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艱苦狀  영남 지방의 고통스런 모습이여
欲說涕將先  말로 하려니 눈물부터 앞서네.
兩道供軍料  두 도에서는 군수 물자를 공급했고
三山造戰船  세 산에서는 나무를 베 전선을 만들었네.
征徭增百倍  세금이며 징발은 백 배나 더했고,
力役亘三年  부역은 삼 년 동안 계속되었네.
星火徵求急  물자 징수는 성화처럼 급하고
雷霆號令傳  호령은 우레처럼 전해지네.
使臣恒絡繹  사신은 언제나 끊이지 않고
京將又聯翩  서울의 장수들도 잇달아 오는구나.
有臂皆遭縛  팔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묶여 있고
無胰不受鞭  등짝으론 채찍이 떨어지지 않는 곳 없네.
尋常迎送慣  맞이하고 보내는 일은 심상한 일이 되었고
日夜轉輸連  낮이나 밤이나 물건 나르는 일은 계속되네.
牛馬無完脊  소나 말조차 몸 온전한 놈 없으니
人民鮮息肩  백성들 어깨인들 쉴 틈이 있겠는가.
凌晨採葛去  새벽이 되자마자 칡 캐러 나갔다가
踏月刈茅還  달빛을 밟으며 띠풀 베어 돌아오네.
水手驅農畝  뱃사공도 농사짓는 밭으로 달려가고
梢工卷海堧  목수들은 바닷가를 휘젓고 다녔지.
抽丁擐甲冑  남정네 뽑아서는 갑옷을 입혔고
選壯荷戈鋋  장정을 골라서는 창대를 지라 하네.
但促尋時去  그저 빨리 나가라 재촉하니
寧容寸刻延  촌각인들 어찌 지체할 수 있겠는가.
妻孥啼躄地  아내와 자식은 땅을 치며 울부짖고
父母哭號天  아버님 어머님은 하늘 보며 통곡하네.
自分幽明隔  이승과 저승이 이리하여 갈려졌으니
那期性命全  어찌 생명 온전하기를 기약할 수 있으리오.
孑遺唯老幼  늙은이며 어린 것들만 외롭게 남았으니
强活尙焦煎  억지로 살자 하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邑邑半逃戶  고을마다 거의 반이 달아나 버렸고
村村皆廢田  마을마다 버려진 밭은 황폐해 가네.
誰家非索爾  어느 집인들 쓸쓸하지 않겠으며
何處不騷然  어느 곳인들 술렁거리지 않겠는가.
官稅竟難免  관청 세금도 끝내 면하기 어려운데
軍租安可蠲  군대의 부역을 어찌 피할 수 있으리오.
瘡痍唯日深  찢어진 상처는 점점 더 심해져 가니
疲瘵曷由痊  지친 몸이야 무슨 재주로 편안하겠는가.
觸事悉堪痛  겪는 일마다 모두 고통이거니
爲生誠可憐  산다는 게 참으로 가련한 일이로구나.
雖知勢難保  형세가 보전키 어려운 줄 비록 알지만
爭奈訴無緣  호소할 곳조차 없으니 더욱 기가 막힌다네.
帝德靑天覆  하느님의 덕은 푸른 하늘을 덮고 있고
皇命白日懸  황제의 명령도 햇볕 아래 빛나거니.
愚民姑且待  답답한 백성들이여 잠시 기다려보세
聖德必當宣  성스러운 임금님 은혜가 당연히 펼쳐지리니.
行見三韓內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더라도
家家奠枕眠  집집마다 모두 두 다리 뻗고 잠들 것일세.

                 - 영남간고상(嶺南艱苦狀), 원감충지(圓鑑冲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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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지(1226-1292)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여느 스님과는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님은 젊어서는 유가(儒家)의 선비로 생을 살았다. 그래서 과거에도 급제했고, 벼슬아치로서 관직 생활도 한동안 꾸려나갔다. 그러다가 뒤늦게 불문(佛門)에 귀의했다. 이러다 보니, 스님의 수행 자세나 구법 양상은 여느 스님과는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즉 속인(俗人)으로서 선비의 자세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탈속한 선승의 모습이 겹쳐 드러나고 있다. 그만큼 다채롭고 다방면에서 진지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스님은 수행에 힘쓰는 선승의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도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행(利他行)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스님에 살았던 시대는 나라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때였다. 오랜 항몽기(抗蒙期)가 끝나고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원나라는 이렇게 저렇게 고려의 정치에 끊임없이 간섭했고, 온갖 이유를 붙여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그런 가운데 고려 민중들이 겪었던 고통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뭄과 홍수로 수확도 시원치 않은데, 원나라는 일본 정벌이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군수 물자를 징발하도록 고려에 강요했다. 그 요구에 응하느라 전국토가 신음과 고통으로 얼룩진 시기를 스님은 살았다. 이미 젊은 시절 관료로 지내면서 누구보다 그런 부당한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분이 스님이었다. 그래서 스님의 시에 보면 각박한 현실을 묘사하고, 민초들의 힘이 되려는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영남간고상>으로 불리는 장편의 5언고시다. 몽고가 일본 정벌에 나서면서 군량이며 함선의 건조를 고려에 강요하는 바람에 이 모든 부담이 영남의 백성들에게 지워졌다. 그 때 스님은 김해군에 있던 감로사(甘露寺) 주지로 있었는데,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 참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개인의 난관이고 고통이라면 어떻게 수습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라 전체에 강요된 요구니 감당할 길이 없었다.

스님은 이 작품에서 그 때 겪었던 민초들의 혹독한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비록 긴 작품이긴 하지만, 스님의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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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을 꾀했다. 그 때 우리나라를 전진기지로 삼아 온갖 물자를 징발했는데, 그 참상이란 이루 말할 길 없을 정도였다. 당시 징발이 얼마나 혹독했는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도 손에 잡힐 듯 드러난다. 영남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자는 모두 정벌에 충당되었고, 산은 함선을 만드느라 벌거숭이가 되었다. 세금이며 노역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농사를 지을 때를 놓친 농민들의 참상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야말로 허울 좋은 정벌 때문에 악순환만 거듭되는 비참한 지경이었다. 더구나 정벌이 원나라의 강압이긴 했지만 국가적 정책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비난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님의 상심은 더욱 컸을 것이다. 이어지는 시구들은 그런 농민과 민중들의 참상을 더욱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민초들의 쌓여만 가는 고통과 어디에도 하소연할 길 없는 기막힌 현실을 스님이 대신해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채찍과 욕설을 받아가면서도 그 치욕과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야 했던 당시 고려인들의 원성이 스님의 시속에서 그대로 울려나오고 있다. 국가와 민족의 아픔을 시화하여 경종을 울린 스님의 이런 일련의 시들은 자연에만 묻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스님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