叨陪遊賞招提境  외람되이 모시고 산사의 경계를 두루 즐겼더니
滿眼秋光一樣奇  눈에 가득한 가을 풍광이 한결같이 기이하구려.
紅葉間岩開錦繡  붉은 단풍은 바위틈에 떨어져 비단 수를 놓았고
淸流迸石散瑤琪  맑은 시내는 돌 사이를 흘러 옥가루를 뿌리네요.
桃源洞裏貧僧獨  무릉도원 골짜기에서는 욕심 없는 스님만 외롭고
桂樹山中俗客稀  계수나무 울창한 산속에는 속세의 나그네가 드뭅니다.
人世閑忙何足道  인간 세상의 한가롭고 바쁜 일을 어찌 입에 올리십니까
揮鞭歸路莫遲遲  말채찍 휘두르며 돌아오는 길을 행여 늦추지 마십시오.

                                  -소요태능의 <최수찬의 시에 차운함(次崔修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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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최대의 전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민족의 위기를 구하고자 불교계가 떨쳐 일어나 의승병(義僧兵)을 조직해 국난을 극복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때 이 전란에 대처하는 방식을 두고 불교계에서는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불국토를 지키고자 하는 염원이야 다를 것이 없었지만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는 길만이 유일한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지켜야 할 수행자의 계율이 발단이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전장에 뛰어들어 더 큰 대의를  위해 전투에 임한 스님들이 있었던 반면 법당에 모여 국난극복을 위한 간절한 기도로써 수행자의 본분을 지켰던 스님들도 있었다.

후자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우리가 들 수 있는 분이 바로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선사다. 스님은 서산대사의 제자로 총애와 신뢰를 받았지만 사찰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조국을 지키는 정성을 올리는 일에 힘썼다. 스님은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때에도 국가의 명령에 따라 남한산성을 축조하는 일에 적극 참여했다. 또한 많은 제자를 배출해 이후 소요문파(逍遙門派)의 개조로 자리했었다.

소개한 시에 나오는 ‘최수찬’이 누군지는 분명하지 않다. 수찬이라면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의 정5품 관직인데, 주로 문한(文翰)을 편수(編修)하는 임무를 맡았다. 국왕에게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담당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니, 당대의 문장가가 아니면 맡기 어려운 자리다. 그 수찬 관직에 있는 사람이 스님을 찾아와 시를 한 수 지었던 모양이다. 그 시에 차운한 작품이 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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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찬은 풍류와 문예미를 아는 사람이었고, 스님과 시작(詩作)으로 교유할 만큼 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안빈낙도(安貧樂道)라든가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유가적 정신세계에 밝은 인물이었다. 때문에 스님도 평범한 훈계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것으로써 시는 시작된다. 산사를 둘러싼 자연의 가을 풍광을 섬세한 묘사와 비유로 알려주는 것이다. 붉은 단풍잎과 맑은(淸[맑음]에는 靑[푸름]의 이미지도 있다.) 시냇물의 대구도 산뜻하다. ‘비단 수’와 ‘옥가루’는 단순히 자연의 시각적인 화려함만을 가리킨 시어는 아니다. 그 속을 감도는 청정무구(淸靜無垢)한 도의 세계를 비유하는 말이다. 그러니 따로 무릉도원이니 이상향을 찾아 헤맨다면 그야말로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그런데도 안타깝게 이를 발견하고 즐길 줄 아는 이는 오직 욕심 없는 승려가 있을 뿐이고, 속세의 나그네는 드물다. 함께 거닐면서 산사의 절경을 감탄하는 최수찬 역시 아직 마음의 눈을 뜨지 못했는지, 속세의 번다한 일만 떠올리며 스님의 진심을 몰라줄 정도였으니까.

진정 자연을 사랑하고 육신을 떠난 참다운 진리의 세계에 노닐고 싶다면 훌쩍 세속의 명리(名利)를 떠나 이곳을 돌아오라고 스님은 진지하게 권한다. 그대처럼 정신적 수양을 갖춘 사람이 무용한 벼슬살이와 때 묻은 도시 생활에 찌들어서야 되겠느냐고 넌지시 꾸짖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을 향한 스님의 애정은 차원과 깊이가 달랐다. 넉넉한 자연만큼이나 스님의 도량 역시 서두르지는 않아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스님은 자신의 시를 통해 자연을 벗 삼아 마음을 기르고 살찌우면서 이른 구경(究竟)의 경지를 구현했다. 아울러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 감내해야 할 고통과 노력을 외면하지 말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진정한 깨달음은 그냥 오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