昨夜巖邊數朶花  어젯밤 바위 가에 핀 몇 송이 꽃
浮光似向幽人語  떠오른 빛이 사람을 향해 말하는 듯했네.
淸晨忽起卷簾看  맑은 새벽에 문득 주렴 걷고 바라보니
一夜盡隨風雨去  하루밤새 비바람 맞아 다 떨어졌구나.

可憐灼灼滿枝花  가지마다 활짝 핀 꽃 보기도 좋더니
落盡狂風空逐水  미친바람에 다 떨어져 하릴없이 냇물을 좇는구나.
世間萬事儘如斯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이와 같으니
何必人情能獨久  어찌 인정인들 오래 머물길 바라겠는가.

                                               -설암추붕의 <꽃을 탄식하며 2수(嘆花 二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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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암추붕(雪巖秋鵬, 1651∼1706) 스님은 조선조 선승 가운데 가장 방대한 시문집을 남긴 분이었다. 스님에게는 두 종 시문집에 전한다. 󰡔설암잡저(雪巖雜著)󰡕에는 806편의 시문이 실려 있고, 󰡔설암난고(雪巖亂藁)󰡕에는 시 132편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에 실린 작품 가운데 43편이 산문이니 763편이 시인 셈이고, 󰡔난고󰡕의 작품까지 포함하면 895편의 시를 남긴 셈이다.

이처럼 많은 시문을 남긴 만큼 스님의 시세계는 폭이 넓고 깊다. 시대적 분위기에 맞게 당시 사대부 지식인들이나 권력층들과 교유하면서 남긴 작품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그밖에 제자나 동료, 선배 등 당대의 스님들에게 쓴 시도 적지 않다. 한편 일상생활을 단아하게 노래한 작품도 많고, 세태를 풍자하거나 인정을 꼬집은 작품도 눈에 띈다. 또 산사와 암자를 묘사하고, 산천의 아름다움이나 절기 풍습 등을 담은 시들도 남아 있어, 다채로움이 여느 문인들의 문집을 능가할 정도다. 거기다 영사시(詠史詩)로 구분될 작품도 있고, 당시 민중들의 모습을 담은 시나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노래한 작품 등 이채로운 시들이 문집 속에 실려 있다.

스님의 시에서 선리시(禪理詩)는 찾아보기 어렵다. 깨달음의 세계는 어차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 굳이 시로 남길 필요를 못 느꼈으리라. 그래서 스님의 일상사를 노래한 작품들을 읽으면 참 평탄하고 쉽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물론 이것이 스님의 시가 격조가 떨어진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스님의 시를 읽으면 그 분이 얼마나 따스한 인간미가 넘쳤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선승이라 해서 어려운 난해한 구절을 남발한다거나 남다른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장 몸을 낮게 두었지만, 그 때문에 스님의 수행의 깊이가 얼마나 높은지 실감한다.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늘 소개하는 시를 보면 세태를 꼬집고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면 꼭 세상의 인심이 각박하고 변화무쌍한 것을 탄식하는 그런 시는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이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관조와 해탈의 자세가 엿보이는 시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나오는 명구 ‘도화유수요연거(桃花流水杳然居去)’의 의장이 은근히 더해져 있다. 꽃도 어있기를 바란피다면 이것은 탐욕이고 집착이다. 인정이 너무 메말라 버리는 것도 문제지만활짝 필 때가 있으면 바람에 날려 떨어질 때가 있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사계절 내내 꽃이, 모든 것을 너무 인정에 의지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때가 되면 바람에 쓸려 떨어지는 꽃잎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에 지나친 애착을 버리고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갖자는 것이 스님의 마음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 시를 읽으니 문득 시인 이형기 선생님의 <낙화(落花)>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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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참으로 아름다운 시이지 않는가? 낙화를 보며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열매 맺을 성숙한 그 날을 향해 청춘을 불태워버리는 용기와 신념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추붕 스님의 위 시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읽는다면 시의 맛이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