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글창제의 정설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세종왕조실록 어디에도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창제하는데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훈민정음 해례를 쓴 정인지는 집현전 학사들 중에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의 글자원리는 범자(산스크리티어)의 원리와 흡사하다. 당시 범어로 된 대장경이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었고, 범어 대장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미대사다. 신미대사는 세종의 왕사에 준하는 예우를 받은 스님이다. 세종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궁궐에 역마를 타고 드나들었으며 세종의 침실로 들어가 법문을 할 정도였다. 더구나 동궁(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의 귀의를 받은 분이었다.
최근에는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결정적인 단서가 나왔다. 신미대사가 만든 훈민정음 언해본 원각선종석보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세종의 한글창제 반포 8년 전의 일이었다. 이는 훈민정음이 이미 8년 전에 비밀리에 만들어져 신미대사와 수양, 안평 등에 의해서 실험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붓다는 절찬 속에 연재되었던 <금강산 붉은 승려>에 이어 한글창제를 둘러싼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찬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을 이달(11월)부터 연재한다. 정찬주 작가가 한글창제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비밀을 소설화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창제의 실제 주역이 신미대사였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불교가 한글창제에 기여한 점을 크게 부각시키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에는 세종의 애민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며, 우리 1천만 불자의 자긍심을 선양하고자 하는 지극한 단심(丹心)이 깃들어 있음이다. 특히 이 소설 연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흔쾌히 마음을 내어주신 흥천사 정념스님께 합장을 올린다. 편집자

천강에 비친 달 <1회>

만남

1420년 8월 6일.

흥천사 경내는 이른 새벽부터 1백여 명의 스님들로 붐볐다. 사미승은 물론 동자승들까지 경내를 바삐 오갔다. 법당에 올릴 재물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공양간을 들락거렸다. 노비들은 빗자루를 들고 산문 앞 사하촌의 고샅길부터 쓸었고, 여종들은 법당 마룻바닥은 물론 기둥까지 마른 천으로 닦았다.

처마 그늘에 선 벼슬아치들도 땀을 바질바질 흘렸다. 원경왕후의 4재를 감독하기 위해 의정부에서 나온 벼슬아치들이었다. 태종의 비(妃)인 원경왕후 여흥 민씨는 양녕, 효령, 충녕(세종), 성녕 등 4대군과 정순 등 4공주의 어머니였다. 늙은 당상관까지 나와 재준비를 감독하고 있는 것은 세종이 특별히 흥천사로 거동한다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삼각산 숲 그늘에서 다람쥐처럼 내려오는 바람도 법당 기왓장에 난반사하는 햇살의 위세에 자취를 감추었다. 흥천사 전각들은 삼각산 끝자락 구릉에 가부좌를 튼 듯 꿈쩍 않고 있었지만 절 대중들은 잠시도 서 있지 못했다. 임금이 직접 재에 참석한다고 하니 놀라기도 했거니와 크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철을 만난 매미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귀가 따가울 만큼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걸에 붙어 날갯짓하는 매미들이었다. 그러나 그루터기 그늘의 반석에 앉아 <아미타경>을 중얼거리고 있는 어린 중은 매미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한 순간이나마 독경삼매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키는 다 자란 성인처럼 컸지만 앳된 얼굴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풀 먹인 장삼을 입은 모습으로 보아 사미승을 막 벗어난 듯했고 사뭇 위의를 풍겼다. 이따금 서너 마디씩 소리 낼 때의 목소리는 동굴에서 공명하는 울림처럼 우렁우렁했다.

청년티를 내기 시작한 어린 중은 40대 중반의 스님이 옆에 와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아미타경>을 덮으며 얼어나 합장했다.

“신미야, 아직도 경을 외우지 못했느냐?”

“스님, 어젯밤에 다 외우긴 했지만 그래도 실수할까봐 속독을 하고 있습니다.”

“<아미타경>을 며칠 만에 다 외워버린 중은 네가 처음이다.”

“스님, 저에게 왜 <아미타경>만 외우라고 분부하셨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나는 오늘을 기다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너는 오늘 임금님 앞에서 <아미타경>을 독경하기로 뽑혔다. 젊은 네 목소리가 우렁차고 기운이 좋아서다. 경을 보지 않고 외운다면 너는 반드시 임금님의 눈에 들 것이다.”

