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홍승균의 성보읽기
부도에서 얼굴 내민 스님의 표정<br>이따금씩 투정도 부리고픈 친구 얼굴
홍승균기자 hsk2618@naver.com 2013-04-03 (수) 17:18
향천사 부도
충청남도 지정문화제 179호
소재지 : 충남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57
연 대 : 조선 숙종 34 년 (1708년)
감추고 나만 알고지낼 것 같은 내 친구를 소개한다.
인생 중반쯤의 나이 먹은 남자들에게 고비 고비 맞닥뜨리는 생활사를 마음 놓고 토로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꽤 중요하다.
아내에게 얘기하기에 창피스런 일도 있고, 사람들과 속이 상하는 다툼가운데 스스로 밴댕이 같은 속 좁음에 계면쩍기도 하고, 나의 기쁨이 남의 불운을 딛고 일어났을 땐 드러내놓고 웃지도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진중한 젊잖음을 요구받을 나이지만 가끔 투정도 부리고, 가벼운 촐싹임도 보일 수 있는 내 친구. 그는 예산 금오산 향천사에 있다.
수덕사의 말사로 그다지 유명세를 치르는 사찰은 아니지만 금까마귀가 안내한 절터에 창건하였다는 향 내음 그윽한 절! 천불선원이라는 선방이 개설되어 있고, 먼 나라에서 온 몇몇 벽안의 수행자들이 어울리지 않는 폼으로 도끼질을 하는 모습도 볼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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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천사에는 총 4기의 부도가 모셔있는데, 둘은 근년에 조성된 부도이고 하나는 백제시대 향천사를 창건한 의각대사의 부도이며,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부도는 조선시대 멸운당 혜희스님의 부도이다.
부도는 불가에서 전래되는 석조 건축물가운데 비교적 정교하고도 화려한 장엄미를 갖추었고, 스님의 사리를 모신만큼 숫자도 많으며 오늘날에도 꾸준히 조성되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각 문중이나 제자들이 경쟁적으로 크고 요란하게 모시는 바람에 오히려 열반하신 스님의 고명(高名)에 누가 되는 지경도 있는 형편이다.
9세기 이후 고승의 유골을 모신 부도에 대해, 다시 말하면 아라한 내지는 앞서간 선지식에 대해 여래로 인식하는 풍토가 생겨남에 따라, 부도를 탑과 마찬가지로 예경의 대상으로 존숭했으니, 부도란 스님네의 무덤이기 보다는 거룩한 성보의 개념이 된 것이다.
물론 열반한 스님이라도 무조건 부도가 조성되지는 않지만, 해당스님의 도력이나 수행의 깊이만치 가장 경건하고 또 숭앙하는 마음으로 모셔지는 만큼 때로는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기도 하고 소박하면서도 고아한 부도가 나타나기도 하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보인다.
경망스레 말하자면 스님의 당대에 끼친 영향력이 그대로 표현되었다고도 하겠는데 시대마다의 유행과 사세(寺勢)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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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닌 향천사임에도 전해 내려오는 부도가 불과 두기 밖에 되지 않지만 이곳엔 전국의 수많은 부도에서 아직 찾지 못한 뭉클한 감동이 있다.
예술적 측면으로는 나라 곳곳에 산재한 아름다운 부도들과 비교할 때 결코 수작이라고 평할 수는 없겠으나, 이 부도에 주목하는 것은 옥개석에 새겨진 수백 년 전 이곳 향천사에서 법을 설하시던 멸운당 혜희스님의 얼굴조각상이다.
아무리 덕 높은 스님의 부도를 정성껏 조성한다 한들 이보다 더 극적일 수 있을까?
