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현기자
momojh89@gmail.com 2013-11-15 (금) 18:32대학을 졸업할 즈음엔 막연하게 글을 쓰고 싶고, 불교를 알고 싶고, 차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불교계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지금은 매일 글을 쓰고, ‘안다’할 것은 없지만 불교의 주위에서 이것저것을 보고 듣는다. 다만 차를 공부하고 싶었던 마음은 바쁜 일상에 쫓겨 어느새 슬그머니 모습을 감춰, 이따금 있는 사무실에서의 티타임을 제외하곤 공부라던가 음미라던가 할 것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차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차의 종류라던가 효능, 성분을 공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차와 관련된 모든 것들. 예를 들어 차를 만들고, 우려내는 사람, 차를 마시는 사람, 차 도구를 만드는 사람, 차로 포교를 하는 사람 등 차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미디어붓다> 지면에 소개하기로 한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 차와 선의 맛이 다르지 않다 했으니 그 광활한 범위에서 가장 신선하고 맛깔스러운 내용을 소개해야겠다는 당차고도 쑥스런 포부에 이어, 연재를 시작하는 첫 편에는 무엇을 소개해야 할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20여 년간 시골의 한 불교서점에서 오가는 손님들에게 직접 우린 차를 대접하는 부모님의 어깨너머로 차를 배운 것이 고작인 것 같았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그래도 차 생활(?)을 영 허투루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 4년을 꼬박 다회(茶會)에 몸담았던 것이다. 첫 연재의 주제가 결정됐다. 스무 살, 풋풋한 청춘들의 차 이야기이다.
찻잔에 스무 살 사랑과 우정을 담다
순천대학교 차(茶) 동아리, 향림다회
“학과 생활이냐 동아리 생활이냐”
알랑가 모르겠지만 대학생에게는 퍽 중요한 질문이다. 답을 하자면 내 경우는 후자였다. 향림다회 졸업생들도, 현재 재학하고 있는 학생들도 대답은 같을 것이다. 향림다회는 동아리 다우들에게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수업이 없는 빈 시간, 향림다회 다우들은 학생회관 4층에 위치한 동아리방으로 부지런히 올라간다. 동아리방 문을 열면 좌식 차탁의 중앙에 앉은 팽주가 차를 우리고 있다. “차 마실래?” 묻기도 하고, 묻기 전에 “나도 차 마실래” 말하기도 한다. 몇몇은 넓은 차탁에 전공 서적들을 펼쳐놓고 과제에 몰두하고 있고, 볕 잘 드는 한쪽 구석에서는 누군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마친 저녁이면 동아리방이 북적북적해진다. 매주 ‘학습’을 하기 때문이다. 그냥 마시는 것도 좋지만 알고 마시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의미의 차 학습이다. 대게는 선배 다우가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차의 역사 ▲차의 성분과 효능 ▲세계의 명차 ▲다기의 종류와 용도 ▲행다 이론 및 실습 등을 주제로 강의한다.
계절별로 이어지는 연례행사도 있다. 봄이면 일 년 마실 차를 직접 만들러 제다(製茶) 실습을 간다. 동아리 창립자이자 차를 업으로 삼아 수제녹차를 만드는 1기 유수용 선배의 야생 차밭이 순천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화장품 금지, 향수 금지, 담배 금지, 로션 금지. 잡냄새 관리는 엄격하다. 차밭에서 어린 찻잎을 따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비비는 제다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차는 전문가의 그것보다 떫고 거칠지언정 동아리 생활에 애착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행사다. 크게보기
향림다회는 매년 봄 제다 실습을 통해 일 년 일용할 양식을 직접 만든다.
햇차를 만들고 나면 전교생을 대상으로 시음회를 개최한다. ‘이런 동아리도 있다’ 홍보하는 것이자 ‘우리가 이렇게 맛있는 차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학생회관 앞에 천막을 치고 동아리방의 다기를 온통 꺼내 나와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시음을 권하면, 차에 관심이 없던 일반 학생들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와 차 한 잔 하고 간다.
“차를 이렇게 잎으로 만드는 건지 몰랐어요” 티백 녹차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서툴지만 정성 담긴 차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차다. 묵은 찻잎을 방앗간으로 보내 만든 따끈따끈 차떡도 다식으로 인기 만점.
겨울에는 도자기다. <사랑과 영혼>에서 봤던 로맨틱한 물레질은 순번을 기다려야 할 만큼 관심이 뜨겁다. 스무 살 어린 손에 감기는 흙의 감촉,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릴라 치면 뒤에서 손을 잡아주는 훈훈한 선배… 주요 커플 탄생지이기도 한 ‘이을도방’이다. 이을 박노연 도예가는 몇 십 년째 일 년에 한 차례 향림다회에 도예지를 제공하며 학생 다우들과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향림다회를 졸업하면 차와도 이별일까. 아니다. 차는 더 이상 어렵고 불편하고 까다로운 의식이 아니라 4년간 몸에 밴 생활이 된다. 향림다회의 정회원이 됨을 인정하는 ‘다인식’에서 선물받은 일인용 다구는 사회생활을 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고 졸업한 선배들은 귀띔을 준다. 커피 대신 녹차를 마시는 직원은 자연스럽게 직장에 차향을 전하는 큐피트가 되는 셈이다.
일 년을 시작하며 고사를 지내는 출범식이나, 가을 즈음 동아리 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창립제에도 졸업한 모든 선배 다우가 초대받는다. 몸이 멀어 참석하지 못하는 선배들은 얼굴도 모르는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소정의 지원금을 기꺼이 희사하곤 한다. “선배님을 초대합니다” 라는 깜찍한 글씨가 적힌 엽서를, 지난해부터는 나도 받고 있다.
1988년 10월 28일 창립 이래 2013년 현재 28기 신입생들과 함께 하고 있는 향림다회는 한 잔의 차에서 향기와 사랑과 우정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차를 사랑하는 학생들의 모임이다. 거창하지 않아도, 전문적이지 않아도, 아담한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차 한 잔에 담긴 마음을 나누는 소중한 공간이다. 햇살 좋은 날,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맞으며 따끈하고 구수한 녹차를 마시던 그 어느 때의 내가 몹시도 부럽다.