“중이 임금님 눈에 들어서 무엇을 합니까? 저는 벼슬을 얻어 출세할 마음도 없고 상을 받아 부를 쌓을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은사님 문하에서 불도를 닦아 성불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좁은 소견을 버려야 한다. 인연을 따르는 수연행(隨緣行)을 닦는 것이 도(道)에 가장 빨리 드는 길이다. 성불하겠다는 집착마저 내려놓아야 마침내 진승(眞僧)이 될 수 있느니라. 알겠느냐?”

앳된 중을 이리저리 다독거리고 있는 스님의 당호는 함허당(涵虛堂), 법호는 득통(得通), 법명은 기화(己和)였다. 3년 전 한 겨울이었다. 속리산에 며칠째 폭설이 내린 뒤 눈보라가 산허리의 소나무, 잣나무 가지들을 뒤흔들어대는 날이었다. 회암사에서 복천암으로 내려와 잠시 머물던 스님은 거지행색의 소년에게 아랫목이 설설 끓는 죽석이 깔린 방을 내준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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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가 오랫동안 주석했던 속리산 복천암(옛 복천사) 전경.

함허는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의 몰골을 잊지 못했다. 몸집이 큰 소년은 곧 동사할 것 같았다. 꼬질꼬질한 무명 저고리와 찢어진 홑바지를 입고 있었고, 짚신은 다 닳아 이미 멍든 것처럼 얼기 시작한 맨발이 드러나 있었다. 눈 쌓인 산자락 길을 쫓기는 짐승처럼 달려왔음이 분명했다. 해질 무렵이었다. 공양주보살은 주지승이 출타하고 없자 함허를 다급하게 불렀다.

“스님,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중인가?”

폭설이 내리면 복천암은 인적이 끊어지기 때문에 공양주보살의 말은 뜬금없었다.

“죽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몰골이 거지와 같습니다.”

함허는 공양주보살을 따라 소년이 쓰러져 있는 수각으로 갔다. 배가 고프니까 찬물이라도 한 그릇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큰절에서 받아주지 않으니까 예까지 올라온 것 같습니다.”

“절을 찾아왔으니 받아줘야지.”

공양주보살의 짐작은 정확했다. 소년은 법주사를 찾아가 밥을 달라고 빌었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채 오솔길을 따라 복천암까지 올라왔던 것이다. 한겨울이 되면 오갈 데 없는 거지들이 큰절인 법주사를 찾아와 다짜고짜 드러누워 버틸 때가 더러 있었다. 굶다가 동사하느니 따뜻한 절밥 한 그릇 먹어보고 죽는 것이 거지들의 소원이었던 것이다.

“처사를 불러 따뜻한 방으로 저 사람을 옮기게. 국물을 데워서 식은 밥이라도 먹이면 곧 일어날 것이니 너무 걱정 말게. 저 사람이 정신을 차리면 내 방으로 데리고 오게.”

함허는 어느 절에서건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주었다. 산문 밖으로 내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폭설이 내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산짐승들이 절로 내려오는 것처럼 저잣거리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산적이든 도둑이든 거지이든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데가 절인 까닭이었다.

함허가 묵고 있는 거처는 나한전 앞에 있었다. 금세 무너질 것 같은 방 한 칸의 작은 토담집이었다. 거처는 눈보라가 방문을 열어젖힐 만큼 부실했다. 그러나 함허는 누추한 토담집을 탓하지 않았다. 선정에 들면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바뀌었고, 꼿꼿이 앉아 있는 그 자리가 광대무변한 우주의 한 자락이 되었다. 결코 토담집의 남루한 공간이 아니었다.

“스님, 젊은 처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큰스님, 죄송합니다.”

정신을 차린 소년이 합장하며 공양주보살을 뒤따라 들어왔다. 기운을 낸 때문인지 행색이 비루한 거지같지는 않았다. 조신한 걸음걸이나 말투가 양반집 자식 같았다. 함허가 눈짓을 한 번 하자 공양주보살이 나갔다.

“이 자리에는 너와 나 둘뿐이다. 무슨 얘기를 해도 허물을 묻지 않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거라.”

“큰스님, 고맙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 복천암으로 올라왔느냐?”

“보다시피 전 가족이 없는 천애고아입니다. 배고픈 것 말고는 알거지에게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복천암을 떠나거라.”