스님을 추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으면 아예 부도에 얼굴을 새겨 넣을 생각을 했을까를 상상하면서, 조각된 혜희스님의 엄숙한 표정을 뵙고 나면 극히 일부가 전해지는 스님의 행장은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스님의 얼굴에 이미 모든 것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멸운당 혜희스님은 임진왜란 때 향천사스님 50명을 이끌고 금산전투에 참여한 승군이었으며, 그로인한 분풀이로 왜군들이 향천사를 전소시켰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 부도의 조성시기가 숙종 때이고 보면 시대적 오차가 크다. 금산전투에서 활약했을 장군의 기개 높은 얼굴로 여겼다가는 곧 덕 높고 인자한 노스님의 기품으로 보여서 혼돈을 줄 뿐이다.
7년 전쟁 중 금산전투는 가장 비극적인 싸움의 하나로, 조헌이 이끄는 의병 200과 영규대사가 이끈 승병 500명이 참여했는데 이는 패배한 전투가 아니라 애초부터 죽음을 예견하고 왜군에 달려든 처참하고 개탄할 전쟁사의 먹먹한 한 페이지였다. 나라의 존망보다도 개인의 공적을 논하고, 반상의 법도를 따지는 위정자들이 철저히 외면하는 가운데 청주성 전투의 복수를 하고자 집결한 2만여 왜군과 대적하였으니, 피로써 구하고자 했던 조선시기 불교는 도리어 핍박의 500년을 견뎌야 했으며, 승군의 활약으로 결국 전래되어온 강토의 사찰은 철저한 보복방화를 당해 상당수 멸실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혜희스님에 대한 기록이 어긋남에 따라 스님의 얼굴과 행적에 대해 섣부른 상상은 불필요하다. 얼굴상이 크지는 않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마치 처음부터 새겨 넣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돌밖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볼만큼, 단순 간략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스님의 표정과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부도는 이중의 기단을 받쳤는데 8각 기단 위의 아무런 문양도 없는 중대석에 옥개석을 올렸고 그 전면에 혜희스님이 계신다.
혜희스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찾아뵙는 내게 같은 표정을 짓고 말상대가 되어주신다.
속상하고 화난 얘기를 하노라면 큰 눈자위는 어느새 부릅뜬 매서움이 보이다가도 무겁고 잔잔한 사연에는 아래로 눈을 지그시 감으셨다가, 기쁘고 재미있는 경우엔 미소로 화답하신다.
사십 줄을 훌쩍 넘어서 만난 친구사이다보니 부도의 몸돌과 나의 불룩해진 배를 재보면서 누구 배가 더 나왔는지 따져도 보고, 눈이 많이 온 날은 민머리대신 흰 모자 쓰고 자랑을 하지만, 가을 낙엽엔 코간지럽다는 하소연도 하신다.
내게는 임진왜란에 칼 들고 싸운 스님이 아니라 늘 같은 장소에서 변치 않고 나를 이해해주며 받아주시고 얼러주시는 참 친구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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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천사는 이름만치나 아담하고 정갈한 절이다.
특히 가을이 깊어 가면 절은 ‘야하디 야하게’ 붉은 단풍으로 치장을 하고 스님의 얼굴까지 홍조를 띤다.
사찰에 가서 만나는 부도전은 다소 음습한 분위기도 있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무거운 침묵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스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내려서는 발걸음은 대중탕에서 몸을 잔뜩 불려서 말끔히 목욕한 듯 개운한 풍요로움을 얻게 된다.
충청도에 계셨던 스님이기에 얘기 나눌 땐 촌스럽고 질박한 충청도 예산의 언어로 말해야 제격이다.
“시님~, 지왔슈. 한참만이쥬?”
“이름은 깜찍한 양반이 호는 그게 뭐유~. 멸운당인지 며룬당인지…. 바꿀 생각은 없슈?”
최근에 마지막 헤어질 때는 이렇게 말하고 왔다.
“근디 시님얼굴말유~. 조만간 인터넷에 떠유!”
*부도 인근에서 만난 또다른 친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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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갑사 부도에서 앙다문 표정으로 개와 함께 있는 당당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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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반야사 부도에서 찾았는데 문양을 새긴 것인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익살스럽고 사랑스러워서 한참동안 눈을 붙잡았다.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