저렴한 거처예요. 앞에 간판 때문에 오해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어요. 제가 직장인이니 철학관을 운영하면 안 되고, 할 시간도 없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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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점자도서관 출판실에서 직원과 함께 한자 점자 교정을 보고 있는 강태봉 회장.

현재 그는 남의 도움 없이 날마다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만든 길이다.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장애를 극복하고, 한 기관의 사무장이란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은 애환과 고초를 어찌 헤아릴 수가 있으랴. 그는 기자에게 불교에 귀의해왔던 그간의 삶을 털어놨다.

충북 음성 출신인 강 씨는 위로 누님 셋을 둔 2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집안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던 그가 ‘국민학교’ 2학년 때 갑자기 망막박리증을 앓게 되면서 평탄하던 삶의 반전이 일어났다. 서울 유명 안과를 전전했지만 차도가 없었고, 발병 후 1년이 지나자 완전 실명에 이르렀다. 그의 가족들은 강 씨가 앞을 볼 거란 희망을 잃지 않은 채, 단양 구인사 등을 돌며 기도에 매진했다.

“저는 10살 때 실명돼 그래도 다행이에요. 나이 들어 시각 장애가 오면 괴로워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예요.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 지극한 불자였던 어머니의 관세음보살 정근을 들으며 견뎌낼 수 있었어요. 어려울 때마다 불교가 제 삶에 큰 위안을 준 셈이죠. 제게 불교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주는 고향이에요.”

강 씨 나이 14세 때, 그가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던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부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54세 나이로 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 이때 생사에 대한 고뇌에 빠진 강 씨는 법화종 사찰인 충북 음성 쌍용사에 들어가며 불교와 역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앞날의 진로를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에요. 당시 시각장애인들은 해야 할 일이 안마, 침술, 그리고 역학 세 가지 뿐이었죠. 저는 불교를 공부하고 싶었기에 역학을 선택했어요. 결국 14살부터 18살 때까지 사찰에서 천수경을 비롯해 장엄 염불, 목탁 치는 법, 절하는 방법 등 불교의식과 역학 상담하는 법을 배웠어요.”
 
이어 그는 인생의 또 다른 전기를 맞았다. 불교를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라는 스님의 권유로 경기도의 모 사찰로 거처를 옮겨 행자생활을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동갑내기 일반인과 행자 생활을 함께 한 그는 사찰 살림에 도움이 못되는 자신의 처지가 가시방석일 뿐이었다. 아침 일찍 동료 행자는 마당 법당을 청소하는데 강 씨는 앞이 안 보여 도와줄 수 없어 미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지 스님은 그에게 ‘장애인은 계를 못 준다. 차라리 속세에서 역학 쪽으로 나가라’고 권유했다. 강 회장은 “이 제안은 ‘당시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였지만 이때 간절했던 마음과 사찰에서의 경험이 이후에도 불교와 관련 지어 일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그 길로 1981년 서울 (사)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로 달려가 역학강좌를 공부한 뒤 21살 때부터 역술인의 길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버지 유언대로 계속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나이 23살이었다. ‘살기 어려운데 한 길로 가야한다’는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하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연령 제한이 있는 서울의 두 곳 맹학교 대신 춘천 강원명진학교에 중등부 입학 원서를 냈다. 그의 50여 인생을 반추했을 때 가장 잘한 결정이란다. 그의 교육열은 서울 국립맹학교 고등부 입학으로 이어졌고 기어코 29세에 졸업장을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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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봉 회장은 성북점자도서관에서 사무장으로 근무해오고 있다.

“서울 국립맹학교 시절, 가톨릭과 기독교 학생회는 있는데 불교학생회는 없는 거예요.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함께 활동하면 학교 안에도 변화가 올 것이라 생각했어요. 28살 때 4명이 불교동우회를 만들었고 제가 총무를 맡았죠. 몇 분 더 들어왔고 해안 스님의 금강경을 점자로 만들어 보급했어요. 그런데 이듬해 비슷한 모임이 결성되고 있었어요. 이들이 함께 합치자는 제안을 해왔고, 그것이 바로 혜광맹인불자회가 된 거죠.”

그는 1990년 11월 국내 최초로 시각장애인에게 불음을 전할 ‘혜광시각장애인법당’을 개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거듭한 조계종 신행회 소속 혜광맹인불자회(회장 김부봉)의 총무를 맡으며 회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노력했다.

이후 강 씨는 아나율불자회를 거쳐 한국시각장애인불자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아직 불자회가 해결해나갈 과제가 많다.

“법당 섭외에 어려움이 가장 커요. 관공서나 새로 짓는 교회에는 시각장애인들이 편하게 갈 수 있도록 유도블록이 설치돼 있으나 사찰 대부분, 특히 오래된 사찰일수록 유도블록이 없어요. 교회는 시스템이 구축돼 혼자 가도 도우미가 안내하지만 큰 절은 누군가를 대동하지 않는 이상 혼자갈 수가 없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일반인들의 인식이에요. 사찰이 계단도 많고 위험하다며 저희가 법회 보기 힘들다고 많이 거절했어요. 어떤 곳은 가까스로 섭외해 정기법회에 참석했는데 저희를 법당이 아닌, 스피커가 나오는 조용한 방으로 데려가더니 법회를 들으라고 하더라고요. 사찰에서의 편견이 가장 어려운 장애인 거 같아요. 우리도 일반 신도와 같이 어울려 법회 볼 때 법회 보고, 절할 때 절하게 해 달라는 것뿐인데 그게 힘드네요.”

