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jprj44@hanmail.net 2015-01-05 (월) 14:38“상봉당 정원 스님 이은 환성당 지안 스님으로 이어져”
부석사에서 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한 지 어느덧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부석사에 대해 모르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 알게 되면서 느끼는 기분은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한 그런 기분이랄까.
그러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제대로 된 부석사의 역사를 고증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특히 부석사에 주석하여 평생을 지내셨거나 혹은 불사(佛事)등으로 잠시 이곳에 머문 스님들의 행적을 찾는다는 게 무척이나 고된 작업이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실시된 불교문화재 일제조사사업의 성과물들이 있어 단편적이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부석사를 지켜온 스님들을 이번에는 살펴보고자 한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임진왜란 전까지 부석사에 주석했던 스님들 중 그 행적이 잘 알려진 스님은 사명당 유정 스님이 유일하다. 이외에 1490년과 1573년 조사당 중수시 주지였던 대선사 운수(云修)스님, 선덕(禪德) 성관(性寬) 스님 등이 묵서(墨書)를 통해 겨우 확인된다.
최근 확인된 ‘안양루 중수기’ 현판 뒷면의 묵서에서 1578년(萬曆六年戊寅十一月日) 안양루 중수 때 참여했던 시주자 명단과 스님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중 1573년 조사당 중수 때 부목(副木) 인경(印冏), 전유나(前維那) 원오(圓悟), 희상(熙尙) 스님 등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부석사는 화엄종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조선시대에도 화엄경에 통달한 스님들이 주석하였다. 조선시대 부석사의 법맥은 청허 휴정 스님으로부터 이어져왔다. 사진은 부석사에 있던 휴정 스님<왼쪽>과 사명 대사<오른쪽>의 진영으로 1956년도에 촬영되었지만 지금은 그 행방이 묘연하다.(사진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현재 부석사에 남아 있는 ‘안양루중수기’는 사명대사가 1580년 7월에 지은 것을 1644년 2월에 판각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봉황산은 줄기가 아득히 백두산과 접했으며 계곡물은 멀리 동해에 잇닿았고 남쪽 지방에 웅거해서 동쪽 바다를 웅크려 보고 있는데 울창하고 영묘한 서기가 모이고 쌓여 남녘의 정기를 생성하고 있다. 부석사는 바로 그 사이에 위치한다.(중략)
안개가 끼고 서리가 내린 가을,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으면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듯 하며, 길은 천리나 되고 몸은 푸른 하늘 위에 있어 하늘에 올라 구름을 타는 듯하다.(중략)
도사(道士)가 이에 오르면 환골(換骨)하지 않아도 곧바로 바람을 타게 될 것이요, 승려가 이곳에 오르면 공력을 들이지 않아도 선정(禪定)에 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누각이 이루어짐으로 인해 갖가지 즐거움이 구비되거니와 하필이면 어진 이름을 얻은 이후에야 이를 즐길 것인가.
아! 크고 장한 공적이 산하와 더불어 하리니 그 덕을 새겨서 먼 후세에 보여 뒤에 오는 자로 하여금 또한 지금처럼 옛날을 생각하게 할 일이다.”
(등왕각은 중국 강남 3대 명루(名樓) 중 하나로 당나라 현경 4년(659)에 건립)
이후 부석사에서 주석하셨거나 불사를 주도하신 스님들을 살펴보면, 현재 문경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보물 제575호) 조성 시 증명(證明)으로 참여한 종현(宗現) 스님이 있다. 이 스님은 이후 1684년 예천 용문사 대장전 목각탱 조성 때도 증명 스님으로 등장한다.
또한 17세기 후반 경북 북부지역에서 새로운 불교미술의 장을 열었던 스님으로 종현 스님과 함께 활동했던 소영당 신경(昭影堂 神鏡) 스님이 있다. 신경 스님은 1684년 부석사 괘불조성 시 ‘명현대덕종사(名現大德宗師)’로 등장하는데 이 스님의 출신지와 관련하여 1692년 제작된 안동 봉황사 석가모니불좌상 대좌 묵서에 ‘전라도 전주(지금의 완주) 위봉사 화원이었다(湖南全羅道 全州 威鳳寺 畵圓 證明 昭影堂鏡...)’고 전한다.