“큰스님, 저를 쫓아내지 마십시오.”

“배고픈 것이 해결됐으니 하는 말이다.”

“아닙니다. 저는 복천암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왜 복천암에 남겠다는 것이냐?”

“따뜻한 밥이 있는 이곳이 저에게는 극락입니다. 그러니 저는 떠나지 않고 중이 되고 싶습니다.”

“허허허.”

함허는 크게 만족했다. 소년에 대한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참선하러 잠시 복천암에 들른 객승일 뿐이니 주지스님이 오거든 그때 허락을 받아라.”

“전 반드시 큰스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해가 졌다. 나는 네게 이제 볼 일이 없으니 어서 나가거라.”

소년은 함허에게 큰절을 한 번 하고 일어났다. 눈보라가 또 다시 방문을 잡아당기는 듯 덩컹 하고 소리를 냈다. 그제야 함허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넌 가족이 있다. 그것도 지체가 높은 집안이다.”

“......”

“네 말이 틀렸느냐? 중이 되려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불망언(不妄言)의 계율을 지켜야 한다.”

함허의 날카로운 한 마디에 소년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저는 김수성(金守省)이라 합니다. 부친께서 죄를 지어 폐고(廢錮)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몰래 도망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폐고란 가족 간에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일종의 연좌제 형벌로서 나라에서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는 조치를 뜻했다.

“부친의 존함을 알려줄 수 있느냐?”

“훈(訓)자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냐?”

“벼슬아치로서 불효, 불충의 죄를 입었습니다.”

“알았다. 주지스님이 올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며 언행을 바르게 하고 있거라.”

소년이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눈보라가 기어코 방문을 열어젖혔다. 달려드는 눈보라가 함허의 얼굴을 때렸다. 어두워진 속리산 계곡으로부터 히잉히잉 하고 말달리는 소리가 났다. 눈보라가 이 산자락 저 산자락을 헤매는 소리였다. 눈보라에 시달리고 있던 소나무, 잣나무 가지들이 우우우 하고 울었다.

함허는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너는 저 눈보라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소나무가 되어야 한다.’

며칠 후.

함허는 복천암 주지스님으로부터 소년의 아버지 김훈에 대한 얘기를 자세히 들었다. 무예가 뛰어났던 김훈은 정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아치가 되었는데, 불효를 저지른 죄도 분명 컸지만 정종과 태종 간에 벌어졌던 미묘한 세력다툼으로 희생된 사람이었다. 정종을 따르는 김훈에게 태종은 지체하지 않고 처벌했다.

김훈이 할머니 상을 당해서 빈소를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상경하여 여러 달 머무는 동안 몰래 정종의 거처인 인덕궁(仁德宮)에 기생첩 벽단단(碧團團)을 데리고 들어가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이는 불효, 불충에 해당됐다.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의 자리로 밀려난 정종은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위로해주는 김훈의 처사가 고마워 귀한 의복을 하사하였으므로 태종에게 아부하는 신하들이 김훈의 죄를 모른 체 할 리가 없었다. “김훈의 직첩(職牒)을 거두고 국문하여 율문에 의거하여 죄를 논하소서” 하고 사헌부에서 먼저 탄핵했다. 태종은 바로 김훈을 처벌했다. 옥구진 병마사(沃溝鎭兵馬使)로 내려가 있던 김훈에게 곤장 1백대를 치고 전라도 내상(內廂 현 광주광역시 송정동)으로 귀양 보냈던 것이다.

물론 태종의 환심을 사려고 사헌부에 이어 사간원에서도 김훈을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지만 태종은 형인 정종의 마음을 상하지 않기 위해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 사헌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던 것이다.

“상왕(정종)이 나의 궁으로 오면 나도 또한 상왕전(上王殿)으로 나아가 서로 기뻐하고 화합하였다. 김훈은 사리를 아는 자인데도 기생을 데리고 몰래 출입하였으니 그의 불초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국문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전내별감과 소친시(小親侍)의 말이 미치게 하여 상왕의 마음을 동요하게 하지 말라.”

함허는 정월 보름날 소년을 따로 만나지 않고 복천암을 떠났다. 결국 소년도 주지스님에게 더부룩한 머리를 밀었다. 그날 주지스님에게 받은 소년의 법명은 신미(信眉)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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