그는 법당 섭외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라면서 이들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거두는 사찰의 인식 개선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와 같은 시각장애인을 만날 때에 불자들이 지원할 사항을 꼼꼼하게 주문했다.

“제발 저희를 똑같이 봐 주세요. 시각장애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안내견을 대동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모두 불도를 이루려고 모인 똑같은 불자라고 생각하면 돼요. 시각장애인들이 지나가면 이상한 눈으로 보시지 말고 ‘혹시 도와드릴 게 있느냐’고 한 번이라도 물어봐 주세요. 그러다보면 반드시 비장애인과의 벽이 허물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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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금 불자회가 한 달에 한 번 법회를 볼 수 있는 것은 2011년 만난 서울 광림사 주지 해성 스님(사회복지법인 연화원 이사장)의 뒷바라지 덕택이었다. 스님께 그동안의 어려움을 털어놓자마자 첫 마디에 ‘여기로 오라’며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정기법회를 볼 수 있게 해줬단다. 해성 스님은 시각장애인의 불편한 점을 해소하고 필요로 하는 점을 알아서 ‘척척’ 지원해주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해성 스님은 불자회의 ‘큰 귀인’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해성 스님의 도움의 손길 외에 불교계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지원이 전무한 상태였다. 불자회는 인당 월 1만원의 회비로만 운영돼 12가지 사업 계획도 거의 멈춤 상태다.

“스님이 되고 싶은 시각장애인들이 더러 있어요. 이분들을 위한 점자 불경도 지원할 일이 우리가 할 일이에요. 선천적으로 시각장애가 오신 분은 색상이나 형태를 모르세요. 저만 해도 10살 때까지 본 건 기억이 나지만 이후는 기억이 안 나요.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사찰과 궁궐 같은 장소 등을 작은 미니어처로 만들어서 촉각으로 형태를 인지할 수 있게 하는 사업도 하고 싶어요. 이는 예산이 수반돼야 하죠. 또 맹학교 장학금 지원도 간절하죠.”

그는 무엇보다 법우들이 편안하게 신행활동을 할 수 있는 사무실을 마련해 불교 강좌도 듣고, 연등도 만들고 싶다면서 불교계의 지원을 적극 요청했다. 

강 회장은 교계에 반해 기숙생활을 주로 하는 맹학교 12곳이 거의 다 기독교재단에서 운영‧지원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나 가톨릭의 경우 시각장애인의 예배의 생활화를 유도하고, 장학금도 지원하니 졸업 때 즈음이면 많은 이들이 교회와 성당을 찾는다고 말했다.

“기독교에 관심 없는 분들도 각종 문화 프로그램이 다양한 교회에 다니면 기독교인이 돼요. 불자회에 공간과 예산이 주어져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들어올 거예요. 물론 기독교가 불교보다 좋다면 저도 교회에 가겠죠. 하지만 제가 50여 년 살아왔지만 불교만큼 좋은 게 없어요. 뜻을 같이 하는 많은 분들이 저희 불자회에 오셔서 정기법회도 보고, 점자‧소리 불경으로 함께 공부하며 불교적 삶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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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본에 앞서 교정 작업 중인 강태봉 씨.

 
강 회장은 불자회를 통해 불자가 아닌 분들이 불교에 더 가까워질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뭉쳐 사회에 적극 한 목소리를 냈을 때 그들의 요구가 반영돼 자신들을 위한 발전을 이끌 것이라고 내다봤다.

“얼마 전 박물관에 갔는데 우리가 만지며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앞으로 사회에서도 우리들이 형상을 상상할 수 있게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진행해줬으면 좋겠어요. 이 같은 프로그램도 우리가 나서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홍보할 때 변화 가능하겠죠?”

또 다른 장애를 가진 불자들에게도 “만족하면 변화가 안 온다”면서 “절에 가면 다른 사람이나 자신이 불편할 거란 생각을 하지 말고, 상황을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불교활동하면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대부분의 종단이 시각장애인들에게 비구계를 안 줘 성직자의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면서 “장애우들이 함께 목소리를 높일 때 관련 제도가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 회장은 ‘욕심 버리기’를 화두 삼으며 자신이 행한 대로 업을 받기에 좋은 인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석박사 통합 과정을 수료했지만 올해 업무에 지장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단다.

강 회장은 “현재 해성 스님이 점자도서와 소리도서로 불교 서적을 제공하고 있다”면서 “올해는 특히 교계 뉴스와 아함경을 소리도서로 제작해 회원들에게 배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시력은 사그라졌지만 그의 열정은 불교로 불태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