신경 스님은 조선시대 목각탱 조성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1675년 대승사 목각탱의 조성에도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신경 스님은 1684년 예천 용문사 대장전 목각탱, 상주 용흥사 삼불회 괘불탱 조성 시 증명으로 참여한다. 신경 스님의 부도는 현재 상주 남장사에 있으며 의성 고운사에도 비석이 있는데 이 비를 통해 스님이 1706(5)년 경에 입적했음을 알 수 있다.
1723년 무량수전 아미타여래상 개금불사 때 산중질(山中秩)에서 산인(山人)으로 등장한 서열(瑞悅) 스님은 1719년 강원도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중수 시 통정겸전유나(通政兼前維那)였음을 정암사 ‘수마노탑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45년 제작된 부석사 괘불 화기(畵記)에 증명명현대선(證明名現大禪)으로 등장하는 월암당(月巖堂) 진기(震基) 스님은 1731년 구미 수다사 대웅전 후불도와 지장보살도, 1743년 의성 대곡사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 1744년 김천 직지사 삼세불도 조성 시 증명으로 등장한다.
특히 진기 스님의 진영(眞影)이 구미 대둔사에 전하고 있는데 이 진영에는 조선후기 고승이었던 상봉당(霜峯堂) 정원(淨源: 1627~1709) 스님의 제자임을 알 수 있는 영제(影題)가 남아 있다.(상봉하제이세월암당대선사진영(霜峯下第二世月巖堂大禪師眞影)
진기 스님과 함께 무량수전 아미타불 개금불사 기록을 남긴 벽허당(碧虛堂) 명찬(明贊) 스님은 1735년 양산 통도사 영산전 석가불탱 조성 시 주지(住持)로 있었으며 1753년 양산 내원사 노전(爐殿)의 아미타불 개금불사를 발원했는데 이때 승통(僧統)의 지위에 있었다. 또한1769년 안동 봉정사에서 간행한 『청문(請文)』과 『보살계의소(菩薩戒義疎)』판각 시 증사(證師)로 이 불사를 관장하였다. 1770년에는 ‘봉정사 고법당 대장판전 등촉 헌답기’를 짓기도 하였다.
무량수전 아미타불 개금불사의 증명을 맡은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와운당(臥雲堂) 신혜(信慧) 스님은 1741년 상주 남장사 삼장탱화 조성 시 대화주 겸 지향(持香)을 담당했는데, 1769년 안동 봉정사 『사분계본여석(四分戒本如釋)』판각 때 이 경전의 서문을 작성하였다. 이 서문을 통해 신혜 스님은 환성 지안(喚醒 志安 1664~1729) 스님의 문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770년에는 예천 서악사 석가모니후불탱 조성 시 증명을 맡기도 했다.
1806년 무량수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을 중수할 때 증사였던 일암당(一庵堂) 경의(警誼) 스님은 1792년 양산 통도사 삼장탱, 통도사 금봉암 신중탱, 1802년 경산 선본사 신중탱, 1816년 대구 동화사 지장삼존도, 1825년 군위 지보사 석가불탱, 산신탱, 영천 은해사 지장탱 조성 시 증명을 담당했다.
부석사 동부도전의 부도들. 부석사의 중수와 발전을 위해 헌신한 조선시대 스님들의 체취가 남아 있다.
부석사 서부도전.
이외에도 부석사 동쪽과 서쪽 부도밭에는 조선시대를 살다간 스님들의 부도가 남아 있는데 백봉당(白峯堂) 천순(天順) 대사, 광헌 대사(廣軒大師), 연화당(蓮華堂) 근선 대사(謹禪大師), 명암당(明巖堂) 승익 대사(勝益大師), 환운당(幻雲堂) 처습 대사(處習大師) 등의 부도다.
이 중 처습 대사는 1723년 무량수전 불상 개금기에 화원(畵員)으로, 승익 대사는 1745년 부석사 괘불 조성 시 대선사로 등장한다.
조선시대 부석사는 『화엄경』에 능통했던 상봉당 정원 스님을 이은 환성당 지안 스님으로 이어지는 청허 휴정(淸虛 休靜) 스님의 법맥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